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그녀들의 마음은 ? - 13부
감동넘치는 로맨스 명작
그녀들의 마음은 ? - 13부
유가희 교수의 교양수업은 빡빡한 일주일의 수업 시간표 가운데 유일하게 손꼽아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백설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점이었지만, 일상적이고 지루한 수업들을 잠시 벗어나 젊고 예쁜 강사가 강의하는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점 자체만으로 그것은 내게 일종의 활력소가 되어줄 만한 시간이었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멀티미디어관 입구를 오르다 나는 우연히 유가희 교수와 마주쳤다. 항상 이 시간쯤 되면 그녀가 수업을 위해 이 부근으로 올라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우리는 생각보다 수업 시작 전에 꽤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내가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여느 때처럼 싱긋 하고 웃으면서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오늘도 제시간에 맞춰오시네요."
"하하. 교수님한테는 찍히기 싫어서 지각 안 하려구요."
"정말 찍히고 싶지 않다면 지각만 안 할 게 아니라 수업시간에 집중을 해주셔야 할 걸요? 옆에 있는 여학생만 쳐다보지 말구요."
"윽...."
찔리는 구석이 있는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몇 번의 수업이 지나갔지만 나는 늘 백설미에게 집중을 하느라 사실 수업 내용에는 그리 귀를 기울이지 못했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본인의 말에 따르면, 내가 설미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다던 유가희 교수 앞에서는 변명을 해봤자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하긴 그 여학생이 워낙 예쁘니 이해는 하지만 뭐."
"제가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오늘부턴 열심히 들을게요."
그녀는 평소와는 달리, 마치 내 또래의 여학생들처럼 천진난만하게 깔깔 웃으며 장난스럽게 뒷말을 이었다.
"조심하는게 좋을 걸요. 사실 그 여학생만 보고 있기 보다는 그 주위를 좀 둘러보는게 더 좋을 텐데."
"무슨 말씀이세요?"
"전에도 말했지만 난 눈치가 워낙 빠르니까요. 내 수업 중에 열렬한 눈빛을 하고서 그 여학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승태 학생 말고도 또 하나 있던 걸요?"
"네...?"
나는 그녀에게 좀 더 구체적인 말을 듣고 싶었지만 어느새 강의실 입구까지 다다른 그녀는 미묘한 웃음을 한번 짓고는 교단 위로 올라가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찝찝하고 꺼림칙한 그 말을 속으로 곱씹으며, 괜히 고개를 두리번 거릴 뿐이었다.
백설미는 여느 때처럼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 홀로 앉아있었다. 여태껏 몇 번의 수업을 거치면서 나는 하나 배운 점이 있었다. 이렇게 그녀의 옆자리가 비어있을 때에는 최대한 빨리 다가가서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거였다. 그렇지 않았다간 그녀의 옆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다른 남자들이 와서 괜한 추파를 던질 확률이 거의 백퍼센트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안녕!"
"......"
나는 일부러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지만 백설미는 늘 그랬던 것처럼 당연히 묵묵부답이었다. 지난 몇 수업 내내 나는 집요하게 그녀의 옆자리를 계속해서 고수해왔다. 그 끈덕진 노력의 결과인진 모르겠지만, 다른 남자들이 옆자리에 와서 찝적거릴 때에는 늘 대놓고 냉담한 분위기를 날리던 그녀가 이제는 내가 와서 앉아도 그러려니 하며 별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사실.... 아예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진짜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었지만 아무렴 대시했다가 무시만 받고 나가떨어진 다른 남자들을 생각한다면야 뭐.
"뭔데 반말이야?"
".... 우리 말 놓고 지낸게 3주가 지났거든?"
"그랬었나?"
"......"
하여튼 정말 이상한 애였다. 4차원이라고 해야 하나?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설미의 옆자리에 한번쯤은 대시했다가 나가떨어진 적이 있는 이 수업의 많은 남학생들이 질투와 시기의 시선으로 날 씹어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사실 우리가 뭐 딱히 질투와 시기를 받을 만한 사이도 아니었건만 (그런 사이라면 오죽 좋았겠는가), 그녀의 괴팍한 성격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말 몇 마디 주고 받는 것조차 나름 대단하다면 대단한 일이긴 했다. 우월감을 느껴야할지 말아야할지 참 미묘한 기분이다.
"수업 시작할게요."
유가희 교수의 목소리와 함께 웅성거리던 강의실이 잠잠해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설미의 옆자리에 앉은 나를 보고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잠깐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조금 전에 그녀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라 나는 괜히 고개를 휘둘러 주위를 살펴보았다.
내가 여태껏 줄기차게 설미의 옆자리를 지켜온 덕분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자리에 와서 앉는 남학생들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설미의 남자친구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애석하게도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옆자리에 앉지만 앉을 뿐, 수업 시작 전이나 수업을 마치고 나서 슬며시 다가와 말을 걸고 작업을 노려보는 남학생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 걸로 봐선 말이다.
하기사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 설미에게 열렬한 시선을 던지는 남자들이야 한 둘이 아니었으니 애초에 당연한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신경이 쓰였던 이유는, 그녀가 '한 명'이라는 의미심장한 표현을 썼기 때문이었다.
"설미 씨, 안녕하세요."
그 때 생각을 부숴놓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습게도 오히려 지목을 받은 설미 본인은 묵묵부답은 물론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 목소리에 반응하여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러자 우리 바로 뒤편에 자리잡고 앉은 또다른 한 쌍의 남녀가 보였다.
누군가 했더니 조별 배정을 받을 때 같은 조로 지목되었던 그 두 사람이었다. 정영식이라는 그 남자는 정작 수업시간에는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일 때가 많더니, 이렇게 쉬는 시간이나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 가끔 설미에게 와서 괜한 말을 한두마디씩 던지고 가곤 했다. 사실 그럴 때마다 그 옆에 붙어있는 최민지라는 여학생의 얼굴은 벌레라도 씹은 마냥 구겨졌지만, 남자 쪽은 그것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오늘까지 들은 수업 내용을 토대로 이제부터 각 조별로 작품을 정한 다음 발표 및 과제 준비에 신경을 써주세요. 다음달 첫 수업이 시작되면 1조부터 순서대로 과제를 발표하도록 진행하겠어요."
"으.. 벌써 조별 과제라니."
비교적 여유로웠던 학기초가 지나가고 나자 이제 슬슬 과제의 양이 불어나고 있었다. 유가희 교수님의 수업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 수업의 과제는 조별 발표인 만큼 더욱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백설미와 같은 조이니만큼 더더욱....
"그렇기 때문에 이번 시간부터는 조장을 정하고, 조원들 간에 충분히 토의를 해서 발표 주제를 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거에요. 조장은 전체 발표를 맡게 되는 만큼 인센티브를 주겠지만, 조원들을 이끌어야 하는 만큼 의욕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 잊지 마세요."
'의욕과 책임감이라....?'
나는 의도 되었든 의도되지 않았든 간에, 저절로 앞뒤로 사각형을 이루고 앉게 된 우리 조원 네명을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백설미와 나, 그리고 백설미에게 추파를 던지는 놈 하나, 그리고 그 놈의 여자친구. 신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죽여주는 구성이었다.
나는 결코 여성 비하를 일삼는 남성 우월주의는 아니었지만, 솔직히 이 구성을 보았을 때 여자 둘은 제외시키고 싶었다. 일단 말 한 마디 섞기 힘든 성격으로 봤을 때 백설미는 농담으로라도 조장에는 어울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이미 남자친구 때문에 백설미에게 막연한 적대감을 갖고 있는 최민지라는 여자에게 맡겼다간 조가 콩가루가 날 게 뻔했다. 물론 이걸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토의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제가 조장을 하죠."
정영식이라는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수업 자체에는 전혀 흥미가 없어보였던 사람이 갑자기 조장을 하겠다고 나서서 나는 내심 놀랐지만 그 옆의 여자친구는 나보다 더 놀랐는지, 아니면 단순히 기분이 나빴는지 눈에 띄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도 괜찮겠지요? 설미 씨."
그는 조원 전체가 아닌 설미만을 지목해서 동의를 구했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대번에 눈치챘다. 최민지에게는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거고, 나에게는 동의를 구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아니요. 괜찮지 않은데요."
뜻 밖의 대답에 순간 설미를 제외한 세 명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알기로 설미가 저 남자의 말에 사적으로 대답을 한 경우는 아예 없다고 봐도 좋기에 나는 그녀가 대답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정영식 본인으로서도 대답을 기대한 질문이 아니었던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가 그녀가 불쑥 태클을 걸자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 하하.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수업에 별 의욕도 없어보이는 사람에게 조장을 맡길 수 없으니까요."
"......"
너무나 시원하고 직설적인 대답에 좌중은 할 말을 잃었다. 정영식 본인의 표정도 볼 만 했지만, 특히나 최민지의 표정이 볼수록 가관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게 아니었다.
"야."
"으, 응?"
설미가 내 옆구리를 한번 후려치자, 넋을 놓고 있었던 나는 갈비뼈가 부숴지는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충격과 함께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니가 해."
"뭐?"
"니가 그거 하라고. 조장."
"내, 내가?"
나는 문득 설미를 제외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뭐랄까.... 둘 다 쳐다보기 싫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기사 저 두 사람에게 맡길 바에야 내가 하는 편이 차라리 속 편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괜찮을 까요?"
먼저 입을 연 쪽은 남자 쪽이었다.
"하, 하하. 설미 씨가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저는 상관없긴 하지만.... 그래도.... 학년도 낮은 것 같은데 잘 할 수 있을 런지...."
"그 쪽하고 한 학년 차이 밖에 안 나는 걸로 아는데요."
호쾌한 설미의 태클이 또 한번 이어지자 정영식은 벙어리처럼 입이 굳어 버렸다. 평소 설미와 말 한 마디 주고 받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것 같았는데, 과연 지금 기분이 어떨까 싶었다.
"제, 제가 보기엔 그쪽 남자분도 별로 미덥진 않은데요?"
최민지가 어이가 없다는 듯 반박하고 나섰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내가 아니라 설미 쪽에서 나왔다.
"그럼 본인이 하실 건가요?"
"......"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각 조를 돌아다니며 조장 체크를 하고 있었던 유가희 교수가 우리 조 근처로 와서 물었다.
"여기는 누가 조장을 하기로 했나요?"
사실 아직도 싸늘한 분위기 속에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우리 조였지만, 설미는 제멋대로 내 머리를 가리키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여기요."
"......"
맞은 편의 남녀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아니, 우리를 보았지만 이미 유가희 교수는 이미 명단에 내 이름을 체크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호호, 재미있네요. 잘해 봐요."
유가희 교수는 뭔가 재미난 거리라도 발견한 듯이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무척이나 함축적인 윙크를 날렸다. 뭘 잘해보라는 건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했지만, 어쨌든 나는 그렇게 어거지로 조장이 되었다.
"뭐,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어...?"
등 뒤에서 최민지가 백설미를 노려보며 뭔가 씩씩거렸지만, 나는 애써 그 소리를 외면했고 설미는 언제나처럼 보란 듯이 무시했다. 나는 정영식이라는 그 남자가 나를 분노에 찬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그제서야 아까 유가희 교수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있었다.
'아하... '
"아까 왜 그랬어?"
"뭘?"
"조장 말야."
"니가 제일 미더워 보이니까."
수업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면서 나는 설미에게 물었다. 그녀는 딱히 돌려말할 것도 없다는 듯 전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너무 시원시원한 대답이다보니 나는 이게 좋아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어, 어쨌든 열심히 할게."
"그래."
"......"
설미와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으로 단절을 향해 달려가는 짤막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하기사 말 한 마디 주고 받기 힘들었던 처음에 비하면 지금은 실로 발전한 셈이지만 관계 진전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별 다를 게 없어보였다.
"혹시 밥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래? 내가 살게."
"배불러."
"......"
낙심하고 있는 사이에 설미가 이제는 눈에 익숙해진 그 연두색 오토바이를 타고 멀리 사라져버리자 혼자 남은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예전보다는 분명 좀 친해진 것 같긴 한데, 그래봤자 지나가는 행인 1보다 아주 조금 나은 수준일 뿐인거 아닌가....?
배도 고프고 왠지 오늘은 그대로 기숙사에 들어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야간 수업 때문에 오늘은 단비 누나도 없고.... 누구 저녁이나 같이 먹을 사람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에 머릿 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데이트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망설여졌지만, 나는 이내 액정에 전화번호를 찍었다.
"오늘은 남친이랑 데이트 없나봐?"
"맨날 데이트하면 좋을 것 같지? 매일 보면 피곤해."
"흠, 니가 바람맞은 건 아니고?"
"자꾸 그러면 나 그냥 간다."
세나와 단둘이 만나기는 꽤 오랜만이었다. 봐도 항상 넷이서 보고, 둘이 만나는 거라곤 기껏해야 캠퍼스를 오고 가며 잠깐씩 마주친게 전부였다. 일식집에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는 한동안 소소한 대화를 계속했지만 나는 속으로 내가 그런걸 세어보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왜 내가 그런걸 신경쓰고 있는 걸까?
"학기도 꽤 지났는데 너는 뭐 없어?"
"뭘?"
"잘 되가는 여자 없냐구."
"그, 글쎄...."
아담하고 소박한 분위기의 일식집은 조용히 얘기를 나누기엔 딱 좋은 곳이었지만 이상하게 세나와의 대화는 예전처럼 자연스럽지 못했다. 세나 입장에서는 별 이상한 점을 못 느끼고 있겠지만, 나는 어쩐지 혼자서 조심스러운 기분이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요새 보니까 설미랑 꽤 친하게 지내는 것 같던데? 걔랑 잘 되가고 있는거 아니었어?"
"하하... 친하다구? 말도 안 돼. 걔가 어떤 성격인지 너도 대충은 알잖아."
"아니까 그러는 거지. 다른 사람이랑은 말 한 마디 안 주고 받는 앤데, 너랑은 잘 얘기하는거 보면 그래도 나름 친하다는 뜻 아니야?"
"그, 그게 그렇게 되나?"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그러는 사이에 돈가스 정식과 모듬 롤이 나왔다.
"어쨌든 잘해봐. 혹시 아니? 유일무이하게 백설미에게 대시해서 성공한 남자가 될 수 있을지도."
"뭐... 그래."
왠지 모르게 입맛이 썼다. 예전에 나를 좋아했었던 여자가 지금은 내게 아무런 미련이 없어보여서 씁쓸한 기분을 느낀 걸까? 물론 세나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였다.
"너랑 밥 먹는거 오랜만이다."
"그, 그러게."
"너 군 제대하고 나서도 나랑 잘 안 놀았잖아."
"야, 잘 안 놀다니.... 네가 애인이 있으니까 그런거지."
"피, 애인 있으면 친구끼리 밥도 못 먹어?"
하긴 남자친구가 있든 없든 친한 친구사이니만큼 어색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지금 이렇게 세나를 의식하고 있는 걸까?
'내가 세나를 여자로 보고 있는 건가?'
친구가 아니라?
"너 예전만큼 많이 못 먹는 것 같다."
"글쎄... 군대가서 배가 줄었나보지 뭐."
최대한 자연스럽게 얘기를 하고는 있었지만 나는 분명히 예전에 그녀를 대할 때와는 내 마음의 태도가 달라져 있음을 스스로 깨닫고 그 점에 놀라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는 건데.... 게다가 이미 애인도 있는 친구를.
"언제 기숙사 한번 놀러와."
"응?"
세나를 여자로서 대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머리와는 다르게 어쩐지 내 입에서는 사심이 담긴 것 같은 말들이 흘러나왔다.
"기숙사 오면 또 피아노 들려줄게. 나 생각 났거든. 예전에 너한테 연주해 줬던거... 녹턴 야상곡 맞지?"
그러자 세나가 젓가락질을 하다 말고 의외라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그거 기억 났어?"
"물론."
"와아, 벌써 예전에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걸 어떻게 잊어."
"피. 웃기시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까먹고 있었지?"
"아니야."
나는 궁색하게 부정했지만 세나는 마냥 기분이 좋은 듯 했다. 하기사 세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나는 그 때의 일을 잊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좋아. 그럼 다음에 놀러갔을 때 또 들려주는거다."
"그래. 알았어."
밝게 웃는 세나의 가지런한 치아와 새하얀 목덜미에 자꾸 시선이 머물렀다. 예전에 그녀를 친구로서만 느낄 때에는 결코 느낀 적이 없는 야릇한 기분이었다.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록 마음은 자꾸만 그 생각을 더욱 부풀려주는 힘이 있었다.
"저기, 있잖아."
"응."
"너는 뭐... 남자친구랑 싸우거나 그런 일 없이 잘 지내는 편이야?"
최대한 친구끼리의 가벼운 대화로 보이게끔 말을 꺼냈지만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는지 스스로는 확신할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던 세나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우린 뭐 딱히... 그런거 없는 것 같애. 좀 있으면 1년째인데 별로 크게 싸운 적도 없구."
"그래?"
"헤헤. 그러고보니 좀 있으면 기념일이야. 이거 비밀인데, 아무래도 남자친구가 그 때 반지 맞추려는 것 같애. 놀래켜 주려고 말 안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티가 나거든. 반지 사이즈도 물어보고."
혼자서 들뜬 세나의 얘기를 들어주며 나는 못내 착잡한 마음을 숨겼다. 이제와서 세나에게 사심을 품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친구로서 세나가 계속 애인과 행복하게 사귀기를 바래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옳은 거니까.
- 위이이잉....
- 딩동.
순간 세나와 나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세나는 전화였고, 나는 문자메시지였다.
"어... 잠깐 전화 받고 올게."
"그래."
조심스럽게 나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남자친구 전화인 것 같았다. 세나가 나가고 나서 나도 문자메시지를 확인해보았다. 나는 애인이 없었으니 당연히 여자친구의 문자 따위는 아니었고, 오히려 너무 뜻밖의 문자라서 고개가 절로 꺾일 정도였다.
[시간 있으면 전화 한 통 해주렴]
새엄마와는 막상 집에 가서도 대화를 별로 하지 않는 편이라 새엄마에게서 전화나 문자가 오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혹시 집에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생긴건가 싶어 왠지 모르게 벌써부터 신경이 쓰였다.
'무슨 일이지?'
당장 전화를 해볼까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세나가 다시 돌아와서 나는 전화를 잠시 미루기로 했다.
"남자친구야?"
"어? 으응."
"왜? 무슨 일 있어?"
사실 물어놓고 조금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인끼리는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를 주고 받는게 아니지 않은가.
"오늘 보자는 얘기 없었는데 갑자기 만나자네. 나 조금 있다가 가 봐야 될 거 같애."
"하하. 갑자기 네가 너무 보고 싶었나보다."
"피, 내 남친 그렇게 로맨틱한 사람 아냐. 암튼 자기가 이쪽으로 오면 다시 전화한댔으니까 그 때까지 같이 있어줘."
"뭐야, 이거. 내가 킬링타임용이야?"
"밥도 같이 먹어줬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세나의 남자친구가 나타나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근처의 노천 카페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있다보니 곧 대학로 맞은편에서 은색의 SM5가 진입해 들어왔다. 세나가 그 차를 알아보고 손을 흔드는 것을 보니 아마 남자친구의 차인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세나의 남자친구를 실제로 보는건 처음인데....'
문이 열리고 운전석에서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한 남자가 내렸다. 세나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나도 덩달아 일어섰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나는 생각보다 훨씬 준수한 그의 외모를 보고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많이 기다렸니?"
"아니. 친구가 놀아줘서 괜찮았어."
남자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자 나는 얼떨결에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세나 친구 서승태입니다."
여자친구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왠지 나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낼 줄로만 알았던 남자는 뜻밖에도 웃음을 띄며 내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아, 세나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뵈니 반갑네요. 저는 박선호라고 합니다."
인사 한 마디 나눴을 뿐이지만 척 보기에도 예의가 바르고 사람 대하는 태도가 둥글둥글한 사람이라는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팔을 이끌어 세나를 차에 태우더니 내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 않아도 세나가 친한 친구 세 분 얘기를 자주 하던데, 다음에 같이 한 번 뵙고 싶습니다. 시간 편하실 때 한 잔 괜찮으실지?"
"다음에 친구들 불러서 한 번 뵈요. 다른 두 친구도 세나 애인을 궁금해하고 있거든요."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세나가 스쳐 지나가며 손을 살짝 흔들었고 두 사람을 태운 차는 곧 왔던 방향으로 다시 사라져갔다. 홀로 쓸쓸히 남은 나는 왠지 아주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땅바닥을 툭툭 찼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잖아.'
그러면 친구로서 당연히 흐뭇해하고 안심해야 하는거 아닐까?
"쳇...."
하지만 입맛은 그저 씁쓸하기만 했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새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문자가 왔을 때부터 이미 골치 아픈 일일거라 짐작은 했지만 막상 전화를 해보니 생각보다 더욱 신경 쓰이는 문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혜진이가... 집에 잘 안 들어온다구요?"
수화기 너머의 새엄마는 근심스런 목소리로 설명을 계속했다.
[요새 들어 유독 그러는구나. 공부가 제대로 안 될 때이긴 하지만... 이왕 재수를 결심한거 이제 마음 잡고 열심히 공부해야 할 때인데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르겠고. 얼마 전에 나갔다가 벌써 이틀째 전화 한 통도 없이 집에 안 들어오고 있단다. 너무 걱정되서 찾아보려고 할 때 쯤 되면 간간이 들어오기는 한다만... 공부도 잘 안하는 것 같고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구나.]
"......"
[너한텐 무슨 연락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단다. 요새 혜진이가 너한텐 무슨 전화라도 하고 지내니?]
"아뇨... 딱히 온 적이 없는데. 혜진이한테 전화는 해보셨어요?"
[전화는 해봤지. 애가 일부러 안 받는지 못 받는건지는 모르겠다만....]
"일단 제가 한번 전화해볼게요. 아버지는 알고 계세요?"
[그래. 요새 그것 땜에 근심이 크셔. 마음 잡고 공부해야 될 애가 말야.]
"제가 찾아서 잘 달래볼 테니까 너무 걱정말고 계세요. 다시 연락 드릴 테니."
간신히 새엄마를 안심시켜 일단 전화를 끊은 나는 종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이어서 혜진이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다른건 몰라도 철 없는 여동생이 아직도 여전히 길을 못 잡고 방황하고 있다면 그것만큼은 도저히 눈 뜨고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급한 내 마음과는 달리 평소에는 전화음이 세번도 울리기 전에 재깍재깍 전화를 받곤 했던 여동생은 통화음이 1분 가까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받을 생각을 않았다.
'일부러 안 받는 건가?'
통화는 결국 부재중 전화로 그치고 말았다. 혜진이가 내 전화를 안 받은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신기한 기분마저 들었다. 심지어 군대에서 전화할 때도 언제 전화하든 딱딱 받아주는 애였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얘가 때 늦은 사춘기 흉내라도 내는 걸까?
- 위이이잉.
그 때 핸드폰 진동이 짧게 울리며 문자메시지가 또 수신되었다. 아직도 손에 쥐고 있었던 핸드폰의 액정을 곧바로 확인한 순간 나는 액정에 혜진이의 이름이 떠있음을 볼 수 있었다.
[나 지금 오빠 기숙사 앞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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