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그녀들의 마음은 ? - 1부
감동넘치는 로맨스 명작
그녀들의 마음은? - 1부
20XX년, 어느새 쌀쌀해지기 시작한 초겨울. 나는 마침내 지긋지긋한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했다.
내게 있어서 전역이란, 남들처럼 당연히 고대해왔던 것이기는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전역을 한다는 것은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남들은 군대에 가면 집의 소중함을 깨닫고 온다지만, 나에게 '집'이라는 공간은 여전히 조금은 거북하고 꺼려지는 장소였다.
그렇다한들 아무리 그래도 민간인으로서의 해방감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나는 기쁨 반 부담 반의 복잡한 혼재를 느꼈다. 힘든 군생활을 함께 보낸 동기들과 전역 기념 아침술을 한잔 걸치고는 일단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집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오빠!"
내가 그래도 이 집에서 맘 편히 소통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고 한다면, 초인종 소리를 듣자마자 이렇게 버선발로 뛰쳐나와주는 동생 한 명 뿐이다. 원래는 한 명이 더 있었지만, 그 소중했던 사람은 이제 죽고 없었다.
"자고 있었어?"
"응.. 헤헤, 오늘 오빠 마중 나갈라 그랬는데... 늦잠 잤어. 히히, 미안해, 오빠."
"괜찮아."
"모자에 작대기가 없고 이상한 모양이 있네?"
"개구리라는 거야. 전역한 사람들한테 붙여주는거."
"그렇구나..."
"아버지랑 어머닌?"
"출근하셨지. 난 수능 치고나서 학교 안 가니까.... 오빠 밥 먹었어? 내가 맛있는거 해줄까?"
"칼질도 못하면서 무슨 맛있는걸 해. 잠이나 계속 자."
"우쒸.... 연습 많이 했단 말이야."
샐쭉하여 입이 툭 튀어나온 혜진이를 달래서 다시 눕혀놓은 후, 나는 꽤 오랜만에 보는 집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둘러보았다. 이곳은 옛 기억이 많이 남아있는 소중한 장소였다. 엄마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고, 심지어 누나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을 것이다. 이젠 어느덧 옛날 일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애초에 제대를 하고나서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었다. 가뜩이나 머물기 싫은 집에 계속 있으면서 거리감 느껴지는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신세를 계속 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 길로 곧장 기숙사 입사를 알아보았다. 원래 군휴학을 하기 전에도 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학교를 다녔었다.
문제는 성적순으로 사생을 받아주는 기숙사의 원칙상, 여태껏 학교를 쉬었던 내가 입사를 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물론 군대에 가기 전까지 받아놓은 학점은 꽤 우수한 편이었지만 2년이 지난 지금도 그게 여전히 먹힐 지는 미지수였다.
또한 방학 기간 중에 기숙사에 머물 수 있는지도 궁금했다. 집에 머무는 기간은 짧으면 짧을 수록 좋았다. 나는 예전에 친하게 알고 지냈던 사감을 떠올리며 한 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는 바로 다닐 셈이냐?"
제대 후 첫 대면한 아버지와의 대화는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수고했다느니 고생 많았다느니 하는 인사치레는 오히려 새어머니 쪽에서 더 많이 들었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어느새 이런 식으로 딱딱한 내용 밖에 주고 받을 수 없게 되어버린 듯 했다.
"네. 집에서 빈둥거리기도 싫고...."
"그래. 잘 생각했구나."
"그래서 지금 기숙사 입사를 알아보고 있어요. 가능하다면 방학 중에 바로 들어가려구요."
아버지와 안방에 나란히 앉아 잠자코 얘기를 듣던 새어머니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승태야. 꼭 기숙사에 들어가야겠니? 집하고 거리도 가까운데... 그리고 들어간다고 해도 그렇게 급하게 갈 건 없잖니? 당분간 집에서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보는게 낫지 않을까?"
조곤조곤하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는 희미한 어릴 적 기억 속의 엄마를 그대로 빼다 박은 듯 연상케 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팠다.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말을 하려고 애썼다.
"아니에요.. 학기 중에 들어가려면 저는 성적 자격 때문에 더 곤란할 수도 있어요. 일찍 들어가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집에서 통학하기보다는 학교에서 지내면서 공부에 집중하고 싶거든요. 아버지도 이해하시죠?"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야 굳이 말릴 마음 없다. 학비는 지원해줄테니 예전처럼 열심히 해보거라. 장학금도 다시 받아보고."
"예, 고마워요, 아버지."
"그래도 가끔은 집에 들르고."
"그럴 게요."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딱히 미워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지금에 와서는 그렇다. 아버지의 재혼에 대한 서운함도, 낯선 새어머니에 대한 거부감도 이제는 거의 희석되고 없었다. 어렸을 적엔 평생 아버지를 미워하며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가 그런 다짐을 했었던가조차도 희미해져 버렸다.
다만 나는 이 집에 머무는 것이 싫었다. 집에 있다보면 싫어도 묻어놓은 옛 기억들이 자꾸만 떠오를 것만 같았다. 돌아가신 엄마, 그리고 죽은 누나.... 내가 대학가는 모습을 그렇게나 보고 싶어 했던 정아 누나.
"오빠아.... 그냥 계속 나랑 집에 있으면 안 돼? 응? 응?"
혜진이는 끈덕지게 졸라댔다. 내가 집을 떠나는 것을 극구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애 한 명 뿐이다.
"집에 자주 올게."
"피... 거짓말. 예전에도 그래놓고 학기 끝날 때까지 한번인가 두번인가밖에 안 왔으면서."
"진짜로."
"제대하고나면 집에 오래 있을 거라고 그랬잖아. 오빤 거짓말쟁이야."
"네가 학교 자주 놀러오면 되지."
"몰라! 나도 바빠."
아무래도 단단히 토라진 듯 했다. 나는 혜진이의 양 볼때기를 마치 반죽 주무르듯이 문질러주었다. 예전에 종종 화를 낼 때마다 써먹곤 했던 방법을 재탕하는 것이다. 조금은 옛 추억마저 느끼면서.
"나도 너 많이 보고 싶을 거야. 그러니까 자주 올게. 자, 여기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마지못해 입을 삐죽거리며 손가락을 마주 걸어온다. 매달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면회를 올 때마다 제대하면 집에 오래 있겠다고 약속을 했었는데, 그걸 깨뜨려놓고 또다시 안 지킬 약속을 한다는 것이 조금 미안했다.
새엄마가 데려온 아이. 그리 미운 아이는 아니었지만 어렸을 적엔 그저 그 사실이 막연하게 싫었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 이제는 정말로 친동생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시간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 믿기진 않지만 몇 일만 더 지나면 혜진이도 스무살이 된다고 하니 아이라고 부르기엔 어느덧 너무 많이 커버린게 아닐까.
"수능은 잘 봤어?"
"으음.. 모르겠어.. 헤헤. 사실 대학엔 별 관심 없어."
"그래도 대학은 가는게 좋아."
"그럼 오빠랑 같은 학교 가고 싶어."
"그러려면 열심히 해야지."
"으음.... 재수할까?"
"재수하면 공부 열심히 할거야?"
"글쎄... 히히. 오빠가 열심히 하게 도와주면 되지."
하긴 열살이든 스무살이든 혜진이는 언제나 착하고 좋은 동생이었다.
아버지의 재혼 이후로 그 당시 나는 내가 비극의 주인공쯤이라도 되는 것 마냥 착각했었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 낯선 새엄마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걸까? 하기사 사실 새엄마에 대한 거부감이라기보다는, 아버지가 죽은 엄마를 버렸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어긋난 방황이었던 듯 싶다.
주먹질이라면 항상 자신이 있었다. 곧잘했던 공부는 뒷전이 되었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면서 허구헌날 싸움질하며 패고 터지고의 반복... 그러다 깽값 물어주고 아버지에게 한 소리 듣고. 그 아버지 속을 썩이는 것에 단단히 재미가 들어서 무슨 보복이라도 한다는 식으로 여겼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을까?
그러다 정아 누나가 죽었다. 엄마를 닮아서 몸이 약해도 너무 약했던 누나는 스무살이 되기도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기묘한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던 내게, 누나는 세상에 남은 유일한 피붙이처럼 여겨지던 사람이었다. 집에 정나미가 떨어진 것은 아마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딱히 미운 사람도 없는데 괜히 집을 훌쩍 나와버리고 싶었으니.
그리 오래 살지 못한다는 사실은 누나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 짧은 인생에서 누나가 바랐던 한 가지 소원은 내가 마음 잡고 공부해서 평범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고 했다. 정말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렇게 말했다. 참 웃기는 소원이 아닐 수 없었다. 자기도 그렇게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텐데.
한으로 남은게 있다면 마지막 눈 감는 순간에 누나 옆에 못 있어줬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마 누나의 한은 내가 대학 가는 모습을 살아서 직접 보지 못했다는 것.... 틀림없이 그거였을 것이다. 전해들은 말이지만 실제로 죽기 직전에도 누나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대학 들어가는 모습을 볼 때까지 살 수 없는게 아쉽다고.
늦은 감이 있는 애매한 출발. 하지만 그만큼 미친 듯이 공부했다. 나름대로 이름 있고 알아주는 대학에 합격하고나서 나는 바로 기숙사행을 택했다. 물론 혜진이의 격한 반대와 새어머니의 아쉬운 설득이 다소 있기는 했지만 아버지가 크게 반대하지 않아서 일 년 내내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리고 일학년을 마친 후 곧바로 군 입대... 2년 간의 복무를 마치고 마침내 이렇게 다시 기숙사로 돌아왔다.
"원래 방학 기간 내 입사는 신청기간이 몇 일 전에 마감이었는데... 특별히 받아주는거야. 아직 행정처리가 안 됐으니까."
예전에 기숙사 생활을 할 사감과 안면을 잘 터놓은 것이 다행이었다.
"고맙습니다."
"2년만이라 적응 잘 안되겠지만 기숙사에 남으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할 거다. 무슨 말인지 알지?"
"그럼요."
"제대 축하한다. 가 봐."
사감실을 나와서 나는 내가 배정 받은 방을 둘러보았다. 예전에 일년 동안 살았던 그 방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구조에 똑같은 인테리어였다. 하긴 기숙사 방이 똑같지 뭐... 그래도 2년동안 정말 아무런 발전도 없었구나.
기숙사의 시설은 맛대가리가 없는 식사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 학교의 기숙사가 자랑하는 최대의 장점은 바로 1인실 구조라는 점이었다. 국내를 모두 돌아봐도 1인 기숙사 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교내 기숙사는 그리 많지 않다.
덕분에 대부분의 타학교 기숙사생들이 고민하는 룸메이트니 뭐니 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나름대로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반작용인지는 몰라도, 기숙사의 방을 볼 때마다 참으로 좁아터진 곳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학생들을 많이 수용해야 하는 학교 기숙사의 입장에서, 방이 1인실이라는 것은 그만큼 개별적인 방의 넓이를 줄여야 한다는 말과도 같은 뜻일 테니....
"뭐... 살다보면 금방 적응이 되겠지. 예전에도 그랬으니...."
어찌됐든 2년만에 돌아온 기숙사였다. 감회는 꽤나 새로웠다.
컴퓨터와 옷가지, 이불 등 몇 종류 안 되는 이삿짐을 나르고 정리에 열중하고 있는데 말년 정기휴가때 구입했던 새 휴대폰이 갑자기 울리며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야, 서승태. 전역했다면서 어떻게 전화 한 번이 없니?]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서현이의 목소리였다. 그것도 단단히 뿔이 난 것 같다.
"천천히 연락하려고 했지. 곧 전화하려고 했었어,"
[휴가 때도 바쁘다고 안 봐놓구서는. 내년에 연락하려고 그랬어?]
"미안."
[지금 뭐해?]
"기숙사 방 받고 짐 옮기고 있어."
[그래? 결국 기숙사 또 들어가기로 한 거야?]
"응. 자취는 영 안 내켜."
[뭐..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세나랑 제광이도 올 거니까 넷이서 오랜만에 보고 얘기도 하고. 괜찮지?]
"그러지 뭐. 언제?"
[다음 주 쯤 볼까? 너도 시간 되지?]
"알았어. 그러자."
[세나가 너 많이 보고 싶대.]
"그래...?"
주서현. 민세나. 이제광. 2년 전 우리가 1학년 새내기였을 때만 해도 넷이서 마치 한 몸처럼 붙어다녔던 같은 학과의 동기들이다. 함께 어울려다니며 대학 생활을 맘껏 즐겼던 시간이 어느덧 까마득한 옛날 일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조금은 서글프기도 하다.
제광이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입대를 해서 마찬가지로 얼마 전에 전역을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세나와 서현이는 아무래도 지금쯤 고학년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서현이는 이제 4학년 졸업반이 된다고 했다. 세나는 1년이나 휴학을 했다고 들었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만나면 물어볼까?
[그럼 담주에 봐.]
"그래."
상병 정기휴가 이후로 세나와 서현이를 보지 못했었고, 특히 제광이는 비슷하게 입대를 했으니 거의 2년만에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대학 친구들의 모습은 어색함과 반가움을 넘어서 그 예전 새내기 시절의 즐거웠던 추억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푸핫! 머리 짧은 것 좀 봐. 아직 군인아저씨 티 많이 난다야. 그치, 세나야?"
"그러게. 머리도 머리지만 얼굴 탄 것 때문에 더 그래. 겨울인데도 어쩜 저렇게 탔대?"
서현이와 세나는 참 여자애들 아니랄까봐 따끈따끈한 예비역 두 명을 앉혀놓고는 목청껏 재잘재잘 떠들며 우리를 까대기 바빴다. 학교 근처 고깃집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벌써 세번째 불판으로 껍데기를 구웠다.
"야, 야. 그래도 나는 원판이 되다보니까 머리 짧아도 좀 그림이 되지 않냐? 약간 원빈 '아저씨' 삘 나지?"
"어어... 그래. '원빈'은 빼고 그냥 아저씨 삘이 난다 그래... 쉰소리 말고 고기나 처먹어."
넉살 좋은 제광이의 자뻑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었고, 그걸 받아치는 서현이의 대꾸 역시 예전 그대로였다. 전혀 달라지지 않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다가, 문득 세나에게 시선이 갔다.
세나는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오랜만에 모인 우리 네 사람 중에 가장 많이 달라진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녀였다. 예전에는 저렇게 꾸미고 다니지 않았던 것 같은데....
"민세나 좀 많이 바뀐 것 같다?"
"어어? 나?"
내 갑작스런 멘트에 세나는 살짝 놀란 듯한 눈치였다. 내 기억 속의 세나는 얌전하고 조용조용한 순둥이 같은 성격에다, 꾸미기보다는 책을 보는 일에 시간을 더 많이 쏟는 전형적인 모범생 같은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의 세나를 겉모습만으로 따지자면 그다지 모범생 같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긴 겉모습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긴 하지만....
"내가 뭐가 바뀐 것 같은데?"
"어.. 음.. 그냥 좀 예뻐진 것 같길래."
친구 사이에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말처럼 아무렇지 않게 툭 던져보려고 했으나 의도와는 달리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상당히 어색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서현이가 눈을 반짝 빛내며 끼어들었다.
"뭐야?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민세나의 매력을 이제야 발견한건가? 역시 남자들은 군대 갔다오면 여자가 궁해지나봐?"
"야.. 그냥 예뻐졌다고만 했지 내가 무슨..."
"그럼 아까부터 세나 다리만 계속 흘낏흘낏 보는 이유가 뭐야?"
"안 봤어!"
귀신같은 계집애 같으니... 그걸 어떻게 알았담?
서현이는 당황한 내 모습에 깔깔거리며 웃었고 세나는 그만 놀리라는 뜻에서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하지만 표정을 보니 세나는 나의 칭찬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기색이었다.
이렇게 서현이와 세나를 맞은 편에 나란히 놓고 보니 예전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이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입학했을 때부터 오밀조밀하고 깜찍한 이목구비와 늘씬한 몸매로 뭇 남학생들의 시선을 한몸에 독차지했던 서현이와는 달리 예전의 민세나는 외모로 그다지 주목받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는 외모로 서현이와 세나를 비교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처럼 이질감 같은 것을 느낄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감각은 무언가를 비교하고 싶을 때에만 나타나는 법이니까.
하지만 지금 이렇게 단아하게 화장을 하고 달라진 모습의 세나를 보니 학과 퀸카로 손꼽혔던 화려한 미모의 주서현과 견줄 수 있을 만큼은 물론이고 그다지 밀릴게 없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물론 이걸 그렇게까지 상세하게 내 입으로 표현할 만큼 바보는 아니다.
"야야. 꿈 깨. 세나 요즘 완전 잘 나가. 남자들이 줄 선다니까? 남친도 있는거 알지?"
"어이구, 됐네. 관심도 없어."
대수롭지 않은 척 불판 위에 껍데기를 올리는 나였지만 속은 적잖이 착잡했다.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은 군대에서 이미 전해들은 적이 있다. 세나는 서현이의 옆구리를 쿡 찔렀고 서현이는 그저 짖게 웃기만 했다. 친한 친구끼리 새삼 그런 말을 주고 받는다는 것도 우스운 얘기였다. 물론 서현이도 농담이었겠지만...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에 공부를 잘하는 친구. 예전의 세나는 딱 그런 친구였고, 내게 있어 그저 좋은 친구였다. 친구를 얼굴 보고 사귀는 것은 아니니까.
글쎄.... 그래서였을까? 그 때 그녀의 마음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는....
"야야, 이제 2차 가자!"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옛날 생각을 끄집어내려는 찰나 서현이가 테이블을 탕탕 두드리며 일어섰다.
"그거 좋지! 배도 채웠으니 이제 술 먹자."
"어휴, 머릿 속에 술 생각 뿐이지."
"왜 이래? 그럼 밥 한끼 더 먹으러 2차 가냐?"
변함없이 투닥거리는 제광이와 서현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문득 궁금했다. 저 둘은 과연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일학년 때부터 늘상 다투어온 두 사람이지만 서로에게 호감이 있음은 나도 알고 세나도 알고 자기들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학과 내의 사람들은 우리 학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선남선녀가 같이 어울려 다닐 때부터 두 사람이 사귈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은 친구 사이에서 더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서현이가 우리 학번의 퀸카였다면 제광이는 킹카였다. 호리호리하고 큰 키에 잘 생긴 얼굴의 제광이는 얼굴값 한다는 말처럼 이 여자 저 여자를 다 만나고 다녔다. 뭐 그거야 여러 남자들 갈아치웠던 서현이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제 군대도 다녀왔으니 두 사람이 연인으로 발전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스스로에게 문득 놀라고 말았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친구 사이는 연인이 될 수 없다고까지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썩 현실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을 남녀로서 비교하고 있었다.
"승태야, 안 가?"
"어어? 으응. 간다."
세나의 목소리가 날 깨웠다. 나도 모르게 가게를 나서는 세나의 뒷모습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결코 입지 않았던 맵시 있는 미니스커트에 고혹적인 검정 스타킹.... 그리고 곧게 쭉 뻗은 두 다리. 아까부터 계속 눈이 갔다. 서현이의 말은 하나도 틀린 구석이 없었다.
"얌마, 뭐해!"
"알았어. 갈게."
친구 상대로 별 생각을 다 하는 내 모습이 새삼 웃겼다. 서현이 말대로 내가 진짜 여자가 궁하긴 궁한가보다. 이거 외로워서 그런가?
2차로 맥주, 3차로 막걸리를 푸짐하게 걸치고 나니 다들 말은 안했지만 점점 꽐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기분이 좋은지 다들 그렇게 꺼리면서 마시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곱상하게 생겨먹은 얼굴만큼이나 주량도 탁월한 제광이가 비교적 제일 멀쩡했고, 그 다음으로 서현이, 세나, 나의 순서로 상태가 멀쩡했다. 바꿔말하면 내가 제일 빨리 취했다.
"이거.. 군대가서 완전 약골 다 됐네. 뭘 얼마나 마셨다고 이래?"
서현이와 제광이는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지만 세나는 다소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내 주량이 약한 것이 절대 아니다. 얘네들의 주량이 상대적으로 무식하게 센 것 뿐이었다.
"우리 너무 달렸는데 잠시 쉬자. 술집 말고 카페 같은데서 얘기나 할까?"
"얘기야 뭐 지금까지 실컷 했는데."
"그냥 들어가서 뭐 딴거 좀 마시자. 술 말고,"
"에잉. 알았어. 그러자."
사실 지네들도 속으로는 지금 힘든 상태일텐데 나한테 선심 쓰듯이 그러는 것이 적잖이 억울했다.
"그럼 저기 갈까?"
나는 때마침 근처에 보이는 한 커피숍을 발견하고는 아무 생각없이 간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간판에는 앙증맞은 귀여운 글씨체로 [AMANTE] 라는 여섯자의 알파벳이 빛나고 있었다. 대학로 근처다 보니 커피숍이야 당장 주위를 슥 둘러봐도 대여섯 군데는 보일 만큼 즐비해 있었고, 나는 그 중의 하나를 집었을 뿐이었다.
"뭐야? 속 보이긴. 너도 소문 들었구나?"
그런데 그런 나의 선택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니꼽게 보는 두 여자의 시선이 굉장히 거슬렸다.
"무슨 소리야?"
"너 저기 알바생 소문 듣고 가려는거 아니야, 지금?"
"뭐? 난 그런거 몰라."
"근데 왜 많고 많은 카페 중에 하필 저기를 가?"
"야, 그냥 눈에 보이니까 그런 거지."
제광이가 호기심으로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바람둥이 특유의 기질로 또 뭔가 건수를 감지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왜? 저기가 뭔데? 알바생이 뭐 어쨌는데?"
두 여자는 한심하다는 듯이 제광이를 째려보았다. 특히 서현이의 눈빛이 아주 가관이었다.
"그럼 그냥 저기로 갈까?"
세나의 제안에 서현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AMANTE] 라는 간판을 먼 발치에서 지그시 바라보았다.
"상관은 없는데.... 얘네들 헤벌레 하는 표정 볼 생각하니 짜증나네."
"난 안 그래."
"나도."
난 다소 진심을 담아서 항변한 것이었는데 뻔뻔스럽게 제광이가 끼어들자 조금 짜증났다. 하지만 정말로 억울하게도 우리를 보는 두 여자의 눈빛은 거기서 거기라고 말하는 듯 하여 적잖이 씁쓸했다.
마땅히 쉴 데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결국 내가 가리킨 그 커피숍에 들어가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세나와 서현이가 말했던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내용인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가게에서 생각지도 못한 나의 운명과 첫 만남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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