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나는 일본을 위해 이토를 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모습을 재연한 영화 '도마 안중근'의 배우 유오성 / 사진=영화캡쳐]
'표지석', 오랜 숙원 이뤄져
지난 7월 28일 오전 11시30분, 베이징 국빈 영빈관인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중국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만났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시 주석에게 "안중근 의사의 의거 현장에 기념 표지석을 설치하도록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시 주석은 즉석에서 "유관기관에 검토를 지시하겠다"고 답했다.
이는 우리 정부가 오래 숙원해 온 안중근 표지석이 공식적으로 처음 중국측 답변을 받아낸 계기였다. 그 전에도 하얼빈한인회와 외교부 등에서 이 표지석 설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으나, 그때마다 중국은 망설였다.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한 입장유보였다.
그러나 2011년부터 상황이 급전됐다. 중국과 일본은 댜오위다오 영토분쟁으로 심각한 외교갈등을 겪어 오는 동안 한-중 관계는 점점 더 밀월에 접어들었다.
결정적으로 박 대통령 방중은 양국 경제, 안보 협력과 함께 '표지석' 외교에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일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예정대로 이 표지석을 설치할 것으로 보인다.


[안 의사가 의거를 감행할 당시 하얼빈역<상>과 오늘날의 역사 모습<하>. 중국 북만주 지역의 교통 거점이다. / 사진=소후닷컴/연합뉴스]
중국인들에게도 유명한 '삼각 표지'
헤이룽장성 하얼빈역 플랫폼 바닥에 있는 사각형 안 삼각형 표지는 이미 중국인들에게도 그 의미가 잘 인식된 '안중근 표식'이다. '안중근 표지석'은 이 자리나 표식 부근에 설치될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중국에 사는 동안 약 다섯 차례 하얼빈역을 방문한 적이 있었고, 그 때마다 예의 삼각표지를 보았다. 간간이 중국인들이 지나치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안중진(안중근의 중국식 발음)'을 이야기하곤 했다.
하얼빈은 악명 높았던 일본 생체실험 만행을 저지른 731부대가 주둔하던 곳이다. 그들에게 안중근은 영웅이며, 따라서 이 자리는 바로 한-중 두 민족의 운명을 바꿔놓은 전환점이었다.

[안 의사가 사용한 권총과 총탄 / 사진=바이두닷컴]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열차 플랫폼. 사잔 하단의 사각형 지점에서 삼각형 긴 꼭지점 방향으로 총탄을 발사했다. / 사진=텅쉰닷컴]

[사진 속 사람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지점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피살됐다. / 사진=연합뉴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다시 그 날 하얼빈역으로 다가가 보자. 중국인 환영인파 속으로 그를 태운 열차가 서서히 들어오고, 인파 속에서 안중근이 열차로 다가간다.
러시아 군인들의 호위 속에 열차에서 내리던 그는 안중근이 발사한 총탄에 정확히 가슴을 맞고 쓰러진다. 안 의사는 열차에서 내려 의장대를 사열하고 돌아서는 이토를 불과 5m 거리에서 저격했다. 만주대륙를 향해 불태우던 제국의 야심이 스러진 순간이다. 안중근은 러시아말로 '코리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를 세 차례 외치고 체포된다.
"일본을 위해 쏘았다"
이후 안 의사는 다롄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재판에서도 '나는 지금 전쟁 중이다. 전범으로 대우하라'는 주장을 펼쳤으며, 결국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당했다. 안 의사는 당시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사형을 당하기 전, 안 의사는 '爲日非爲韓(위일비위한)'이라는 문구를 친필로 남겼다. "(나의 의거는) 일본을 위한 것이지, 한국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바로 그 문구 앞에서 설명하고 있다. '굴뚝을 구부려 화재를 면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굴뚝'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를 말한다.
즉, 이토 히로부미의 악행은 일본에게도 이롭지 않다는 것을 안 의사는 이미 당시 말하고 있다. 일본은 아직도 그 뜻을 모르는 것일까?

[재판에서 사형을 받은 직후 안중근 의사가 일본인 변호사 기타치로의 수첩에 남긴 친필. 이 친필의 마지막 문구가 바로 '爲日非爲韓(위일비위한)'이다. 발견된 안 의사 필적 중 가장 최후의 기록이다. / 사진=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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