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중위 사건
개요
1 사건 발생 개요
서술하기에 앞서 이상의 발생 개요는 군 공식 수사결과에 따랐음을 밝힌다.
1998년 2월 24일 오전 9시즈음, 당시 예정에 없던 부대 내 VIP(미군 장성 진급자 10명) 방문 일정이 잡혀 해당 부대는 한창 분주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1시간 뒤 일정이 취소되고 이때 김훈중위는 식당에 들어가 물을 마신 후, 소대 사병모임에서 돌아온 소대원들의 귀대 보고를 받았다. 오전 10시 30분경, 김 중위는 식당에 잠시 들러 라면을 먹고 있던 소대원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눈 후 라면을 몇 젓가락 먹고 식당을 떠났다.
그 후 근무복장을 갖춰입고 정찰을 나간다며 소대장실을 떠난 것이 오전 11시 45분이었다(이는 당시 소대장실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었다던 부소대장의 증언이다.). 직후인 오전 11시 50분경 상황실에 들른 것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그는 오후 12시 20분경, 식사인사를 하러 돌아다니던 소대원에 의해 GP 지하벙커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2 군 수사결과 발표
약 2개월 후인 1998년 4월 28일, 사건을 조사한 한미합동수사팀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살'이라는 1차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소대원들의 알리바이가 모두 확인되었으며 그들 중 살해 동기를 가진 이를 찾을 수 없었고, 원인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자살이 확실하다는 그들의 발표는 다시 말해 '타살의 증거가 없으므로 자살로 판정'이라는 요지의 판결이었다. 이는 수사과학적으로 평범한 판단으로 자살의 경우 자살했다는 직접적인 물증이 나오기 쉽지 않기 때문에(그러므로 평범한 자살자 - 교살이나 추락사 등 - 도 수사를 하는 것이다.) 타살의 증거가 없을 경우 자살로 추정하는 것이 관례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엔 사건이 타살로 의심될만한 정황과 증거가 후에 명백하게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군 당국에선 성급하게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수사팀이 발표한 자료에 따른 김 중위가 자살시도를 할 당시 취했을 부자연스러운 격발자세와, 총을 잡고 격발했을 오른손에서 화약흔이 나오지 않았다는 점은 납득하기가 힘들었고 유족은 이에 반발해 재수사를 촉구했다. 그 뒤 부실수사를 문제 삼는 언론의 보도가 잇따르자 국방부는 특조단을 조직해 재수사를 결정하기로 했지만, 이 시점에서 드러난 의문점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재수사 과정에서 열린 공개토론회에서 참석한 8명의 법의학자 가운데 재미 법의학자 노여수 박사를 제외한 전원이 자살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고, 이에 따라 재수사에서도 자살로 결론이 내려졌다.
의문점들
수사결과 발표 당시 제기된 문제들과 그에 따라 밝혀진 새로운 사실들, 후에 다시 제기된 의문점 등 여러가지가 많지만 대표적인 사항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 자살 동기는 무엇인가?
김 중위가 자살을 하였다면 분명한 동기가 있어야 할 것인데 수사팀은 이를 밝혀내지 못했다. 그는 육사 출신의 군인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육사 52기로 입학해 아버지를 따라 군인의 길을 걷기로 작정했었다. 이에 대해 국방부 특조단은 '김 중위가 부모(특히 아버지)에 의해 원치 않았던 적성을 강요받았고, 이는 자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그의 육사 진학을 반대한 것은 가족들이었고 그가 일반대학에 진학해 국제변호사가 되길 바랐다고 한다. 그는 임관후 사단장 표창을 받은 적이 있으며 사건 발생 1달 전에는 육군정보학교 군사영어 교육반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우수한 군인이었다. 게다가 당시 소대원들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 중위가 그렇게 자살할 인물은 아니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그의 주변인들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 손에서 화약흔이 발견되지 않았다?
군과 유족 사이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이 이루어졌으며 2012년 현재까지도 끝나지 않은 떡밥. 맨손으로 총을 쥐고 격발했다면 필시 화약 잔여물이 발견되어야 함이 정상인데, 분석 결과에 따르면 오른손잡이인 김 중위의 오른손에서 그런 물질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반대쪽인 왼손에서 화상 및 잔여물이 발견되었다. 노여수 박사는 이를 가까운 곳에서 총을 발사하려는 것을 막으려다 생긴 방어흔으로 보았으나 토론회에 참여했던 이윤성 교수는 사입구가 머리 오른쪽이라는 점을 들어 방어흔이 아니라고 보았다. 토론회에 참석한 법의학자들은 확실하게 자살하기 위해 왼손으로 총열을 감싸고 두 손으로 총을 쏘았을 가능성을 제시했으며 국방부도 이 견해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2011년 비슷한 자세로 사격 시험을 하였으나 오른손에서 화약이 검출되었으며 국방부는 이 실험의 결과에 대해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고 하여 결정적인 증거로 보지 않았다.
- 총에서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다?
화약흔 이상으로 의문스러운 점으로 김 중위는 발견 당시 맨손이었고 그가 총을 잡고 쐈다면 당연히 지문이 검출되었음이 마땅하나, 총에선 아무런 지문도 발견되지 않았다. 국방부는 처음에는 권총에는 늘 기름칠을 하기 때문에 지문이 잘 남지 않을 수 있다고 변명하였으나 재조사 단계에서 감식관에게 직접 확인한 결과 지문이 아예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지문이 나오기는 하였으나 누구의 것인지 확인이 불가능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 총이 발사된 거리
보통 권총자살을 하는 경우엔 격발시 총이 흔들려 빗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몸에 꽉 대고 쏘는 '접사'의 형태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김 중위의 경우 사입구가 밀착사의 형태라고 보기엔 어렵고 또한 밀착사의 경우 화약이 사입구 안으로 말려들어갔어야 하는데 밖에 많이 묻어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접사가 아니라 약간 떨어져서 쏘는 '근접사'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권총의 총열 안쪽 7cm 부근에서 핏자국이 발견되었는데 밀착사의 경우라면 후풍효과(blow back effect) 때문에 피의 흔적이 총열 밖에 묻어 있어야 하는게 정상.그러나 자살설을 지지하는 국내 법의학자들은 별 모양의 파열과 총구 자국이 있다는 점에서 접사로 보았고 설령 근접사라 하더라도 충분한 자살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 김 중위의 몸에서 발견된 부상 흔적들
김 중위의 오른쪽 손에서 2.5cm x 1.5cm 크기의 찰과상이 발견되었으며, 두정부의 상반부 가운데 피하조직에서 방사선 골절 및 4.8cm 크기의 혈종이 발견되었다. 타살 측에서는 이를 둔기 손상으로 보고 이런 종류의 상처는 뇌진탕으로 즉시 의식을 잃게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그가 사건 당시 누군가와 격투를 벌였거나 일방적인 공격을 받았음을 추측하였으나 자살 측에서는 총격으로 생긴 부가적인 상해로 보고 있다. 무엇보다 둔기를 맞아 의식을 잃은 뒤 총에 맞았다면 앞서 왼손의 화약 흔적을 방어흔으로 본 것과 모순된다고 지적한다. 재조사 당시 개로 실험한 결과 두개골에 유사한 골절 및 혈종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 현장에 남겨진 격투의 흔적들
윗 항목과 연계되는 사항으로, 사건 현장인 241 GP 3번 벙커는 북쪽과 가장 근접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벙커에 설치된 크레모아 격발스위치를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 중에 하나였다. 때문에 하루 두번 실시되는 전원투입 근무 때마다 소속 부대는 스위치를 감싸고 있는 나무박스의 상태를 점검하고 문제가 생길 경우 선임하사에게 보고한 뒤 곧장 고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건 후 3번 벙커 안의 크레모아 박스 뚜껑은 부서져 있었다. 아침에만 해도 부대 VIP 방문 소식으로 분주했을 부대에서 크레모아 박스가 부서진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수시간 동안 방치해두었을까? 또한 김 중위가 왼손에 차고 있던 손목시계 유리가 깨진 상태로 발견된 것은 평소 김 중위의 업무 성격으로 보아 시계 유리가 부서질 이유가 없다는 점으로 볼 때 강한 의혹을 심어주는 사실이다.
사건 뒤에 떠도는 이야기
2009년 군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 2012년 국민권익위원회에서 재차 조사를 하였으나 자살 타살 어느 쪽으로도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이유로 진상규명 불능결정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김 중위의 죽음에 JSA라는 독특한 배경이 도사리고 있을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김 중위가 부소대장인 김영훈 중사가 북한군 병사와 불법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알고서 이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김훈 중위가 상부에 보고할까봐 김영훈 중사가 김 중위를 살해한 하극상사건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기사 김영훈 중사는 개인적인 호기심(본인주장)으로 야간을 이용해 최소 20에서 최대 30차례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군 초소를 찾아갔다. 후에 해당 사실이 적발된 뒤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되었다. 북한군 병사 무단 접촉 사실이 알려지자 그때까지는 비현실적이라는 평을 듣던, 2000년 개봉한 영화의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소설 DMZ의 내용이 현실에서 일어났다고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참고로 소설 DMZ는 1997년작으로 발표 당시 각종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나 남북한 병사가 서로 만난다는 설정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최종심에서 탈락했다.
실제로 이 사건을 다룬 어떤 방송에서는 김 중사를 은근히 의심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고 김중사는 나중에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 소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 중사가 북한군에 포섭되어 김훈 중위를 살해한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된 바 있었다. 그러나 조사 결과 북한 병사와의 접촉이 단순한 호기심 차원이었고 별다른 이적성을 찾을 수 없으며 김중사가 연루되었다는 명백한 근거가 없었고 자살로 결론이 나면서 무혐의가 되었다.기사 김중사의 사망 원인이 자살로 결론이 난 뒤에, 김영훈 중사와 가족이 김영훈 중사의 범행의혹을 제시한 3개 언론사에 대하여 일부 승소로 명예훼손에 대한 손해배상을 받았다.기사
2012년 오마이뉴스의 보도에 의하면 김 중위의 사인을 자살로 판단한 전직 미 국방부 시체감식단의 스펜서 박사가 검시관으로서 비윤리적 행위 행위를 한 것으로 드러나 파면된걸로 알려졌다. 결정적으로 이 박사는 이전에도 타살인 피해자를 자살로 잘못 판단한 사례가 있는걸로 드러나 논란이 되는 상황. 다만 국방부가 자살설을 채택하는데 스펜서 박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오마이뉴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그 외에도 국내 법의학자 여럿이 자살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2012년 국민권익위원회는 사망 원인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경우에도 순직으로 인정할 것을 권고했으며 2013년 3월 군의 '전공사상자 처리 훈령' 개정으로 김훈 중위는 사건 15년 만에 순직 처리되어 국가유공자 자격을 인정받게 되었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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