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권을 위해 투쟁한 일본인.jpg
5범
2014.02.12가입
내가 무적권 분명희 경고해놔따
조회 5,686
추천 23
2014.05.02 (금) 12:10
수정 0
수정일 2014.05.02 (금) 12:13
▲ 후세 다츠지 변호사
후세 다츠지는 1880년 일본 미야기현[宮城縣] 동부 이시노마키[石卷]에서 태어나 1902년 메이지[明治]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법률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다츠지 변호사는 일제의 침략을 받던 약자 조선인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는데요. 그는 1911년, 조선의 의병운동을 다룬 논문<조선독립운동에 대하여 경의를 표함>을 발표하고, 경찰의 조사를 받지만 위축되기는커녕, 조선인 독립운동가 변호와 조선인의 인권보호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다츠지 변호사는 1919년, 2.8독립선언과 조선 전역의 3.1운동을 보면서 큰 감명을 받습니다. 당시 일제 본토에서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조선인 유학생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당해 내란음모죄 혐의가 씌워졌는데요. 하지만 후세 다츠지는 조선인 유학생의 변론에 나서면서 "자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게 무슨 내란음모죄냐?”는 반박 변론으로 이들의 중형 선고를 막아냈습니다.
그는 이어 1923년, 관동대지진과 조선인학살이 일어나자, 일제 계엄군과 일제 경찰의 묵인을 비판하며, 일제 공안당국에 요주의 인물로 지목당합니다. 하지만 다츠지 변호사는 이듬해는 일왕 궁성에 폭탄을 던졌던 김지섭 의사를 변호하는 등 조선인 변호에 더욱 힘쓰죠. 다츠지 변호사는 김지섭 의사에 대해 “조선 민중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 사람”이며 “폭탄이 불발했으니 불능범이라 무죄”라고 항변했으나 재판부는 무기징역을 선고합니다. 그러나 김지섭 의사는 끝내 1928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됩니다.
▲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1926년에는 일왕가 암살을 기획한 혐의로 체포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변론을 맡았는데요. 가네코 후미코 역시 일본인임에도 조선의 독립에 동의하며 독립운동가 박열과 인연을 맺고 옥중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다츠지의 변호에도 박열과 가네코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가네코는 옥사하고, 박열은 광복 후 납북당한 후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습니다.
후세 다츠지는 조선인을 위한 일에도 앞장섰는데요. 일제가 동양척식회사를 세워 토지 조사를 명분으로 농민 등의 토지를 강탈하자, 전남 나주지역 농민을 위해 510만 평 토지반환소송을 제기하는 등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행위의 불법성을 폭로했으며, 천민차별철폐를 위한 형평 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재일조선인을 위한 변호에 앞장섰습니다.
이러한 후세 다츠지 변호사를 일제가 좋아할리 없었겠죠. 일제는 1932년 대대적인 공산당 탄압에 나서는데요. 다츠지는 이 사건의 변호를 맡으며 일제의 부당한 권력 남용을 강력히 비판하다가 법정모독을 이유로 징계를 받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게 됩니다. 일제는 이듬해 다츠지에게 신문지법 위반으로 금고 3개월 형을 선고하고, 1939년에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했습니다.
후세 다츠지는 일제가 패망한 이듬해(1946년) 변호사 자격을 회복하고, 해방된 조선을 위한 《조선건국 헌법초안》을 저술하고, 사회 정의를 위한 사회운동을 하다 1953년 9월 13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우리 민족을 도운 그의 공적을 기려 2004년 일본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든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는 양심의 소리다."
-후세 다츠지-
캬 감동 ㅜ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