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그녀들의 마음은 ? - 16부
감동넘치는 로맨스 명작
그녀들의 마음은 ? - 16부
어쩌다 잠이 들었는지 미처 알 수도 없을 만큼 아늑하고 나른한 기분으로 꿈 속에 빠졌던 것 같다. 그 안락하고 기분 좋은 꿈결에서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나는 이곳이 내가 항상 잠들던 침대 위가 아니라는걸 알았다. 어딘지 모르게 눅눅한 습기가 늘 배어있었던 내 얇은 이불 대신에, 알싸한 민트 향이 나는 보송보송한 솜이불의 감촉이 맨살에 와서 닿았다.
"으음...."
하지만 평소와 가장 크게 달랐던 점은 침대 그 자체가 아니라, 침대 위에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러고보니 잠에서 깨었을 때 나 말고 다른 누군가의 온기를 느껴본 것이.... 도대체 얼마만일까? 품 안에서 생생히 전해져오는 그 아찔한 감촉에 나는 고개는 그대로 두고 시선만 조용히 움직여 아래를 보았다.
"......"
단비 누나는 아직도 세상 모르고 아늑한 잠 속에 빠져있었다. 평소에는 그렇게나 도발적으로 보이는 섹시한 눈매가 잠들어 있을 땐 어쩜 저리 얌전해 보이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꿈결을 헤매며 어린아이처럼 새근거리는 누나의 모습을 보니 귀여워서 깨물어주고플 정도였지만, 그 순진무구한 얼굴과는 다르게 누나의 얼굴 아래 쪽은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이었다.
고작 이불 한 겹 아래로 완전한 나신이 보일 듯 말 듯 감추어져 있는 그 모습은, 어찌보면 잠든 얼굴에 어울리는 본연의 순수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몸의 굴곡이 너무나도 요염한 능선을 그리고 있다보니 보는 입장에서는 농담으로라도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몸매 한 번... 참...'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도 군침이 꿀꺽 넘어갔다. 이런 여자와 간밤에 몸을 섞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무려 다섯 번이나 끼고 박았던걸 생각하면 이제와서 새삼 알몸 하나에 이렇게 흥분할 이유가 없었거늘, 그럼에도 이불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누나의 알몸을 보니 다시 아랫도리에 힘이 불끈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역시 같은 알몸이라도 그냥 보는 것과, 이렇게 은근한 가림을 통해서 보는 것 사이에는 나름대로의 어떤 차이가 있는 듯 했다. 가림의 미학이라고 해야 할까.... 당장이라도 저 이불을 젖히고 지금이라도 한 번 더 해, 말어? 원래 아침에 하는 섹스야말로 알짜배기라고 하던데.
'아침....?'
그러고보니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 의아함이 들었다. 문득 블라인더 사이로 촘촘이 새어들어오기 시작한 햇빛에 절로 이맛살이 찡그려졌다. 아주 중요한, 보다 근본적인 무언가를 잊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혜진이!"
그 순간 나는 지금 상황도, 장소도, 기분도 모두 잊고 용수철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불에 덴 듯한 움직임에, 옆에서 곤히 자고 있었던 단비 누나도 덩달아 인기척을 느끼고는 부스스 눈을 뜨고 말았다.
"우응...."
"누, 누나. 미안해요. 나 지금 가 봐야 해요."
"어어...? 어디 가?"
누나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잘 떠지지도 않는 흐릿한 눈을 손으로 부비며 몽롱하고 느릿하게 물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나는 이미 속옷부터 시작해서 하나둘씩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누나가 베게에 얼굴을 파묻은 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순식간에 튀어나갈 준비를 끝냈다.
"미안해요. 나중에 설명해 줄게요."
"어? 잠깐만. 기다려봐!"
단비 누나가 등 뒤에서 나를 불렀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그 모습이 어젯밤 혜진이를 남겨두고 내 방에서 뛰쳐나올 때의 모습과 어찌나 다를 바가 없었는지 이 와중에 회의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런 복잡한 상황이 만들어진거람?
급한 불을 껐다고 해야 할까. 이게 불을 끈건지, 아니면 불을 오히려 더욱 크게 키워놓은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단비 누나와의 해프닝을 이런 식으로 마무리 짓고 나는 다시 내 방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젯밤 이곳을 나설 때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여기까지 돌아오는데 걸린 시간이 어림잡아도 대충 예닐곱 시간..... 그 긴 시간 동안 내 동생은 방 안에 홀로 남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게 분명했다.
'암만 섹스에 열중을 했다 쳐도.... 한심하게 그대로 잠들 줄이야.'
무책임에 대한 죄책감이 가슴 가득히 밀려들어, 나는 문 손잡이조차 차마 힘주어 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돌렸다. 내 방인데도 불구하고 소음이 날까봐 도둑놈마냥 발소리를 죽인 채 안으로 들어서는 그 과정은, 차라리 애처롭기까지 했다.
"......"
혜진이는 내 방 침대 위에 오도카니 앉은 채로, 양팔로 무릎을 감싸안고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어제 옷장 안에 숨었을 때와 별반 다른 구석이 없는 동생의 그 안쓰러운 모양새를 보는 순간 더더욱 마음이 아려왔다. 내가 없으니 문 밖으로 나갈 엄두도 못 내고, 밤새도록 저렇게 앉아서 나를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을걸 생각하니 정말 내 자신을 후려 패고 싶은 심정이었다. 혜진이 입장에서 여기는 집도 아니고 생전 처음 와보는 낯선 곳일 텐데, 동생을 그런 곳에다 밤새도록 홀로 버려두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고보니 핸드폰이....'
일단 안전한 곳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주머니를 살펴보았지만 핸드폰은 커녕 방 열쇠조차 없었다. 아마 어제 너무 급히 뛰쳐나가느라 아무 것도 못 챙기고 나간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방 문이 열려있었다는건 어제 내가 문을 열고 나간 이후로 계속 그 상태 그대로였다는 뜻인데.... 밤중에 누가 내 방문을 열어보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 했을까를 생각하니 다시 한 번 심장이 철렁이는 기분이었다.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핸드폰은 테이블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하기사 핸드폰을 가져나왔다면, 틀림없이 혜진이가 그 사이 전화를 걸었을 테지.... 아니나 다를까 액정 위에 떠 있는 동생으로부터의 부재중 전화 표시를 보니 씁쓸함에 인상이 구겨졌다. 한 통 밖에 안 떠 있는걸 보니, 한 번 걸어보고 내가 빈손으로 나갔다는걸 바로 알았으리라.
"혜진아...."
동생을 깨웠다간 무슨 욕을 들어먹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지만, 나는 용기를 내었다. 내가 머리를 살짝 쓰다듬자 잠시 몸을 뒤척거린 혜진이가 웅얼거리며 잠꼬대를 해댔다.
"으음. 오빠.... 5분만...."
"......"
"아침 먹을 때.... 안 됐.... 오빠!"
웅얼거리다말고 혜진이가 눈을 왕방울만큼 크게 뜨자 나는 덩달아 놀라서 두어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앉아 졸던 자세에서 고개만 번쩍 치켜든 혜진이가 멍하니 입을 벌린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원치 않은 정적이 손바닥만한 좁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오누이간의 이런 어색한 침묵을 세상 어딜 간들 볼 수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중죄를 저지른 것만 같은 미묘한 기분에, 나는 사과를 해야한다는 것도 잊고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떻게 된 거야."
태어날 때부터 혜진이가 내 동생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함께 살면서 동생의 이런 싸늘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나는 괜히 기가 죽어 어수룩하게 침대 위로 걸터앉았다.
"미, 미안해."
"어디 갔다 오는 거냐니까?"
"혜진아, 그게.... 오빠가 정말 미안해."
"사과는 됐고, 빨리 설명부터 해."
심지어 혜진이가 날 추궁하며 닥달까지 하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래, 단언컨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이게 그렇게까지 큰 잘못이었나.... 하는 생각도 조금쯤은 들었지만, 내가 오빠로서 무책임했던 것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을 노릇이었으니 나는 그저 벙어리마냥 고개를 수그릴 수 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뭐하다 기어들어왔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해. 지금 당장."
"......"
세상에. 혜진이가 저런 말도 쓸 줄 안다니.... 차라리 내가 지금 눈이 잘못되어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거나, 아니면 귀가 잘못되어서 말을 제대로 못 알아먹고 있다거나 하는 상황이 더 믿을만 할 것 같았다.
"오빠, 말 안 해?"
하지만 암만 봐도 헛것이나 헛소린 아닌데.... 그렇다고 내가 동생에게 뭐라고 대답해줘야 한단 말인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신나게 다섯번이나 떡치고 지쳐 잠들었다가 지금 겨우 돌아왔습니다? 씨바.... 차라리 혜진이 주먹에 하루종일 얻어맞은 편을 택하련다.
- 위이이이잉....
문득 요즘들어 신이 나를 가지고 자주 장난을 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꽤 악질적인 장난을 말이다. 어떻게 하필 이 타이밍에 전화가 올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게다가 단비 누나로부터의 전화가....
"......"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손에 가만히 쥔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니 그 꼴을 보는 동생의 눈초리가 한층 더 험악하게 번뜩였다.
"받지 마."
"으응... 그러지 뭐."
문득 드는 생각인데.... 과연 혜진이가 지금 걸려오는 이 전화의 주인이, 어젯밤 갑자기 찾아온 그 불청객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지금 이러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그냥 기분이 나쁜 걸까? 나는 곧이어 따라붙는 혜진이의 추궁을 듣고 그 답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여자 누구야?"
"그, 그 여자라니?"
"어제 들이닥친 그 여자! 그리고 지금 오빠한테 전화걸고 있는!"
과연 여자의 직감이란 실로 무시무시한 거였다. 암만 여동생이라도 역시 여자는 여자라는 걸까? 나는 슬그머니 아직도 진동이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진동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잠잠해졌다. 아마 내가 그렇게 급히 가버린 것 때문에 바로 전화를 걸어왔으리라.
하기사 지난 밤에 같이 잠자리를 가졌던 남자가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휙 사라졌으니 여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가 막히고 서운할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단비 누나한테도 결코 가볍지 않은 죄를 지은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변명거리를 고민하기에는, 우선 눈 앞의 난제가 너무나도 급했다.
"그... 그냥, 기숙사 아는 누나야."
"하, 그냥 기숙사 아는 누나?"
코웃음과 함께 내 말을 한껏 비꼬며 따라하는 혜진이의 모습은 내겐 그야말로 컬쳐쇼크였다. 살다살다 내가 이런 꼴도 보게 될 줄 어디 짐작이나 했겠는가.
"대학생들은 '그냥 기숙사 아는 누나'랑 그렇게 키스도 맘대로 하고 그러나보지?"
"......"
옷장 안에서 설마 그것까지 들었을 줄이야.... 키스 소리가 그렇게 컸나?
"그냥 아는 누나라는 여자가, 갑자기 그렇게 방에 들이닥쳐서 키스하고, 보고 싶었다고 꼬리치고, 외롭다고 유혹하고.... '그냥 아는 누나'랑 정말 많은걸 하고 지내는 구나? '그냥 아는 누나'랑 그 정도인데, 오빠는 애인이라도 생기면 참 큰일 나겠어?"
내가 몰랐던 동생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은, 뭐랄까.... 정말이지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섬뜩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비꼴 필요까지야...."
"뭐라구?"
"아, 아니야."
아무 말도 안하는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아서 나는 무조건 그냥 사과를 하기로 했다.
"미안해. 오빠가 잘못했어."
"미안해? 뭘 잘못했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그.... 너 혼자 놔두고 나갔다가.... 늦게 들어와서, 챙겨주지도 못하고...."
그러고보면 난 도대체 뭘 그리 '크게' 잘못한 걸까.... 궁색하게 더듬더듬 사과를 하면 할 수록,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어서 나는 변명을 할래야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솔직하게 여자랑 뒹굴다 왔다고 인정을 한다면 모를까, 그러지 않고서는 이 상황에서 내가 딱히 해줄 수 있는 말도 없었다.
"그게 전부야?"
"......"
오히려 혜진이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며 따지고 드니, 이젠 내 쪽에서도 슬슬 억울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혜진이가 오빠로서의 내 무책임한 태도에 대해서 힐난을 한다면 두 말할 여지도 없이 미안하다고 싹싹 빌어야 하는게 맞겠지만, 솔직히 혜진이의 관심사는 그런 부분을 아주 미묘하게 벗어나 있는 듯 했다.
"혜진아... 이, 일단 좀 자고 얘기해. 너도 그렇고, 오빠도 지금 많이 피곤하니까."
"하, 그러셔? 뭘 하고 왔길래 피곤하대?"
"......"
이쯤되니 왠지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찔리기도 하고, 또 동생이 오빠의 이런 부분까지 간섭하는게 정말 자연스러운건가 하는 기분이 들어 그냥 대답을 회피하고 싶어졌다. 나는 말없이 옷장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어제 혜진이가 몸을 숨겼던 바로 그 칸막이 아래의 두꺼운 수납장에서 얇은 담요 한 겹을 꺼내어 바닥에 이부자리처럼 대충 깔았다.
"뭐하는 거야?"
"잘려구. 너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누워서 좀 자."
"잘거면 침대에서 자면 되지 왜 바닥에 누워?"
"침대는 네가 써."
"같이 쓰면 되잖아!"
"아냐, 됐어. 거기 두 사람 누우면 의외로 불편해."
이건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사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단비 누나랑 같이 한 침대에 누워있다 왔지만, 솔직히 예의상으로라도 그리 편하다곤 할 수 없었던 잠자리였다. 물론 우리에게 있어선 편하고 말고가 중요한 밤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몸매의 볼륨 때문에 다소의 차이가 나긴 하겠지만, 어쨌든 체구 자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니 아마 혜진이와 저기 눕더라도 어느 정도 비슷한 느낌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단비 누나와 누웠을 때처럼 서로 몸을 붙여야 할 텐데.... 솔직히 이 분위기에서 혜진이와 그렇게 꼭 끌어안고 눕기에는 아무리 우리가 돈독한 오누이간이라고 해도 좀 무리이지 않을까 싶었다.
"오빠 지금 나 피하는 거야?"
"무, 무슨 소리야...."
참 오빠한테 못하는 말이 없구나 싶었다.
"그냥 그렇게 잘 거야? 학교 안 가?"
"오늘은 아침 수업 없어."
사실 수업이 있다고 해도 갈 마음이 없었다. 내가 일부러 담요를 끌어 덮으며 혜진이에게서 등을 돌려버리자, 등판에 와서 꽂히는 무시무시한 동생의 시선이 보지 않아도 찌릿찌릿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혜진이의 날카로운 눈빛을 온 몸으로 느끼며, 애써 눈을 감았다. 지난 밤의 피로가 있었기 때문인지 나는 금방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애매한 아침 잠에서 깨어난 이후로도, 혜진이의 싸늘한 태도는 좀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수업까지 빠져가며 혜진이의 옆에 딱 붙어 동생을 달래주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그저 한결같기만 했다. 고집스럽게 입을 꼭 다물고는 내가 뭐라고 말을 붙이기만 하면 냉랭하게 받아치는 태도를 꿋꿋이 고수하고 있었다. 그렇게 침대 위에 몇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있을 것 같은 동생의 모습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너... 배 안 고파?"
그러고보니 여태껏 방 안에만 꼼짝없이 숨어 있느라 적어도 어제 저녁부터 지금까지 쫄쫄 굶었을 텐데.... 내가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자 혜진이는 차가움 반 솔직함 반의 아주 애매한 대답을 했다.
"배고파."
"......"
차마 배가 안 고프단 말은 못하고 쌀쌀맞으면서도 솔직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황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안쓰러웠다. 그런만큼 나는 동생을 너무 무책임하게 내버려뒀다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더더욱 심하게 느껴져 다시 한번 자책감이 물씬 들었다.
"일어나. 나가자."
"어디로?"
"밥 먹어야지. 얼른 가자."
혜진이는 샐쭉하니 입이 툭 튀어나온 와중에도 밖으로 나간다는 말에 솔깃한 것인지, 정말로 배가 고팠던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못해 일어나 주섬주섬 겉옷을 챙겨입었다. 하지만 혜진이가 신발까지 다 챙겨신고나자 나는 한 가지 난제를 깨닫고는 또 한번 골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혜진아."
"왜?"
여전히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동생이었지만, 지금 우리에겐 혜진이로서는 쉽게 공감할 수 없는 훨씬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잠깐 기다려."
나는 영문을 모르고 서있는 혜진이를 놔두고 혼자 1층으로 내려와 기숙사생들이 이삿짐을 옮길 때나 쓰는 카트 운반기를 공용물품실에서 빌려왔다. 단비 누나와 서로의 방을 들락거렸을 때에는 그래도 늦은 밤 아니면 이른 아침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인적이 뜸해서 들키지 않았지만, 이렇게 어중간한 시간에 여자애를 데리고 방 밖으로 나갔다간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조용히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무리수를 쓸 수 밖에 없었다.
"여기 숨어."
"뭐어?"
내가 다시 방으로 돌아와 끌고온 운반기에 숨으라고 손짓하자 혜진이는 질색부터 했다.
"안 걸리고 나가려면 어쩔 수 없어."
"으으...."
인상을 찌푸리며 진저리를 치는 혜진이었지만 나로서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랴.... 나의 거주지가 달린 일인데, 이 정도 불편은 감수해야지.
학기 초나 학기 말도 아닌, 어중간한 학기 중에 짐을 싣은 카트 운반기가 복도를 슬금슬금 지나가니 기숙사생들의 의아한 시선이 여기저기에서 날아왔다. 나는 인적이 드문 지하 세탁실까지 와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며 카트를 멈춰세웠다.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카트 위에 덮어두었던 위장용 이불을 걷자마자 그 속에서 혜진이가 갑갑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잽싸게 기어나왔다.
"괜찮아?"
"몰라."
다시 이불을 방에 갖다놓기가 귀찮았던 나는 이불을 세탁기 안에다 처박아버리고 아예 빨래를 시켜버렸다. 그렇게 간신히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 우리는 아직도 냉기가 풀리지 않은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미안해, 혜진아... 오빠가 너 밥 먹는 것도 신경 못 써주고."
"밥 먹는 것만 신경 못 써줬겠어?"
"......"
평소 같았으면 귀엽게 웃으면서 '아니야, 오빠! 괜찮아.' 등의 대답을 했을 혜진이가 자꾸 이런 식으로 나와버리니 신선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아주 묘한 기분이었다. 동생의 재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덕분에 나는 하나 뿐인 여동생이 극도로 화가 나면 뭐든지 말을 비꼬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인생 최초로 깨달을 수 있었다.
"초, 초밥 사줄까? 네가 좋아하는...."
"......"
화나는 와중에도 귀가 약간은 솔깃하는지 혜진이는 아무 대답도 않고 그냥 묵묵히 걸었다. 나는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혜진이를 일식집으로 인도했다. 하지만 밥을 먹으면서도 혜진이는 내내 젓가락질만 할 뿐 한 마디도 말이 없었다. 평소의 그 재잘거리던 모습을 떠올려보면, 정말로 내가 혜진이를 그렇게까지나 화나게 만든건가 다시 한 번 의문이 들 정도였다.
밥을 먹고 나오니 이미 하루의 반이 지나가 있었다. 남은 오후 수업이라도 들어가볼까 하다가 더이상 혜진이를 혼자 뒀다간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그냥 오늘은 수업을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혜진아.... 이제 집에 돌아가야지."
"나 안 가."
"뭐?"
"그 여자랑 오빠랑 무슨 관계인지 알아낼 때까지 나 집에 안 가."
"뭐, 뭐라구?"
"그리고 오빠가 학교 다니면서 공부는 안 하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내 눈으로 좀 봐야겠어."
"야, 너 대체 왜 이래?"
하도 어이가 없고 어안이 벙벙해서 나는 몇 마디 따지고 들려했지만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진이가 실로 무시무시한 표정을 하고서 나를 쏘아보자 그만 기가 죽어버렸다. 언제부터 이렇게 약한 오빠가 된 걸까.
"오빠 나 억지로 집에 보내면 이번엔 아예 가출해 버릴거야. 그리고 오빠도 못 찾게 꼭꼭 숨어서 엄마 아빠 속 실컷 썩이고, 공부 한 자도 안하다가 인생 말아먹어버릴래. 맨날 술만 먹고 사고만 치고 다녀야지. 그러면 오빠는 후회하겠지? 아, 내가 그 때 동생 말을 안 들어줘서 내 동생이 망가지는구나 하면서."
"......"
"그러니까 당분간 오빠 방에서 지낼 테니 그렇게 알아."
협박 같지도 않은 협박에 말문이 막혀서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으려니 혜진이가 '허락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내 대답을 강요했다. 사실 혜진이의 발언은 혜진이 본인에게는 물론이거니와, 나의 안전한 기숙사 생활까지도 송두리째 위협 당할지 모르는 내용이었다.
"모, 모르겠다... 맘대로 해."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는 결코 혜진이를 오래 데리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일단 지금은 더 화를 내지 못하도록 달래주는 차원에서 이렇게 대답을 했지만, 늦어도 2, 3일 내로 혜진이의 마음을 완전히 달래준 다음 최대한 빨리 집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때 그렇게 어설픈 결심만 하지 않았어도.... 하지만 이 당시에는 정말 그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이야 나는 상상도 못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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