상용 아저씨가 본보기로 죽은 후, 모두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았다. 나 역시 문을 잠그고
혼자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변조된 목소리로 나를 괴롭히던 천장위의 스피커 역시
상용 아저씨가 죽은 후로 잠잠했다. 그 녀석은 상용 아저씨를 죽일 때,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사람을
죽인이유 또한 별것도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역할놀이 때문에.
두려움과 분노에 몸이 떨려서, 억지로 잠들려 해도 잠이 오질 않았다.
푹 자고 일어나서
‘악몽을 꿨네.’
이러고 그냥 훌훌 털고, 일어나서 평소처럼 대충 아침 겸 점심으로 계란 하나 ‘탁’ 깨뜨려 넣은 라면
하나 끓여서 먹고, 남은 국물은 찬밥에 말아 먹은 다음. 해가 질 때까지 계속 컴퓨터를 하다가
친구들한테 전화해서 밤에 모여서 소주 한잔하면 좋으련만. 무심코 손목시계를 보니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종이에는 제한시간이 4일이라고 했다. 그러면 4일 후, 역할을 잘하면 집에 보내 주려나?’
“똑똑똑”
누군가의 노크소리에 감고 있던 눈이 떠졌다. 나도 모르게 잠깐 졸아버린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졸다니 나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 2시정도 됐겠지’라고 생각하며 손목시계를 보니,
8시였다. 졸았던 게 아니라 마음 놓고 푹 잔 거였다. 난 정말 대단하다.
“똑똑똑”
계속되는 노크소리에 문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문고리를 쥔 순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문의 옆의 벽에 기대어 말했다.
“누구세요?”
함부로 문을 열어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에 신중하게 행동했다.
“아, 저는 어제 서울대 다닌다고 소개한 사람입니다.”
“근데, 무슨 일로?”
“할아버지 기억나시죠? 할아버지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다들 불렀거든요. 지금 모두 모이고 그쪽만 남았는데.”
나는 혹시나 해서 쥐새끼 한 마리 들어올 정도로 문을 조금 열고, 바깥을 바라봤다. 모자를 쓴 남자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보였다. 나는 머쓱해서 산발이 된 머리를 긁적이며, 문을 열고 나왔다.
바깥 통로에는 이미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벽에 기대거나,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멍하니 있었다.
“다들 여기서 뭐하세요?”
할아버지는 내게 복도의 중앙에 번져있는 피를 눈으로 가리키며 대충 눈치를 줬다. 순간적으로 중앙복도
에 상용 아저씨의 시체가 있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체가 있는 곳에서 대화를 하기에는 다
들 심장이 너무 약한 모양이었다.
“하실 말씀이 도대체 뭐죠?”
모자를 쓴 남자가 먼저 이야기를 했다.
“흠”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한번 하시더니, 주위를 둘러보곤 말을 이으셨다.
“아무래도 우리가 서로를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불렀습니다. 우리가 여기로 잡혀온 이유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에헴”
할아버지는 말씀을 하시고 이리저리 눈치를 보셨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도 정말 용기를 내서 하
신 말씀일 것이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서로가 서로를 알고, 신뢰하고, 힘을 합치면 좋겠지만 상황이 상황
나름인지라.
“서로의 무엇을 알자는 거죠?”
정장차림의 아주머니가 말했다.
“에, 그러니까, 뭐 자세한 건 아니라도,”
할아버지는 아주머니의 비협조적인 말투에 당황하셨는지, 말을 더듬으셨다.
“최재희라고 합니다. 어제 말했다시피 대학생이고요. 그리고 이름정도는 서로 알아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자신의 역할까지는 무리더라도”
모자를 쓴 남자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흠,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꽤 멋있게 말했다.
역할의 비공개 또한 좋은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규칙에 쓰여 있던
-본인의 역할수행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습니다.
종이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역할을 함부로 말할 리가 없었다. 재희씨는 말을 마치고
아주머니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제가 먼저 소개를 했어야 했는데. 저는 권태식이라고 합니다. 그냥 할아버지라고 불러주십시오. 그게 편하니까, 에헴.”
할아버지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전 김수정 이예요. 그리고 아저씨, 저번에 때린 건 미안해요.”
할아버지의 말씀이 끝나자, 여자는 불쑥 자신의 이름을 말하더니, 이내 나를 보며 저번에 나의 따귀를
때린 것을 사과했다. 하지만 건성으로 사과를 한 것인지라,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나보고
아저씨라니, 하여튼 요즘 여자들은.
“저는 우소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저씨가 아닙니다.”
나는 소개를 하면서, 내가 정말 소인배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아저씨가 아니라는 말은 수정이라는
여자를 보며 해댔으니.
“저는, 저는 안세형입니다. 고등학생이고요.”
특유의 비브라토 섞인 소리로 세형학생이 소개를 했다. 뭐, 이름은 원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제보다 진정이 됐는지, 목소리의 떨림이 덜하다. 이제 소개를 하지 않은 사람은 둘. 차분한 아주머니와
말 한마디 없는 수염 아저씨. 모두가 그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하자 아주머니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미숙이라고 합니다. 그냥 정 선생님이라고 불러주세요.”
정 선생님의 소개가 끝나고 모두 수염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수염 아저씨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X자 표시를 하며 입에 댔다. 그러고 보니, 저 수염
아저씨가 말하는 걸 못 봤다.
“말을 못하시나?”
재희씨가 떠보듯이 말하자, 수염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는 허공에 손을 휘둘러댔다.
“여기, 수화 할 줄 아는 분 있나요? 저 아저씨가 수화로 말하시는데 통역 좀 해주세요.”
재희씨는 수염 아저씨의 수화를 알아보려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모르는데요.”
다들 고개를 저었다. 나 또한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수화를 할 줄 안다. 대학교 다닐 때,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많이 배웠고,
덕분에 간단한 의사소통은 다 할 줄 안다. 하지만 내가 수화를 해봤자, 수염 아저씨는 못 알아 볼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저 아저씨가 하고 있는 손짓은 모두 엉터리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는 저 아저씨는
실제로 말을 못하는 장애가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게 분명했다.
아마도 그 역할은 벙어리일 테지.
당분간 이 사실은 나만 아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 거기 가방에 필기구 있지?”
“네,”
“그러면 그걸로 의사소통하면 되겠다.”
세형학생은 재희씨의 말대로 종이와 펜을 꺼냈고, 재희씨는 그것을 수염 아저씨에게 주었다.
수염 아저씨는 펜을 가지고, 무언가를 썼다.
- 박만도라고 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방식으로 제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
그렇게 각자의 소개가 마무리 지어졌다. 대충 뭔가 마무리 지어지니, 잊고있던 허기가 느껴져 배가
고파졌다. 여기 온 후로 물도 못 마시고, 아무것도 못 먹었다. 나는 주위를 살피다가 여기서 가장
친절해 보이는 재희씨에게 슬며시 물었다.
“혹시, 식사는 하셨나요? 물은 어디에 있죠?”
나의 분위기를 확 깨는 질문에 재희씨는 나의 입장을 생각해서 귓속말로 말해주었다.
“방에 보면 구석에 냉장고가 있을 거예요, 거기에 음식들이 있는데 역할극이 끝나는 4일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예요.”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재희씨의 역할은 혹시 천사일까? 남자한테까지 친절한 남자는 보기드믄데 정말 존경스러웠다. 재희씨의
말을 듣고,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방에 들어가려는데, 반대편 방을 쓰는 수정씨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소형씨라고 했죠. 궁금해서 그러는데. 여기서 굶어야하나요? 음식은 어떻게 해결하죠?”
“모르겠는데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문들 닫고 냉장고를 찾았다. 방의 구석에는 재희씨의 말대로 작은 냉장고가 있었다.
냉장고에는 물이랑, 식빵, 그리고 초콜릿 등이 있었다. 나는 빵과 물을 집어서 침대에 앉아서 먹었다.
간소했지만 배고픈 내 배에게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는 대충 우리가 하고 있는
역할놀이에 대해 생각했다.
나의 역할은 ???, 그리고 수염 아저씨, 아니 만도 아저씨의 역할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벙어리.
나와 만도 아저씨가 맡은 역할을 봤을 때는 별로 위험하지 않다. 그리고 아직은 그들의 역할을
모르겠지만 세형학생, 재희씨, 수정씨, 할아버지, 정 선생님은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세형학생은 겁이 많은 거 같고, 재희씨는 착하고, 할아버지는 할아버지고, 정 선생님은 말하는 게 좀
깐깐하지만 뭐 위험해 보이지는 않고, 수정씨는 좀 위험하지만 뭐 여자니까,
우리를 가둬 놓은 녀석의 말대로 역할만 제대로 수행하면 그렇게까지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생각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 나가자, 방의 반대편에 수정씨가 빵을 손가락으로 뜯어
먹으면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눈을 마주치기가 겁나 그냥 무시하고, 재희씨와 할아버지 그리고
정 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갔다. 셋은 모여서 뭔가 대화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어떻게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는 이곳이 꽤 따뜻한데도 아직 정장을 제대로 갖춰 입은
정 선생님을 보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덥지 않으세요? 전 더워서 티셔츠 하나만 입고 있는데”
“제 마음이에요, 상관하지 마세요.”
나는 날카로운 반응에 움찔했다. 뭐, 어느 정도 깐깐한 건 알았지만. 같이 대화를 하던 할아버지와
재희씨도 정 선생님의 갑작스런 정색에 꽤 놀란 눈치였다.
“전 이만 방으로 가보겠습니다.”
정 선생님은 그러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 역시 민망함에 눈치를 보다가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뭐야! 괜히 짜증이나 내고, 잠이나 자야지.’
나는 찝찝한 마음을 안고 잠을 청했다. 생각했던 거보다 안전하다고 느껴서 그런지는 몰라도 첫날보다
편안했다. 생각해보니 벌써 이틀 째, 오늘은 그 녀석의 목소리도 하루종일 안 들렸다.
그래서 그런지 잠이 잘 왔다.
“털썩, 뚜벅뚜벅, 또각또각.”
잠귀가 밝은 탓에, 밖에서 나는 괴상한 소리에 눈이 떠졌다. 나는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나 말고도 재희씨, 정 선생님이 통로에 나와서 숨죽이고 복도중앙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재희씨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죠?”
“모르겠어요. 복도 중앙 쪽에 뭔가 있어요.”
재희씨는 그렇게 말하고,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는 서서히 복도중앙 쪽으로 다가갔다.
나 역시 재희씨를 따라갔다. 그리고 내 뒤를 정 선생님이 따랐다. 재희씨는 눈치를 보다가 순간적으로
뛰쳐나갔다. 나 역시 재희씨의 뒤를 따라 나갔다. 복도중앙의 구석에 뭔가 보였다.
“누구냐?”
재희씨가 구석에 있는 그것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그것이 일어났다. 자세히 보니, 세형학생이었다.
하지만 그 광경이 가히 호러스러웠다. 바닥에는 누군가의 팔과 다리가 잘려져 널브러져 있고,
피로 물든 교복 와이셔츠를 입은 세형학생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이 들려 있었다.
무엇보다 끔찍했던 건 세형학생의 울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니에요”
세형학생이 우리에게 다가오며 중얼거렸다. 나는 너무 놀라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때, 뒤에 있던 정 선생님이 정장마이의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탕”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던 세형학생은 ‘털썩’ 쓰러졌다. 재희씨가 황급히 손에 권총을
든 정 선생님의 손을 붙잡았지만 이미 방아쇠가 당겨진 후였다.
총알은 애석하게도 세형학생의 이마에 명중했고, 세형학생은 비명한마디 없이 즉사했다.
순간적으로 이마에 구멍이 뻥 뚫린 채,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지는 세형학생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고,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버렸다.
“날, 죽이려고 했어.”
정 선생님이 중얼거렸다. 세영학생을 죽이고, 이성을 잃은 듯했다.
“소형씨 좀 도와주세요.”
정 선생님의 권총을 뺏으려는 재희씨는 힘이 부치는지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예?, 네”
도와준다고 대답은 했지만, 난 주저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나서지 않아도,
곧 총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할아버지와 만도 아저씨가 대충 눈치를 채고 재희씨를 도와 이성을 잃은
정 선생님을 뒤에서 붙잡았고, 그 틈에 재희씨가 권총을 정 선생님의 손에서 빼내었다. 그리고는
총구를 정 선생님의 이마에 겨누었다. 순식간에 상황종료였다.
“권총을 이리 줘, 내꺼야”
정 선생님은 만도 아저씨에게 붙잡힌 채, 자신을 겨누는 재희씨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왜 총을 쐈죠?”
재희씨는 비교적 침착함을 유지하며 정 선생님에게 물었다.
“날, 죽이려 했어, 손에 칼을 쥐고 있었어!!”
정 선생님은 악을 써댔다.
“울고 있었어요! 칼도 손에서 버리려했고!”
재희씨의 말이 맞았다. 나 역시도 세형학생의 끔찍한 모습을 보고, 많이 놀라기는 했지만, 뭐랄까?
그다지 위험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생명의 위협은 느끼지 못했다고나할까? 하지만 정 선생님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총을 쐈다. 우리들 중에 가장 안전한 맨 뒤에 있었으면서.
“왜 죽였냐고요!! 그리고 권총은 어디서 났어요?!!”
재희씨는 다시금 물었다. 권총을 손에 쥔 채 부르르 떨면서.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재희씨가 총을 쏠 수 없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재희씨는 남에게 총을 쏠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지금 총을 쏜다면 뒤에서 정 선생님을 붙잡고 있는 만도 아저씨도 총에 맞을 게 분명했다.
재희씨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재희씨가 이렇게까지 정 선생님을 위협하며 추궁하는 이유는?
‘아마도 권총까지 가지고 있는 정 선생님이 맡은 역할을 알아보기 위해서겠지.’
“그게 내 역할이니까!!! 그래서 총을 쐈어.”
정 선생님이 울면서 주저앉았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재희씨의 추궁에 정 선생님은 자신의 역할이었음을
실토해냈다. 뭐, 처음 보는 학생의 목숨보다 자신의 목숨이 걸려있는 역할이 더 소중한 것은
당연한 거니까. 그렇다고 ‘그냥 죽이고 싶어서 쐈어’라고 할 수도 없고. 이로써 내가 생각했던 안전한
역할놀이는 끝이 났다.
“와우! 드디어 여러분들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군요. 관객으로써, 지루했었는데 이제야 보기 좋네요. 팝콘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네요. 하하하”
오랜만에 스피커에서 그 녀석의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약 눈앞에 그 녀석이 있다면 갈기갈기
찢어버렸겠지만, 할 수 있는 건, 그저 묵묵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그 녀석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듣는 것밖에 없었다.
“우소형씨,”
스피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예?”
나는 엉겁결에 대답을 했다.
“방금 전에 죽은 학생의 역할이 뭐였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학생의 방에 들어가서 가방앞쪽의 포켓을 열어보세요. 하하하”
나는 스피커의 소리를 듣고서 그냥 천장만 멍하니 바라봤다. 그런 내게 재희씨가 말했다.
“제가 가볼게요.”
재희씨는 천천히 세형학생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르고, 방문을 열고
내게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당신의 역할은 시체처리반입니다.
시체가 생기면 칼로 썰어서 중앙복도의 구석에 있는 수거함에 넣어주세요.
(칼은 침대 밑에 있습니다.)
“학생은 우리를 해치려하지 않았어요. 그건 느낌으로도 알 수 있었어요. 내가 조금만 빨리 움직였어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재희씨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나도 만도 아저씨도, 할아버지도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이대로 있어봤자 우리는 모두 죽을 거예요. 아무도 지키지 못하고.”
재희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세영학생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너무 순식간이라 말리려 했지만
말릴 수가 없었다.
“탕”
문밖으로 단발의 총성이 새어나왔다. 모두들 놀라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총소리가 복도에 서 울리다가
사라지고,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침묵이 흐르는 동안, 아무도 방안을 확인하지 못했다. 2분정도
지났을까? 나는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용기를 내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의 중앙에는 재희씨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었다.
‘재희씨, 이 방법밖에 없었나요?’
나는 조용히 다가가서 재희씨가 떨어뜨린 권총을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문을 닫았다.
“어떻게 됐는가?”
할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재희씨는 자살했습니다.”
할아버지와 만도 아저씨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 정 선생님은 벽을 짚고 일어섰다.
저 사람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둘이나 죽었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당신은 내가 죽이겠어.”
나는 권총으로 정 선생님을 겨눴다. 하지만 나는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고, 정 선생님은 그런 나를
담담히 보다가 내가 들고 있는 권총을 손으로 쳐냈다. 총은 쇳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내가 총을 다시 주워서 다시 정 선생님을 겨누자, 정 선생님이 말했다.
"총알은 2발밖에 없었어. 자살도 죽은 건 죽은 건데"
정 선생님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벽을 짚고 힘겹게 걸어갔다. 나는 더욱 화가 났고,
만도 아저씨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정 선생님에게 달려드는 나를 막아섰다.
“내 역할은 이제 끝났어.”
정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했다. 정 선생님이 방문을 열자 방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며 정 선생님을 반대편벽으로 밀어냈다. 지금까지 안보이던 수정씨였다.
수정씨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고, 그 칼은 정 선생님의 배에 정확히 꽂혔다. 수정씨는 칼에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정 선생님의 귀에 대고 말했다. 다 들리게끔.
“왜 웃고 있는 거야? 죽어버려!”
정 선생님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수정씨는 그런 정 선생님을 아랑곳하지 않고
칼로 배를 더욱 깊이 쑤셨다.
“펑!!”
순간, 기계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고, 칼로 배를 찌르던 수정씨의 얼굴에 정 선생님이 피를 토해냈다.
피로 범벅이 된 수정씨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나는 혹시 수정씨도 죽었나하고, 얼른 쓰러진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그녀는 기절한 것 뿐이었다.
나는 상의를 벗어 그녀의 얼굴에 잔득 묻은 피를 어느 정도 닦아내었다. 순간 스피커에서 그녀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와우, 뜸을 들였던 만큼 모두가 화끈하게 보여주는 군요. 제가 원했던 거예요. 특히나 젊은 아가씨, 참 대단하군요. 꼭 영화의 한 장면 같았어요. 하하하”
그 녀석은 우리끼리 서로 죽이는 것이 마냥 즐거운 모양이었다. 결국 모든 상황이 놈이 바라던 대로 됐
고, 우리는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했다.
“와우? 지금 감탄이 나와?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이 개죽음을 당했는데? 고작 네 녀석이 엉성하게 짜놓은 역할놀이 때문에!!”
나는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워~워~, 진정하세요. 소형씨, 그나저나 궁금하지 않으세요? 총을 들고 있던 아줌마의 역할. 궁금하시다면 아주머니가 입고 있는 상의의 안주머니를 보세요.”
나는 원망가득한 눈으로 천장을 한번 보고, 천천히 정 선생님의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결코 그 녀석의 지시를 따르는 게 아니다. 나는 그 녀석이 지시를 하지 않았어도 그녀의 역할을
확인했을 것이다. 정 선생님의 역할이 너무 궁금했다.
그녀의 몸은 피와 살점으로 뒤덮여 어떤 게 옷이고, 어떤 게 가죽인지 헷갈렸다.
나는 한참을 헤집다가 겨우 마이의 안주머니에서 빨갛게 물든 종이를 찾아냈다.
피가 묻어 있었지만 충분히 글씨는 알아볼 수 있었다.
*중요역할
당신의 역할은 총잡이입니다.
총으로 2사람을 죽이세요. 총알은 2발이며 본인을 쏴도 상관은 없답니다.
(총과 총알은 냉장고 안에 있습니다.)
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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