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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그녀들의 마음은 ? - 17부

일병 사다리도박사

1범

2014.06.23가입

조회 2,363

추천 4

2014.10.24 (금) 15:23

                           

감동넘치는 로맨스 명작
그녀들의 마음은 ? - 17부


그날 저녁 바로 새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단은 내가 혜진이를 데리고 있는 상황이니 우선은 새엄마를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고, 또 그와 동시에 새엄마를 설득할 필요도 있었다. 그렇다고해서 곧이 곧대로 기숙사 방 안에 몰래 숨겨놓고 같이 지낼 거라고는 털어놓을 수 없었고, 한 며칠 동안만 학교 근처 아는 친구의 자취방에서 지내게 할 생각이라고 둘러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그 있지도 않은 '아는 친구'가 여학생이며, 개인적으로 아주 친한 사이이기 때문에 그런 부탁을 하기에 전혀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을 정도라는 거짓 사실을 새엄마에게 누누이 강조했야만 했다.



"예, 그럼요. 금방 들어갈 거에요. 제가 잘 돌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새엄마를 설득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곤란하고 난감한 과정을 거쳐야 했었지만, 어쨌든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이런 허술한 거짓말이 먹혀들 수 있었던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첫째는 새엄마로서도 혜진이가 설마 내 방구석에 찰싹 달라붙어서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릴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혜진이에게 며칠간 대학 캠퍼스를 접하게 함으로써 재수 공부의 의욕을 심어줄 수 있을거라는 내 계획 된 변명 덕분이었다. 



솔직히 내가 말해놓고도 내 입장에서 봤을 땐 정말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캠퍼스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고 해서 열심히 공부할 것 같으면 고등학교 애들이 죄다 수학여행을 캠퍼스로 오겠지.... 하지만 철부지 딸래미의 재수 고민으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새엄마에게는 내 그런 엉성한 구실조차도 그럴싸하게 들렸는지 고민고민 끝에 수긍을 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혜진이가 그대로 집에 들어가서 계속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게 놔둘 바에야, 잠깐이나마 내가 데리고 있으면서 마음을 다잡게끔 도와주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새엄마도 그렇게 생각하신 듯 했다. 



"엄마한테 전화하지 말라니깐...."



간신히 새엄마와의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내려놓자, 옆에 있던 혜진이가 툴툴거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나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내 방 침대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은 여동생을 보며, 족히 오늘 50번째는 될 것 같은 한숨을 쉬었다.



"엄마가 아빠한테 말하면 나 집에 끌려갈 수도 있단 말야."



"그러면 계속 엄마가 걱정하시게 놔둘 거야? 엄마 성격에 너 며칠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집에 안 들어가면 실종신고라도 하실 거야." 



"칫...."



사실 생각해보면 내가 구태여 이렇게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러고 있는건 그래도 역시 내가 혜진이의 기분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일 터였다. 동생의 말마따나 이 애가 나한테 이렇게 화를 낸 적도, 부탁을 한 적도, 집착을 한 적도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잘은 몰라도 이 상태의 혜진이를 완전히 뿌리쳤다가는 왠지 평생을 두고두고 시달릴 것 같다는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 위이이잉....



막 새엄마와의 통화가 끝난 휴대폰을 테이블에 내려놓기도 전에, 새로운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로 벌써 일곱 번째 걸려온 단비 누나로부터의 전화였다. 더이상 누나의 연락을 씹었다간 이제 이쪽에서 큰일이 터질 것 같아서 나는 바깥에 나가 전화를 받으려 했다. 하지만 혜진이는 밖으로 나가려는 날 끝끝내 붙잡고 나섰다.



"왜?"



"여기서 받으면 되잖아."



"좀 불편하잖아."



"동생 앞인데 뭐가 불편해? 그냥 여기 있어."



"에이... 왜 그래. 빨리 갔다올게."



"오빠 나가면 나도 따라 나갈거야."



"......"



이쯤되니 이건 정말 너무하다 싶었다. 거의 무슨 스토커 수준이니.... 심히 어이없고 비상식적인 고집을 계속 부려대는 동생에게 뭔가 한마디 해야 하나 하는 기분도 들었지만 어쨌든 지금은 전화가 끊어질까 마음이 몹시 초조했다. 이번에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간 단비 누나의 기분이 어느 정도로 상할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여, 여보세요?"



이번에도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내가 입을 열자 상대방으로서도 의외였던 모양이다. 잠시간의 정적 이후 핸드폰의 액정을 갈라버릴 듯한 앙칼진 목소리가 귓가에 터져나왔다.



[야! 서승태! 너 죽을래?]



"누, 누나...."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버리는 하이톤의 목소리 때문에, 나는 다급히 엄지손가락으로 음량 조절 버튼을 눌러 통화음을 서너칸 정도 줄여버렸다. 순식간에 음량이 훅 줄어들었지만 누나의 목소리 자체가 워낙 높고 뾰족해서 알아듣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되는 것도 모자라서 내 전화랑 문자를 다 씹어?]



"미안해요 누나... 그게..."



[너 지금 어디서 뭐하는 거야?]



"......" 



양쪽에서 시달리는 듯한 기분이 들자 나는 그만 서글퍼졌다. 사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게.... 일단 만나서 얘기해요 누나. 1층 로비로 내려갈게요."



어쨌든 혜진이 앞에서 복잡한 얘기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든 장소를 옮겨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물론 누나가 순순히 진정될 리는 없었기 때문에 설득이 상당히 힘들었지만, 결국 누나도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각오하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문을 나서기 전에 흘끗 돌아보니 혜진이는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내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었다.



"얌전히 있어. 금방 올게."



"나도 따라가면 안 돼?"



말도 안 되는 질문이었다. 단비 누나와 무슨 곤란한 일이 일어날 지는 둘째친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닌 만큼 혜진이를 데려나갔다간 주위의 눈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집에 머물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혜진이로서는, 안전한 기숙사 생활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내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터였다. 설마 혜진이가 여기까지 터치하리라곤 생각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래도 이 사실만큼은 못 박아두기로 했다.



"네가 꼭 생각해줘야 하는게 있어.... 오빠가 네 부탁에 못 이겨서 이렇게 하고는 있지만, 알다시피 난 기숙사에서 쫓겨나선 안 되는 입장이란거 알잖아. 퇴사당하면 난 집으로 돌아가야 해."



"......"



그 순간 고개 숙인 동생의 얼굴에서 아주 미묘한 표정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들었을 때 보니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 뿐이었다. 입이 삐죽 튀어나온 혜진이가 다시 눈에 쌍심지를 켜고 으름장을 놓자, 아주 잠깐 동안 스쳐지나간 그 미안해하는 듯한 얼굴은 금새 머릿 속에서 지워져버렸다. 



"좋아. 대신 오빠도 꼭 생각해줘야 하는게 있어."



"뭔데?"



"이번에도 밤새도록 소식 없다가 아침에나 슬쩍 기어들어오면 정말 없애버릴 거야."



"......"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저 힘 없이 슬리퍼를 신으며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금방 올게. 진짜로."





















충분히 예상은 했었다지만 단비 누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이 화가 났었던 것 같았다. 비록 혜진이의 눈에서는 잠시 벗어났다고 해도, 상황은 여전히 위험한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단비 누나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잰걸음으로 달려와서 정강이부터 한 방 냅다 까버렸다.



"으악!"



나는 일부러 일류 선수마냥 몸을 던져가며 헐리우드 액션을 보였지만 단비 누나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앙증맞은 두 주먹을 움켜쥐고 내 옆구리, 갈비뼈, 등짝을 자유자재로 가격해왔다. 보는 입장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사실 건강미로 단련된 누나의 주먹은 그리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위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진심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누. 누나. 진정해 봐요."



"뭐? 진정? 너 지금 진정이라고 그랬어?"



로비 한가운데에서 웬 예쁘게 생긴 여자가 무자비하게 남자를 쥐어패고 있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나이 가오가 있지, 맞아도 여기서 맞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거의 애걸복걸하다시피 해서 누나를 휴게실로 데려가는 그 과정 또한 결코 그리 폼난다고는 할 수 없었다. 



"누, 누나 많이 화났나봐요."



"말이라고 하는건 아니지?"



휴게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누나의 두 눈에서는 그야말로 오색 광선이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혜진이의 눈이 쌍도끼였다면, 지금 누나의 눈은 거의 레이저빔이었다. 혹시라도 누나가 당장 테이블을 엎을까 무서워 나는 무슨 변명이라도 늘어놓으려 했지만, 단비 누나의 입은 쉴 틈이 없었다.



"한 침대에서 같이 잤던 남자가 아침에 말도 없이 가버렸어. 게다가 하루 종일 먼저 전화를 하기는커녕 여자가 여섯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데 다 씹었고, 문자는 얼마나 보냈는지 기억도 안 나. 세상 어느 여자가 화가 안 날 것 같애?"



누나의 말은 백번 옳았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나는 그저 고개를 푹 숙였고 단비 누나는 한껏 으르렁거리며 내 변명을 재촉했다. 휴게실이 한산했던 탓에 주위에 듣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너는 내 자존심을 뭉개놓는 아주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 같더라."



"미, 미안해요."



"사과는 됐고 이제 말해 봐. 내가 납득 못 할 이유라면 널 여기 묻어버릴 테니까."



백설미의 폭력성을 설마 단비 누나에게서 찾게 될 줄이야.... 상황이 상황만 아니었다면 매우 획기적인 발견이었을 터였다. 뭘 말해보라는건지 누나가 콕 찝어서 얘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내가 뭘 설명해야할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과연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게 갑자기...."



나는 지금 나와 혜진이의 상황을 도저히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사실대로 말할까 하는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 사실이란 것이 이 상황을 어디까지 설명해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갑자기 집에서 동생이 찾아와서.... 라고 해봤자, 누가 보더라도 그게 하루 종일 연락두절이 될 만한 이유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친구한테 사고가 났었어요."



결국 내 입에서는 또 한 번의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사실대로 말한다 해도, 단비 누나가 또 다른 질문을 던져온다면 나는 어차피 또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 여동생이 얼굴도 모르는 단비 누나를 엄청 싫어하고 있거든요' 라고 솔직담백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럴 바엔 그냥 거짓말 한 번으로 끝내는게 낫지.'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지금 당장은 더 좋은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아침에 연락이 왔는데, 학과 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더라구요. 타지방에서 온 친구라서 부모님도 멀리 계시고, 병원 측에서 급하게 보호자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그 친구랑 마지막으로 통화한 기록이 남아있어서 저한테 연락이 온 거에요."



방금 전까지 잔뜩 불을 뿜고 있었던 단비 누나의 눈이 동그랗게 바뀌더니, 성을 내던 표정도 순식간에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 그런 일이 있었어?"



"지방에서 부모님이 올라오실 때까지 자리에 있어 줘야 했거든요. 연락이 없었던건 정말 미안해요.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너무 많았어요. 게다가 폰도 중간에 꺼졌고." 



"어떡해? 그럼 그 친구는 이제 괜찮은 거야?"



"다행히 처음부터 큰 사고는 아니었는데 뇌진탕으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던 거라서.... 선생님 말이 위험한 상황은 아니니까 입원 치료 하면서 지켜보자고 하셨어요."



분위기가 순식간에 심각해져버리자 단비 누나는 방금 전까지 화를 내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안색이 금방 바뀌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내 양심은 더더욱 찔리기만 했다. 뇌진탕은 개뿔이.... 사실대로 말하자면 단비 누나의 방에서 잘 때 나한테는 핸드폰이 있지도 않았다. 



"미안해요, 누나 생각이 안 났던건 아닌데 너무 정신이 없었다보니...."



"아냐.... 난 그런 일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사정도 모르고 너무 화낸 것 같아서 내가 미안해."



되려 단비 누나에게서 사과를 받게 되자 가뜩이나 찔렸던 마음 한 구석이 더욱 심하게 콕콕 쑤셔왔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미 쏟아진 물이요, 한 번 지어낸 거짓말은 기왕 뱉었다면 아예 완벽하게 만들어버려야 하는 법이니.



'미안해요.'



마음 속으로 나는 누나에게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이건 비록 거짓말로 지어낸 목소리가 아닌 진심에서 나온 사과였지만, 그걸 누나에게 들려줄 수는 없었다는 것이 못내 찝찝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혜진이를 빠른 시일 안에 집으로 보내버리기만 하면 모두 해결 될 일이었다. 굳이 더이상의 불씨를 키울 필요는 없었다. 누나에게 또 한 번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는게 못내 마음이 아팠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넘어갈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일 터였다. 



"많이 피곤하겠다 너."



"흠. 그, 그러게요. 좀 쉬고 나면 괜찮을 거에요."



"뭐... 그러면 오늘은 같이 못 있겠구나."



아쉬워하는 누나의 말을 들으니 오히려 내가 백배 천배는 더 아쉬웠다. 단비 누나가 나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데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라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을까?



"누나, 이리와봐요."



내가 테이블을 팔꿈치로 끌어당겨 바짝 몸을 붙이자 누나도 의아한 표정과 함께 내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누나의 입술 위로 짧게 입술을 찍었다. 기습키스라기 보단 기습뽀뽀에 가까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누나가 눈도 안 감은 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니 나는 심히 무안해졌다.



"많이 서운했죠?"



"흥."



코웃음을 친 단비 누나가 잠시 휴게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나 싶었지만 나는 곧 그게 주위에 보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는 거라는걸 깨달았다.



"사람 없네."



"그, 그러네요. 많이 늦은 시간도 아닌데.... 이상하네."



"이리 와 봐."



말은 이리 와 보라고 해놓고, 단비 누나는 자기가 의자를 끌어당겨 내 쪽으로 바짝 다가왔다. 맞은편에서 옆자리로 위치가 바뀌자마자 누나는 냅다 내 목에 팔을 둘렀다. 단비 누나의 분홍빛 입술이 메마른 입술에 와서 닿은건 그 다음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입술만 닿은게 아니라, 순식간에 혀까지 비집고 들어왔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단비 누나의 키스는 뭐랄까.... 사람을 아찔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뭔가 특별한 기교가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닌데, 그럼에도 왠지 느낌만으로 나를 몽롱하게 만들곤 했다. 조금은 낯부끄러운 타액 소리가 하얀 조명 아래의 정적에다 살며시 금을 내어놓았다. 



"흐음..."



누가 볼지도 모르는데 휴게실에서 대놓고 단비 누나와 키스를 하고 있자니 은근히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런 스릴을 자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위험은 위험 나름대로의 어떤 쾌감을 동반한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실눈을 살짝 뜨고 단비 누나의 얼굴을 보았다.



아까 전만 해도 연락이 안 될거라 생각했던 모양인지, 누나의 얼굴엔 화장기가 거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어찌나 화가 났으면 전화를 받자마자 트레이닝복에 짚업 하나만 걸치고 뛰쳐나왔을까를 생각하니 심히 안쓰러웠다. 하지만 단비 누나의 화장기 없는 그 얼굴은, 꾸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본연의 묘한 색기를 띄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욱 은근한 매력이 있었다. 그 내추럴한 매력이 순식간에 성욕에 불을 지폈다.



"뭐야? 피곤하다며?"



후드 짚업 위로 누나의 날씬한 허리를 감싸안으면서 한 손을 가슴 위에 얹자, 키스를 하다 말고 누나가 눈을 흘기며 따지고 들었다. 나는 그 뾰족한 반응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누나가 너무 예쁘다보니."



"하이고, 그 지겨운 핑계...."



"정말이에요."



"그 핑계로 할짓 못 할짓 다 했지, 아마."



"못 할짓이라뇨? 그게 뭐에요?"



"어휴, 됐어!"



누나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지만 나는 허리에 두른 팔을 되려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면서도 가슴 위에 얹은 손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은근한 유혹을 가하고 있었다. 단비 누나는 못된 손을 치우라는 듯이 내 손등을 찰싹 때렸고, 그 변함없는 모습은 예전 벤치에서 누나를 덮칠 뻔 했던 가로등 밑에서의 기억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끔 했다.



"여기서 못할 짓 하는건 싫어요?"



"밖에선 안 돼."



볼이 빨개지는걸 보니 아마 누나도 자연스레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린 것 같았다. 하기사 암만 간이 크다고 해도 늦은 밤 인적 드문 벤치에서 키스를 하는 것과, 언제 사람이 드나들지 모르는 기숙사 휴게실에서 음흉한 짓을 하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말만 그렇다 뿐이지 사실 나도 진짜로 여기서 못할 짓을 할 만큼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아쉬우면 내 방으로 오던지."



"......"



입장이 바뀌어 이젠 누나가 나를 유혹하기 시작하자 나는 되려 조금 난감해졌다. 



"지금은 좀.... 병원에서 전화가 올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면서 꼬시긴 왜 꼬신 거야? 손 치워."



토라진 단비 누나가 가슴 위에서 내 손을 쌀쌀맞게 걷어내버렸다. 가슴의 볼륨이 워낙 풍족하다보니 후드 짚업 하나를 입어도 도발적인 맵시가 살아나는 그 아찔한 몸매가 끝까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이미 단비 누나의 알몸을 본 적이 있기에 머릿 속에서 절로 그 모습이 그려져 더욱 자극이 심한 것 같았다. 저 꿀 같은 젖가슴을 눈 앞에 두고도 단념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 아쉬워서, 나도 모르게 이가 갈릴 지경이었다.



"미안해요. 대신 내일 맛있는거 사줄게요."



"흥. 이런 식으로 내 자존심 건드리는데 재미 붙이지 마."



입술을 삐죽거리는 모습을 보니 방에 두고온 혜진이가 절로 떠올랐다. 예전부터 느낀거지만 은근히 닮은 구석이 있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귀엽게 투정을 부리는 누나의 모습이 그래도 아까보다는 훨씬 화가 풀린 것 같아서 지금은 마냥 다행스러울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난 이제 누나랑 어떻게 되는 거지?'



삐친 단비 누나를 달래서 겨우 엘리베이터에 태워 보내고, 내 방으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거의 애인이나 다름이 없긴 한데, 그렇다고 서로 사귀자는 말을 꺼낸게 아니니 엄밀히 말하자면 연인사이는 아닌 셈이었다. 그렇다면 이 사이를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어쩌다보니 섹스 한 번 하게 된 사이?'



물론 단비 누나가 혹여나 이런 내 속마음을 알게 된다면 다시는 누나의 얼굴을 볼 생각을 말아야 했다. 하지만 솔직한 마음으론, 남자인 이상 누구든 단비 누나 같은 여자를 손에서 놓치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게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처럼 보였다. 좋아하는 마음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말이다.



섹스 파트너 정도로 남을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스스로 흠칫 놀라고 말았다. 단비 누나는 섹시하긴 하지만 결코 문란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중시하는 여자였다. 암만 생각해도 그런 관계를 허용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제와서 그런 식으로 이끌어 가기에는 내가 누나에게 해놓은 말들이 너무 번지르르했다. 내 마음이야 어쨌건간에 이미 누나는 거의 나를 애인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말만 그렇게 안 했어도....'



아니, 따지고보면 애초에 혜진이가 기숙사에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나는 누나와의 관계를 좀 더 속 편한 방향으로 풀어나갈 수 있었을 지도 몰랐다.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소용 없는 일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이 문제를 매듭지을 수 있는 방법은 아직 막막하기만 한 셈이었다.



사실 나는 단비 누나처럼 어디 하나 빠지는 곳 없는 여자와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것을, 마음 속으로나마 스스로 마다하고 있다는 사실에 한편으론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게 복에 겨운게 아니면 또 뭐란 말인가. 하지만 누나와 사귀는 내 모습을 상상했을 때, 항상 걸림돌처럼 마음 속에 자리 잡는 한 사람의 얼굴을 끝내 지울 수는 없었다. 



누구보다 아름답지만, 또 누구보다 쌀쌀맞은 여자. 가시를 품은 장미란 말이 딱 어울리는 그 아이에게 있어서 나는 조금의 의미라도 지니고 있는 사람인걸까? 이렇게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있으면서 내가 과연 단비 누나에게 진실된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다고해서 좋아하는 마음도 없이 계속 옆에 두고 싶어하는건.... 더욱 큰 잘못 아닌가?'



수많은 물음표들이 머릿 속을 메웠지만 나는 애써 고개를 흔들어 떨쳐버렸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나는 어느새 방문 앞에 다다라있었고, 이 문 너머에는 지금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큰 문제가 있었으니까. 어쩌다가 혜진이가 내게 있어 큰 문제가 되어야 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



혜진이는 방으로 들어서는 날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또 집요하게 잔뜩 물어보면서 날 곤란케 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뜻밖의 그 모습을 보니 오히려 궁금해질 정도였다.



"이번엔 뭐 하고 왔는지 안 물어봐?"



"모르긴 몰라도 키스 정도는 하고 왔겠지. 방에 몰래 찾아와서까지 키스하는 사인데, 설마 그 정도도 안 하고 왔겠어?"



아주 기다렸다는 듯한 쌀쌀맞은 대꾸가 냉큼 돌아왔다. 그래도 기숙사에서 당분간 지내는걸 허락하고나자 그나마 화가 좀 풀리는가 싶더니, 방금 내가 그렇게 나갔다 온 이후로 다시 날이 바짝 선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새엄마에겐 늦어도 일주일 내로 집에 돌려보내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사실 나는 내일 당장이라도 혜진이를 보낼 수 있다면 보낼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빠르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지만 더이상의 오해가 생기지 않을 것 같았다.



"혜진아, 우리 얘기 좀 해."



나는 슬리퍼를 벗고 들어오자마자 침대 위 혜진이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혜진이는 직감적으로 내가 말하기 곤란한 화제를 꺼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이쯤되니 이건 이제 피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오빠한테 왜 그렇게 화난 거야?"



"......"



기세가 한 풀 꺾여 우물거리는 모습을 보니 대답을 회피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나는 혜진이의 대답이 나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이런 대화를 거치지 않고서는 혜진이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방법이 없어보였고, 그것은 곧 달리 말해서 동생을 집에 돌려보내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어차피 이 대화를 피할 수 없다면, 그나마 지금이 괜찮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궁금해?"



"그래."



"그럼 나한테도 키스해."



".....뭐?"



그 순간 나는 이거야말로 내 귀가 잘못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생각했다. 요새 하도 놀랄 만한 말들을 많이 들어서 어지간하면 귀를 의심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면 이게 꿈이거나.



"무, 무슨 말이야 그게?"



"왜 그렇게 놀라? 우리 뽀뽀는 꽤 자주 했었지 않나?"



하지만 하나 뿐인 여동생의 표정은 굉장히 진지해보였고, 그런 한편으로는 상당히 태연해보였다. 오히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이게 정말 그렇게 황당하게 받아들일 말이 아니란 말인가, 하는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어릴 때였고...."



"오빠 나랑 처음 만났을 때 중학생이었어. 그 때도 그렇게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 않나?"



하기사 중학생이 되고 난 후에야 생긴, 조금은 어색한 사이일 수 있었던 여동생과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다. 애정표현에 스스럼이 없었던 혜진이는 심지어 지금도 가끔씩 애교로 입술을 맞추곤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생으로서의 애교였지, 이성으로서의 스킨쉽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암만 뽀뽀를 자주 했다고 한들, 이런 말을 할 수는 없는 거였다. 



"그래도 뽀뽀랑 키스는 다르잖아."



"뭐가 어떻게 다른데?"



"......"



이렇게 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키스는 혀를 쓰고, 뽀뽀는 입술을 쓴다고 해줘야 하는 건가?



"뽀뽀한다고 생각하고 그냥 하면 되잖아. 남매끼린 혀 쓰지 말란 법도 있어?"



"야, 넌 그걸 말이라고...."



"혹시 내가 마냥 동생으로만은 안 보이니까 그런 생각 하는거 아니야?"



"무, 무슨 뜻이야?"



"오빠가 날 진짜 동생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거잖아. 동생으로 안 보이니까 괜히 이상하게 생각하는거고, 그러니까 이상하게 느껴지는거 아니냐구."



이건 정말이지 억지 논리였다. 애초에 진짜 동생으로 생각한다면 키스를 할 이유 자체가 없어지는 거니까. 하지만 혜진이의 뻔뻔스러울만큼 당당한 얼굴을 보니, '내가 왜 너하고 키스를 해야해?' 라는 즉흥적인 반박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해를 풀기 위해서 시작한 대화가 왜 여동생과 키스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



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단 어이가 없어서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혜진이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내 옆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혜진이의 생각을 읽기 힘들다고 느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지금은 도무지 얘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해. 만약 오빠가 지금 나한테 키스할 수 있으면 내일 바로 집에 들어갈게."



"뭐? 그,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있지. 동생한테 애정표현 하나 못 해주는 오빠 말을 듣고 싶진 않으니까."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는걸 보니 솔직히 키스가 정말 그렇게 못할 짓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동생의 말에 놀아나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건 어쩔 수 없었지만, 이쯤되니 까짓거 정말로 뽀뽀하는 기분으로 한 번 해버리고 치우는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거기다 제 발로 집에 들어가겠다고까지 하니.... 생각해보면 그리 나쁠건 없는 것 아닌가?



"진짜 집에 들어갈 거야?"



"응. 대신 대충했다간 아예 여기서 평생 살아버릴거야. 오빠가 날 아끼는만큼 애정을 담아줘야 해."



"......"



키스에 애정을 담는 순간 이미 뽀뽀의 차원이 아니란걸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일까? 이게 지금 무슨 꼴인지 마음 속에서 혼란스런 목소리가 아우성을 쳐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내 여동생은 코 앞에서 눈을 살며시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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