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20세기에 유럽에서의 최대규모 폭격 - Bombing Of Dresden
1940년 영국 본토를 폭격할 정도로 항공전에 있어 기세등등했던 차지했던 독일은 1943년이 되자 상황이 절망적으로 바뀌었다.
동부전선에 독일군 전체 전력의 75%가량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국의 하늘은 완전히 발가벗겨져 있었다.
영국군은 신형의 대형 랭카스터 폭격기를 앞세워 독일 내륙을 압박했다.
히틀러와 공군장관 괴링은 제국의 영공을 지켜내기 위해 동부전선에서 수많은 전투기와 대공포 포대를 서유럽으로 이동시키는것으로 맞섰다.
하지만 상황은 더 악화됐는데
북아프리카 군단이 항복하면서 독일군은 남유럽 방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이다.
지중해 해역을 방어하기 위해 동부전선에서 상당수의 공군력을 끌어와 투입했으나 근본적으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불과 6개월만에 전체 공군력의 30~40퍼센트를 손실했다.
상황에 고무된 영미 연합군은 자신들의 공군력을 적 전선을 상대로 폭격하는 전술 폭격이 아닌,
내륙 깊숙히 독일의 산업시설이나 중심부를 타격해 전쟁수행능력을 상실시켜 버리겠다는 전략 폭격 계획을 수립한다.
3년전과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에 영국 공군 폭격비행단 사령관 아서 해리스 준장은 단언했다.
"미국이 지원해주기만 한다면 베를린을 끝에서 끝에서까지 초토화시킬 수 있다. 폭격기 수백대를 잃겠지만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무시무시한 발언이었다. 어떠한 피해를 감수하든, 독일의 숨통을 끊어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1943년 7월 24일, '고모라 작전'을 개시해 작전명 그대로 함부르크를 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폭격의 결과로 4만 5000여명의 함부르크 시민이 사망했고 도시의 4분의 3이 사라졌다.
1943년 11월 18일, 이번엔 폭격기 450대가 베를린을 향해 날아가 무차별 폭격을 개시했다.
폭격이 끝나고 며칠 뒤, 750대가 출동했다.
이로 인해 베를린 시민 수천명이 사망했다.
겨울에는 1000대가 넘는 폭격을 퍼부었다.
영국의 베를린 폭격은 독일의 런던 대공습에 대한 보복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독일은 런던 공습은 1939년 9월 영국의 폭격에 대한 보복이라고 여겼다. 그러자 영국인들은 그보다 앞선 9월 1일 독일의 바르샤바 공습에 대한 응징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이 놀음은 중요하지 않다. 영국도 독일보다 앞서 1920년 이라크 폭동에 폭격을 가했으니.
그런데 영국 내부에서도 테러행위에 지나지 않는 이 폭격으로 인해 논란이 많았다.
"영국 정부는 절대로 그런 정책에 의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국 공군 수뇌부는 전략폭격의 진정한 가치는 적의 도시를 폭격하는것에 있고, 그 목표는 일반 시민들이 전쟁을 느끼는것에 있다고 믿었다.
어쨋든 베를린 폭격은 서막에 불과했다.
1944년부터는 미국도 폭격에 가담하면서 독일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940년 독일은 쌍발 폭격기의 적은 폭장량으로 런던을 공습했지만 영국과 미국은 그보다 많은 숫자의, 더 큰 4발 폭격기가 있었다.
사실 독일은 이 폭격을 최소한으로 줄일수도 있었다.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는 전투기와 대공로켓 생산에 집중하도록 조언했지만,
비전문가답게 거대 무기에 집착하던 히틀러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공격용 무기인 V2 로켓을 생산하는데만 관심을 기울였다.
V2는 서방연합군과의 혈전에 결정적인 우위를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탄도미사일답게 V2는 정말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는 물건이었다.
(가끔씩은 런던같이 커다란 도시도 맞추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V2는 정말 한발당 세명을 죽이지 못했다. 1300여발이 발사됐지만 사망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2800여명이었다.
사담 후세인은 스커드 로켓을 정치적인 의도로 이용했지만 히틀러는 어떤 목적을 노리고 이 기괴한 무기를 발사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만약 히틀러가 V2 개발을 단념하고 전투기 생산에 집중했더라면 독일은 같은 자원으로 전투기 2만 5000대 이상을 생산할 수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어쨋든 1945년이 되자 독일 공군은 거의 전멸했고, 독일 시민들에게는 하늘으로부터의 공포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연합군의 전략폭격은 분명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독일의 군수생산능력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군수품을 활발히 생산했으며 (물론 잠재 생산능력은 큰 타격을 입었겠지만)
그리고 애시당초 기대했던 독일 국민들의 의지상실은 없는듯 했다.
영국군에게는 좀 더 다른 방법이 필요했을까?
1945년 2월 13일, 드레스덴은 영국간의 항공전에 있어 가장 큰 재물이 될 터였다.
드레스덴은 독일 동부에 위치한 문화도시로, 벨기에의 브뤼주,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비견할만한 유서깊은 도시다. (하지만 공업도시로서도 성장했다.)
베를린보다 더 멀리 떨어진, 이 구석에 위치한 문화도시가 공격의 목표가 될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때문에 드레스덴에는 난민들이 더 많이 몰려있었다.
4000파운드(약 2t) 폭탄을 적재중인 랭카스터
영국군은 이 도시의 공격 목표는 동부전선으로 이동하는 독일군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독일 민간인들에 대한 복수 혹은 민간인들로 하여금 전쟁수행의지를 상실시키려는 목적으로 보는게 더 타당할 것이다.
영국군은 좀 더 치밀하게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목표는 명백했다. 민간인들의 더 큰 피해.
1945년 2월 13일 오후, 영국 본토에서 250여대의 폭격기가 이륙했고 이들은 1000km가 넘는 거리를 날아갔다. 이들은 대부분 소이탄으로 무장했다.
밤 10시 직후, 첫번째 공습이 시작되고 공습 경보 사이렌에 따라 민간인들은 방공호로 대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