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그녀들의 마음은 ? - 14부
감동넘치는 로맨스 명작
그녀들의 마음은 ? - 14부
어둑어둑한 기숙사 앞 가로수길에서 우두커니 선 채로 기숙사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는 여동생의 모습을 나는 발견할 수 있었다. 혹시 가출이라도 한 건가 싶어 한순간 불안함을 느꼈던 것이 무색하리만치 태연한 그 모습을 보니 허탈하기까지 했다. 헐레벌떡 가까이 다가온 나는 우선 추궁부터 시작했다.
"야, 너 어떻게 된 거야?"
"헤헤, 여기가 오빠가 사는데구나. 생각보다 괜찮네. 나는 무슨 거지소굴 같은데서 살고 있을까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똑바로 말 안 할래?"
내가 버럭 화를 내니 혜진이는 기어들어가는 듯한 웃음을 배시시 지었다. 옛날부터 뭔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꼭 이런 표정을 짓곤 했었다. 볼때기를 꼬집어주는 것이 내가 혜진이를 달래주는 방법이었다면, 혜진이는 내가 화를 낼 때마다 죄 지은 듯한 웃음과 함께 딴청을 피우는 수를 썼던 것이다.
"그게.... 으음.... 오빠 벌써 엄마한테 전화왔었구나?"
"그래. 두 분 다 걱정하고 계셨어."
표정을 보니 또 얘기가 길어질 만큼 복잡한 사정이 뭔가 있나보다. 아무튼 가로등 아래에 무작정 서서 할 대화는 아닌 것 같아서 나는 혜진이를 기숙사앞 벤치에 앉혔다. 그러고보니.... 여기는 얼마 전에 단비 누나와 조금 낯뜨거운 썸씽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였다. 비록 키스만으로 끝나긴 했지만 어쨌든 뭐....
"오빠, 나 독립 생활 하고 싶어."
"뭐어?"
혀와 혀가 뒤엉켰던 그 민망한 장면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려는 순간 혜진이의 돌발 발언이 내 상상을 끊어버렸다. 그 한 마디가 그렇게나 충격적이지 않았다면 나는 그 상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나 집에서 나오고 싶어. 집에 있기가 싫어."
"그, 그렇다고 독립이라니? 니가 무슨 독립을 해.... 그게 쉬운건 줄 알아?"
"치. 나도 이제 스무살이란 말야."
독립생활이라는게 쉬운건 줄 아나보다. 얘가 무슨 또 철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건가 싶어 나는 골치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요즘 혜진이가 진학 실패와 재수 문제로 좀 힘들어 하는 걸 물론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렇게까지 엇나가려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나는 좀 화를 내서라도 동생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너 요새 아빠 엄마 속 많이 썩인다더니 그런 것 때문이었어? 제발 정신 좀 차려. 니가 독립생활을 한다구? 그게 어디 쉬운 건 줄 알아?"
"......"
"니가 지금 독립생활을 한다고 해봤자 그건 결국 가출생활 같은거 밖에 안 돼. 마음 잡고 공부해야 될 애가 독립은 무슨 독립이야? 말이 독립이지 결국 너 공부하기 싫어서 놀겠다는 거잖아. 이제 정신 차릴 때도 되지 않았어? 부모님 속도 썩겠지만 나도 너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냐."
내가 노골적으로 언성을 높이며 나무라고 나서자 혜진이는 인형처럼 커다란 두 눈망울을 동그랗게 뜨고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적어도 나와 혜진이의 기억으로는, 아무리 혜진이가 잘못을 했거나 내가 화가 난 상황이라 해도 이렇게 윽박을 지르고 모질게 말을 했던 경우는 좀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얼른 집에 돌아가. 어머니 걱정하신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혜진이가 아무 대답이 없자 나는 의아하여 앞만 보던 시선을 슬그머니 혜진이에게로 옮겼다. 순간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과 함께 마음이 욱신거리며 쓰려왔다. 혜진이가 얼굴을 두 손에 묻은채 울고 있었던 것이다.
"혜진아."
"......"
이윽고 훌쩍거리는 소리가 손틈 사이로 새어나오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이마를 부여잡았다. 입에서는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세상에서 나를 제일 생각해주고 잘 따라주었던 여동생이 갑자기 울음보를 터뜨리니 방금 전까지 성을 내던 것도 모두 거짓말처럼 가라앉아버렸고, 어떻게든 일단 달래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진아. 왜 울어...."
"훌쩍...."
한동안 혜진이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등을 쓸어주자 생각보다 빨리 잠잠해진 동생은 눈물방울이 아직 맺힌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눈꼬리에 이슬이 맺혀있는 그 모습을 보자 단비 누나가 다시 한번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애써 떠오르는 누나의 모습을 지우고 혜진이의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오빠 나한테 왜 그래?"
"....."
"난 너무 힘들어서.... 오빠 얼굴 한 번 보면 조금이라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래서 오빠 학교 주소까지 찾아보고 사람들한테 물어물어 여기까지 찾아온건데. 오빠는 나한테 그런 말 밖에 못해?"
"나, 나는 네가 걱정되서...."
"걱정되면 내가 지금 왜 이러는지, 내가 왜 힘들어 하는지 뭐 그런 것부터 물어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 얼굴 보자마자 오빠는 날 걱정하기보단 어떻게 된 건지, 왜 엄마 아빠 속 썩이는지 그런 것부터 물어봤어. 왜 내 생각은 먼저 안 해줘?"
"아니... 그게...."
방금 전까지는 내가 혜진이를 닥달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순식간에 상황이 완전 반대로 바뀌어버렸다. 아무리 남자가 여자의 눈물에 약하다는 말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게 남매 사이에까지 통용되는 말인지는 미처 몰랐다. 게다가 혜진이가 하는 말도 내 정곡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
"심지어 내가 왜 집에 있기 싫은지, 왜 이런 말을 하는지도 전혀 관심없이 그냥 집에 돌아가라는 그런 말만 하고 있어. 지금 얼마나 슬픈지 오빤 모를 거야. 배신감 느껴."
"아니야... 그런게 아냐."
나는 윽박을 지르던 자세도 모두 잊고 혜진이의 옆자리에서 일어나 여동생 앞에 몸을 수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혜진이의 양손을 꼭 쥐고는 조곤조곤 말투를 바꾸어 달래기 시작했다.
"오빠가 왜 네 걱정을 안 해. 내가 너 얼마나 생각하는지 몰라서 그래? 그냥 니 걱정을 너무 많이 하다보니까.... 이렇게 안 하면 네가 자꾸 딴 생각할까봐 그래서 그런 거야."
"흥.... 변명하지 마."
"아니야. 생각해보니까 네 말이 맞아. 내가 너무 네 생각은 못하고 화부터 냈어. 오빠가 미안해... 응?"
나는 혜진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동생을 달래줄 때마다 늘 해왔던 것.... 이건 우리 남매 사이에서 나름대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정말 미안해?"
"그럼. 당연하지."
"그럼 내가 하고 싶은거 하나만 해줘."
"뭔데?"
"오빠 방 구경해보고 싶어."
나는 양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기숙사 건물을 돌아보았다.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아직 안심하고 몰래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안전한 시간도 아니었다. 비록 오늘은 사감이 각 방을 돌아다니며 인원 점호를 하는 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위험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건 좀.... 위험한데."
"왜? 난 오빠 동생이잖아. 가족도 방에 마음대로 못 들어가는거야?"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물론 혜진이가 호적상 내 여동생이라는 점을 들어 가족 방문을 허락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아봐야 알 수 있겠지만, 어쨌든 가족 방문도 사전에 사감실에 미리 허락을 받아야 가능한 거였고, 미리 허가받지 않은 상태에선 혜진이가 내 방에 들어오는 것 또한 엄연히 말하면 수칙 위반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이성 출입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치면 징계가 조금 가벼워질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방 구경은 나중에라도 할 수 있는데.... 다음에 부모님이랑 같이 와서 허락맡고 봐도 되잖아."
"절대 싫어! 지금 당장 볼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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