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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일본인 폭도들이 조선 고종(高宗)의 황후인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를 시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 당시,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점과 시해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일본측 자료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이 자료는 명성황후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침실 안에서 살해된 것이 아니라, 침전(寢殿) 밖 뜰로 끌려가 칼에 찔려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시해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문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12일, 일본 외무성 부설 외교사료관에서 최근 찾아낸 기밀 문건 ‘한국 왕비 살해 일건(一件) 제2권’에 수록된 보고서 사본을 공개했다.
당시 일본의 경성 주재 일등영사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을미사변 직후 직접 현장을 조사한 뒤 사건 발생 후 석 달이 채 안된 1895년 12월 21일 본국에 진상을 보고한 내용으로, 신빙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인들이 고종과 명성황후의 침소가 있던 건청궁(乾淸宮)에 침입한 경로와 황후 시해 지점, 황후의 시신을 잠시 안치했던 장소와 시신을 불태운 지점을 표시했다.
경복궁 내부의 세밀한 평면도에 표시된 침입 경로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으로 침입, 경회루 왼쪽을 지나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 건청궁으로 들어갔다.
보고서는 당시 건청궁 내 장안당(長安堂)에는 고종이, 곤령합(坤寧閤)에는 명성황후가 거처하고 있었으며, 이중 어딘지 확인되지 않는 장소로부터 명성황후를 찾아냈다고 기록했다.
이어 일본인들은 장안당과 곤령합 사이 뜰로 황후를 끌고와 시해했으며, 황후의 시신을 곤령합의 일부인 동쪽 건물(옥호루·玉壺樓)의 방 안으로 잠시 옮겨 놓았다가 건청궁 동쪽의 인공산인 녹산(鹿山) 남쪽에서 시신을 불태웠다고 기록돼 있다.
학계에선 그동안 폭도의 일원이었던 일본인과 목격자 등의 수기와 증언을 근거로 명성황후가 옥호루 실내에서 시해된 것으로 여겨 왔으며, 이를 토대로 광복 이후 정부에선 옥호루 근처에 ‘명성황후 조난지지비(遭難之地碑)’를 세우기도 했다.
이태진 교수는 “실내가 아닌 궁궐 마당에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해됐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이 자객에 의한 암살이 아니라 군사작전과 다름없는 궁성 점령 사건이었음을 의미한다”며 “일본이 살해장소를 오랫동안 은폐했다는 점에서 그들 스스로 이 사건이 움직일 수 없는 만행이었다는 것을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일본군이 시신의 목을 베어 그 머리의귀을 잡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애국지사의 목을 작두로 자르고 있는 일본군의 만행
일본은 사람을 죽이는데 있어 아이, 어른을 가리질 않았다. 사진은 어린아이들을 학살하여 쌓 아둔 장면.
정신대에 무차별적으로 끌려가는 조선의 처녀들은 그곳에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받으면 살았습니다.
일본 극우파 활동가 2명은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 평화비에 말뚝을 묶고,
사진과 동영상을 촬여해서 블로그와 유투브에 올렸습니다.
동영상을 보면 한 일본남성이 위안부 소녀상 쪽으로 가서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적힌 길이 1미터의 나무말뚝을 옆에 세워놓고 사진을 찍자... 경찰은 말뚝을 옆으로 치워놓고,
불과20분뒤에 다시나타나서 이번엔 말뚝을 준비한 끈으로 묶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인 남성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면서 소녀상근처의 경비하 허술하다고 비꼬았습니다.
동영상에서 스즈키는 대사관 바로 코앞에 위안부상, 매1춘부상이 있다.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동영상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고 합니다.
윤봉길의사 "도시락 폭탄 의거 72년만에 첫 공개" 대한민국역사화보전 윤봉길의사의 도시락 폭탄
연행되는 윤봉길 의사
스물다섯 살 청년 윤봉길은 1932년 4월 28일 거사 장소인 상하이 홍구공 원을 사전 답사하고 숙소인 동방공우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아들에게 시로 된 유서를 썼다.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아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마라."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3월 면회온 프랑스 신부와 동생들에게 유언을 남기고 있는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가 순국 한달전인 1910년 2월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담아 옥중에서 남긴 유묵
1909년 안중근 의사가 동지들과 함께 "나라을 위해 목숨을 바치자"며 손가 락을 끊어 결의를 다지는 "단지동맹"을 맺은 사실 등을 기념해 만든 옆서
어머니가 보내준 무명옷을 입고 순국 5분 전 촬영한 안중근 의사의 의연한 모습
1877년 일본의 메이지 유신정권은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영토라 인정함
1900년 대한제국칙령에 독도는 조선땅 다시한번 재확인함
1905년 독도를 다케시마로 하여 시마네현에 강제 편입
일본이 우기는 이유 1905년에 있던 시마네현 강제편입을 근거로 함
일본 섬원숭이 그때부터 지1랄 함
다케시마 = 죽도 (대나무섬) 독도가 뭘봐서 대나무섬이냐 이원숭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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