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그녀들의 마음은 ? - 12부
감동넘치는 로맨스 명작
그녀들의 마음은 ? - 12부
"안 놔?"
앙칼진 목소리가 밤 공기를 매섭게 찢었다. 그 쌀쌀맞은 언성은 내가 평소 알던 단비 누나의 목소리라고는 생각도 못할 만큼 날카롭고 차가운 것이어서 한순간 눈이나 귀를 의심하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석조 기둥 건너편에서 누군지도 모를 남자에게 팔이 붙잡힌 채로 성을 내고 있는 저 여자는 분명 단비 누나였다.
"너 진짜 왜 이래?"
"뭐? 왜 이러냐고?"
"잠깐 얘기만 좀 하자니까. 니가 전화도 안 받아서 너 올 때까지 여기서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
"진짜 미쳤구나. 할 얘기 없으니까 빨리 이거 놓고 돌아가."
항상 웃는 모습만 보여주었던, 그래서 어딘가 좀 맹해보이기까지 했던 단비 누나가 욕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무슨 벌레라도 보는 것 마냥 경멸과 혐오로 굳어진 누나의 표정은 그 자체가 내게 하나의 충격이었다.
"애인이랑 얘기 좀 하자는게 미쳤다는 말까지 들을 일이야?"
"꼴도 보기 싫으니까 그만 좀 나타나. 알았어?"
팔을 뿌리치려던 누나의 몸짓은 남자가 놓아주질 않았는지 몸부림만 되고 말았다. 대충 무슨 상황일거라 짐작하는건 어렵지 않았지만 끼어들어도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지나가던 사람들이나 입구에서 오고가던 기숙사생들의 시선은 점점 더 그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이러지말고 우리 딴 데 좀 가서 얘기하자."
"또 이제와서 갑자기 나한테 매달리는 이유가 뭐야? 그 여자랑 요새는 잘 안 되는거야?"
"그건 오해라니까. 딴 데 가서 차근차근 얘기하자 우리."
"딴 데 가서? 또 지난번처럼 술 먹여서 어떻게 해보려고?"
"아직도 그 소리야? 그것도 오해라고 했잖아. 이것 봐, 니가 이렇게나 많이 잘못 알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그냥 갈 수 있겠어?"
"됐으니까 제발 좀 꺼져줘. 그리고 이것 좀 놔."
남녀 사이에는 끼어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지만 누나가 정말로 곤란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남자가 끝끝내 팔을 놓아주지 않자 나는 가까이 다가가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인기척을 울렸다.
"누나."
남녀의 고개가 돌아가더니 둘의 시선이 동시에 날아왔다. 하지만 단비 누나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반면 남자는 오히려 더 가늘게 눈을 찡그렸다.
"지나가는 길에 누나가 보여서요."
"으응."
누나는 어쩐지 조금 당황하는 듯한 눈치였다. 누나가 다시 한번 팔을 힘주어 뿌리치자 나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던 탓인지 이번에는 남자의 손아귀가 풀렸다. 그녀는 나에게 잠시 기다려달라는 손짓을 하더니 남자에게로 돌아섰다.
"어쨌든 이제 그만 가."
"저 사람은 누구야?"
남자는 대놓고 나에 대해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심히 기분은 상했지만 남녀 싸움에 섣불리 끼어든 것 자체가 좋은 일로 보일 수는 없는 노릇임을 알았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알 거 없잖아."
"뭐라구?"
남자는 찡그린 눈빛 그대로 나를 한번 쏘아보다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야, 윤단비. 너 왜 갑자기 당황해서 대답을 못 해? 저 남자 뭐냐니까?"
"내가 너한테 그런걸 굳이 설명해야 돼?"
"그냥 누군지 말하면 될 것이지 왜 말이 길어져? 어쩐지 요새 만나는 남자라도 생긴 것 같더니 저거였냐?"
뭐? 저거? 순간 울컥해서 입이 절로 떨어질 뻔 했다. 단비 누나가 나보다 한 발 앞서 받아치지 않았다면 아마 대답은 내 입에서 튀어나왔을 것이다.
"기숙사 친구야. 괜히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지말고 빨리 가버려."
"그냥 기숙사 친구라면서 왜 이렇게 얼굴 벌개져서 안절부절 못 해?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데."
"그만 좀 해! 머릿 속에 그런 생각밖에 없어?"
"니가 화내니까 더 수상해보이는거 몰라?"
원치않게 말이 길어져버리자 단비 누나는 진심으로 지친다는 표정이었다. 비록 도리가 아닌건 알았지만 나는 내가 말참견을 해서라도 일단 이 대화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지친 누나의 입에서 차갑기 그지없는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그래, 맞아."
"뭐?"
"요새 만나는 남자 맞아. 이제 됐어?"
"뭐야?"
"그러니까 이제 사라져."
남자가 나를 정면으로 노려보자 나는 비로소 그의 생김새를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얼굴 자체만 보면 상당한 미남형의 인상이었지만 아니꼬운 눈매와 분위기 때문인지 결코 선해보인다고는 할 수 없는 인상이었다. 잠시 말 없이 나를 노려보던 그는 비틀린 입매를 더욱 비웃음으로 일그러뜨리며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야, 윤단비. 너 참 웃기는 거 아냐?"
"......"
"내가 딴 여자랑 한 번 놀아났다고 여태껏 이 난리를 쳐놓고, 너도 결국 다를거 없었다 이거 아니야?"
"....뭐?"
심사가 뒤틀린 남자가 조소 섞인 얼굴로 비꼬는 듯한 말을 던지자 단비 누나의 표정도 다시금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아까의 그 빈틈없이 냉담하고 표독스러웠던 경멸의 표정하고는 어쩐지 약간 달라보였다.
"내가 바람나서 홧김에 맞바람이라도 핀 모양인가봐? 그럼 뭐.... 내가 딴 여자랑 잤으니까, 너도 저 남자랑 잤다 이 말이겠네. 그래서 저 사람이 끼어드는거야 지금?"
누나는 화가 난다기보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누나의 얼굴을 보고서도 남자는 이죽거리며 한 마디를 더 남겼다.
"걸레 같은 년."
- 짜악!
남자의 고개가 삽시간에 모로 돌아갔다. 맞은 남자도 놀라고 옆에서 보고 있던 나도 덩달아 놀랐지만, 따귀를 올려붙인 누나 본인도 내심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단비 누나는 앙다운 입술 사이로 겨우 한마디만 어렵사리 내뱉았다.
"나쁜 새끼."
누나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애써 그 표정을 보지 않으려고는 했지만 목소리까지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걸로 봐서 어떤 얼굴일지는 굳이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게...."
남자가 울컥해서 누나에게 손을 뻗으려는 찰나 나는 먼저 나서서 그 팔을 잡아챘다.
"뭐야, 당신?"
그는 위협이라도 하려는 듯 험악하게 말을 뱉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같잖을 뿐이었다. 내가 비록 지금 몸 상태가 좀 개판이고, 백씨 성을 가진 어딘가의 무서운 여자에게 볼품없이 얻어맞는 신세이긴 하지만 그래도 눈 앞의 이런 쭉정이한테 밀릴 만큼 호구는 아니었다.
"방금 못 들었어요? 요새 만나는 사이라니까."
"......"
남자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심기가 뒤틀린건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남의 여자랑 놀아난 사람이 아주 당당하시군 그래."
"예전에 끝난 사이인것 같은데요."
"하하. 한 번 먹어보니 참 어지간히 좋았나본데, 그러다 좋은 꼴 못 볼테니까 처신이나 잘 하쇼."
순간 내 손아귀가 남자의 멱살을 쥐었다. 셔츠 위로 멱살이 잡힌 남자는 약간 당황한 듯 했지만 이죽거리는 비웃음은 여전히 잃지 않았다.
"왜? 한 대 치려고?"
마치 '치는 순간 넌 깽값이야' 라며 웃는 듯한 그 표정을 보니 옛날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이런 놈은 패고 나면 뒤끝이 있어서 진짜로 돈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놈에게 한번 기가 꺾이고 나면 주먹질을 하지 않고서는 말싸움만으로 이길 수가 없게 된다는 점이었다.
"못할 것 같냐?"
나는 존대를 버리고 손아귀에 힘을 주어 놈의 얼굴을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서로 키는 비슷했지만, 내가 힘주어 멱살을 쥔 손을 들어올리자 목이 꺾인 남자의 표정이 일순간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만해! 그러지 마."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순간 단비 누나가 재빨리 나를 제지하며 가로막고 나섰다.
"진정해. 응?"
당사자인 누나가 말리고 나서니 할 말이 없긴 했지만, 사실 기분은 좀체 풀리지 않아서 나는 멱살을 쥔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남자는 억지로 내 손을 탁 뿌리치더니 땅에 침을 한번 더 뱉고는 돌아섰다.
"잘들 노는구만."
이죽거리며 멀어져가는 남자의 뒷통수를 한 방 갈겨주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단비 누나가 계속 내 소매를 잡고 있었다. 사실 그것 때문에 못 친 건 아니고.... 그냥 깽값이 무서웠던게 맞다.
"화 풀어."
남자의 등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져 아예 사라지고나자 누나가 마치 아기라도 달래는 것처럼 내 등을 살살 쓸어내렸다. 생각해보니 내가 누나를 달래줘야 하는 상황 아닌가?
"누난 괜찮아요?"
"괜찮아."
하지만 돌아본 누나의 얼굴은.... 대답하고는 영 딴판이었다. 내가 물끄러미 누나의 얼굴을 계속 들여다보자 누나는 팔을 들어 소매로 눈가를 한번 슥 훔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안 괜찮아."
"저도 알아요."
"뭐하다가 이제 왔어?"
"네? 당연히 수업 듣다가...."
"누가 그걸 몰라? 주말 내내 안 보이더니, 어제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
그러고보니 어제 설미랑 갑작스럽게 술을 마시게 되느라 전화 한 통도 못하긴 했다. 맘 속에서는 그게 그렇게까지 의무적인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누나의 기분을 보아하니 쓸 데 없는 반박은 안 하는게 되려 나을 것 같아서 그냥 잠자코 있었다. 그러고보니 단비 누나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은, 그 때 그 잊지 못할 민망한 밤 이후로 처음이었다. 좀 어색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여 고개가 절로 수그러들었다.
"미안해요. 어제 일이 좀 있어서...."
"얼굴은 왜 그 모양이야?"
"네?"
뭐라도 묻었나 싶어 양쪽 볼을 이리저리 더듬었지만 그런건 아닌 듯 했다.
"왜 그렇게 헬쓱하냐고. 어디 아파?"
"네? 아하.... 어제 너무 과음을 했더니...."
죽기 직전까지 소주를 들이부었더니 역시 후유증이 크긴 큰가보다. 오죽하면 이런 말을 할까.
"연락도 없이 뭘 하나 했더니, 신나게 술이나 처마시고 계셨다?"
"그게... 신나는건 아니었는데...."
"됐어. 가자."
잠시 단비 누나의 팔에 이끌려가던 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멈추어섰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누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누나. 입구는 저쪽이잖아요."
"누가 들어가재?"
"네? 그럼요?"
뭔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함을 느꼈다. 식은땀이 흐르는걸 보니 100퍼센트 적중감의 불길함이다. 나는 뭔가 말하려 입을 열려고 했지만 누나가 내 등을 소리나게 퍽 하고 갈기며 재촉하자 아무 말도 못하고 거꾸러졌다.
"빨리 안 가고 뭐해!"
"....예."
세상에 태어나 죽기보다 술 마시기 싫은 날이 단 하루 있다면 바로 오늘이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어찌나 이리 잘 맞는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단비 누나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있었다. 그 모습이 어제의 나와 설미의 모습과 어찌나 똑같이 겹쳐지는지 마치 데자뷰를 겪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차이가 있다면, 어제는 소주병들이 늘어서 있었고, 지금은 주전자와 막걸리가 우리를 반기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누나.... 저 오늘은 술 못 마시는데."
"잠자코 비비기나 해. 2통 1반으로."
"그, 그게 뭐에요."
"그것도 몰라?"
누나는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손수 막걸리 2통과 사이다 1병을 주전자에 통째로 쏟아붓고는 젓가락으로 휘저으며 비비기 시작했다.
"이게 2통 1반이지."
"처음 듣는걸요."
"뭐라는 거야, 부산에선 다 그렇게 불러. 알았으면 부어봐."
자그마한 소주잔을 내밀던 설미의 모습과 둥그런 사발을 내미는 누나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나는 묵묵히 누나가 부어주는 그 혼합 막걸리를 사발에 받았다. 시끌벅적한 탁주집은 주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제의 고기집과 다를 바가 없이 붐비고 웅성거렸다. 어제는 소주에 오늘은 막걸리.... 내일은 백세주라도 마시려나?
꼴꼴꼴 소리와 함께 주전자에서 줄기차게 탁주가 쏟아져나왔다. 천만다행스럽게도 단비 누나는 나에게 술을 먹이기보단 자기 혼자 죽자고 사발을 들이켜대고 있었다. 그래도 가만히 보다보니 저렇게 마시다간 성한 꼴로 나갈 수 없겠다 싶어서 나는 적당히 제지하고 들었다.
"천천히 마셔요. 취하겠어요."
"뭐야? 몰라. 일단 한 잔 받아."
".....네."
사발을 부딪히고 서로 탁주를 비우고 나자 단비 누나는 잠시 눈을 감고 인상을 찡그리더니 입맛을 다셨다. 술맛을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아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기도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아주 이상한 질문을 내게 던져왔다.
"너 연애 많이 해봤어?"
"네?"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새삼 내가 여자를 몇 번 사귀었는지 세어보게 되었다. 하지만 세어볼 만큼 많지도 않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손가락을 접다 말았다.
"그, 글쎄요. 많이는 아니고... 한 몇 번...."
내가 그 대답을 하는 사이에 누나는 벌써 또 한 번 사발째로 잔을 비운 뒤였다. 좀 말려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누나는 너무 혼자 달리고 있었다.
"난 말이야.... 연애는 많이 해보는게 좋다고 생각해. 남자든, 여자든."
"왜요?"
"어차피 한번 사는 건데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만나보는게 좋잖아. 그렇다고 여자 바람둥이가 되고 싶다거나 어장관리를 하고 싶다는 뜻은 아냐. 난 그냥 다양한 연애를 해보고, 많은 사람을 겪어보고 싶어. 실제로 그런 사람이 배우자 잘 만나서 결혼해서도 잘 한다잖아?"
"뭐... 그건 그래요."
사람은 많이 만나보는 것이 좋다는 말에는 지극히 동감이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이 있는 만큼, 그 중에서 자신에게 정말로 잘 어울리는 상대를 찾기 위해서라도 이성 경험은 많을 수록 좋았다. 물론 그게 지극히 가벼운 만남으로 넘어가지 않는 선을 지키면서 말이다.
"그래도 사람 마음은 우스운 거야.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그런 생각은 온데간데 없고 그 사람 생각만 하게 되거든. 그래서 나는 연애를 하면서 내가 진심으로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좀 꺼려지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 나중에 상처 받을걸 아니까."
"누구나 다 그런 고민을 해요. 상처 받을걸 무서워해서 좋아하는 마음을 스스로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맞아. 그래서 난 매번 상처를 받아.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 다음에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길 원해. 정말 말도 안 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무섭고 꺼려지는 만큼, 또 행복하기도 하거든."
"그 마음 이해해요."
나는 누나의 말에 그대로 수긍해주는 것 말고는 해줄 말이 없었지만, 사실 누나도 내가 딱히 무슨 얘기를 해주길 바라는 것보단 그저 이렇게 맞장구를 치면서 들어주기만을 원하는 것 같았다. 말이 점점 더 길어졌고, 누나의 마시는 속도도 점점 더 빨라져갔다.
술을 마시고 싶은 상태가 아니었고, 실제로 마시지 않더라도 이미 반쯤은 취기가 오른 것 같은 누나는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간간히 잔을 부딪혀가며 같이 탁주를 마셔주었다. 누나의 기분이 지금 정말로 힘들어보였기 때문이었다. 가능하면 그 기분을 같이 좀 나누어주고 싶었다.
"많은 사랑을 해보고 싶어... 매번 최선을 다해서, 진심으로 말이야. 하지만 그러다보면 매순간 받는 상처가 너무 커... 이거 정말 얄궂은 일이라니까."
주전자가 몇 번이나 바뀌었다. 누나의 고향식 표현에 따르자면, 그... 2통 1반인지 뭔지를 수차례 말아먹고나자 누나는 물론이고 평소에 비하면 얼마 먹지도 않은 내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몸 상태도 상태이거니와, 원래 탁주가 잘 안 받는 체질인 탓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단비 누나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혼자서 폭음을 하듯이 들이붓던 누나는 벌써부터 머리가 어질어질한지 골머리를 감싸쥐고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여전히 사발을 쭉쭉 들이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놈은 정말 최악이었어! 진심을 쏟을 가치조차 없는...."
"천천히 마시래두요. 아까 그 사람이 예전에 말했던 그 전 남친이죠?"
"그래. 어쩌다가 그런 놈이랑 만났는진 몰라도... 평생 두고두고 후회할 만한 실수야. 틀림 없어...."
꽤나 취했는지 누나의 발음은 예전에 같이 기숙사 방에서 술을 마실 때만큼이나 옹알이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묘한 흥분이 오를 법도 했지만, 상황이 상황인만큼 나는 딴 생각 않고 묵묵히 누나의 얘기를 들어주는 데에 집중했다.
"가끔은 영 별로인 사람이랑 사귀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똥 밟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그럼... 똥 밟았지."
"아까 보니까 생긴 것만 멀쩡하지 순 성격 더럽던데요."
"맞아, 그렇고말고. 흐헤헤, 어쩜 그렇게 잘 알아?"
"......"
취하긴 취했나보다.
"근데 넌 여자친구 없어?"
"없어요."
"으음.... 좀 변태같이 생겼고 실제로 하는 짓도 변태인데다 여자도 많이 밝힐거 같이 생겼는데 왜 여자친구가 없을까?"
"......"
"그럼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어, 없어요."
순간 머릿 속으로 한 사람의 얼굴이, 이제는 좀 무섭게까지 느껴지는 그 무표정한 얼굴이 스쳐지나가긴 했지만 이 상황에서 굳이 그걸 밝히고 싶진 않았다.
"뭐야, 정말 인생이 삭막한 놈이잖아 이거."
"그, 그런거 아니에요."
"그런게 아니면?"
"그냥 여자에 관심이 없는 거죠."
"풋!"
사발째로 막걸리를 들이키던 누나가 별 웃긴 소리 다 듣겠다는 듯이 힘차게 물줄기를 뿜었다. 그 우렁찬 물줄기가 얼굴에 정통으로 꽂히자 나는 그만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졌다.
"그게 그렇게 웃겨요?"
언젠가 내가 운동시설에서 누나에게 차마 말하기도 민망한 실례를 저질렀던 그 잊지 못할 기억 이후로, 이렇게까지 박장대소하는 누나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 시끌벅적한 탁주집의 소음 속에서도 뚜렷이 울릴 만큼 대차게 웃어제끼는 누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거의 그 때만큼이나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너 정말 거짓말 잘 한다!"
"거, 거짓말이라니요.... 사람을 뭘로 보고."
"푸하핫, 그럼 여자에 관심 없다는 애가 그런 짓은 왜 했어?"
"예? 그런 짓이라니요?"
단비 누나는 양손으로 꼭 쥐고 있었던 사발을 탁자에 덜그럭 내려놓고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 자세에서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누나가 한자 한자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 자고 있을 때 무슨 짓 했는지 잊은건 아닐 텐데."
"......."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던 내 움직임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설마 여기서 그걸 끄집어낼 줄이야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무, 무슨 말이에요 그게...."
너무 당황해도 나도 모르게 발뺌을 하고 말았지만 씨도 안 먹힐 짓이라는 걸 나도 알고 누나도 알고 있었다.
"시치미 떼시겠다?"
장난스러운 말투가 온데간데 없고 순식간에 누나의 말투가 위협적으로 변했다. 물론 그 찡그린 인상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귀엽기만 했지만, 누나가 정말로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조금 움츠러 들었다.
"잘못 했으면 그냥 잘못 했다고 해! 사내자식이 발뺌이나 하고 말야."
"죄, 죄송해요. 사실 누나 말이 맞아요."
그 박력에 못 이겨 내가 더듬거리자 누나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다시금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화를 냈던 것이 연기였음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핫... 그래서?"
"네, 네?"
"미안하다면 끝이야?"
"으...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하는 거 봐서 결정하지 뭐. 일단 오늘 이거 니가 사."
"으윽. 알았어요...."
마신 양을 보아하니 이것도 한두푼이 아닐 텐데.... 그러고보니 어제 술 내기도 결국 내가 냈지. 요새 내 인생이 왜 이래? 흑흑... 젠장.
하지만 이 정도로 쌤쌤칠 수 있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사실 성추행으로 고소를 먹어도 할 말 없는 일인데. 단비 누나라서 이 정도로 넘어가주는 거라고 하면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솔직히 덧붙이자면 이런 미인의 몸을 더듬은 댓가로 겨우 술 한 번 사는 거라면야 또 만지고 싶은 용의도 있다는건 물론 비밀이고....
"그래서 왜 만졌어?"
"풋!"
이어진 단비 누나의 당돌한 질문에 이번엔 내가 술을 뿜었다. 그 물줄기는 누나의 얼굴에 날아가 호쾌하게 복수를 이루었다.... 면 정말 큰일날 뻔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빗나가 주었다.
"무, 무슨 말이에요."
"아니, 왜 만졌냐니까? 여기저기 참 노골적으로 더듬던데. 왜 그랬는지 이유나 좀 들으려고."
"그걸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응. 그래도 본인 입으로 듣는게 재밌잖아."
"......"
나는 이미 빠져나갈 구멍이 없음을 깨달았다. 순순히 인정해버리는게 오히려 나을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도 되는 거에요?"
"그럼 안 솔직하게 말할 거야?"
"누나가 너무 예쁘니까 그랬죠."
"어쭈, 꼴랑 아부로 넘어가시겠다?"
"아부가 아니구요. 사실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누나 잘못도 있어요."
"뭐야?"
"누나 같은 여자가 같은 방 침대에서 자고 있는데, 안 건드리고 넘어갈 남자 몇이나 될 것 같아요? 난 정상적인 남자라서 못 참았던 것 뿐이에요."
이쯤되면 나도 거의 배 째라 식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거 오히려 뻔뻔하게 나가보자는 생각이 가장 컸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 편이 오히려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도 한 몫했다.
"허허, 내 살다살다 이런 적반하장은 처음이야."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에요. 누나가 그만큼 예쁘고 매력이 있다는 거니까."
어이가 없는 와중에도 아부 한 마디를 덧붙이니 누나가 허탈하게 픽 웃고 말았다.
"예쁘면 입술을 덮치거나 해야 되는거 아니야? 왜 몸을 더듬고 그래?"
"그, 그게.... 몸도 예쁘니까요."
궁색한 내 변명에 누나가 다행히도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참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우습게도 적잖이 안심이 되는 와중에 한편으론 묘하게 흥분도 되었다. 그 날밤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도 있었지만, 누나 쪽에서 이 화제를 먼저 끄집어내었다는 것이 묘하게 선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아하하하.... 하하핫.... 좋아.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용서해줄게."
"넘어가주는 거에요?"
"일단은 뭐.... 괘씸하긴 했지만 나름 기특했던 것도 있으니까. 개한테 물렸다 셈치지 뭐."
"기특했던 거라뇨?"
"그래도 결국 알아서 그만두고 혼자 해결했잖아."
잠시 동안의 고민 끝에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나는 얼굴을 벌겋게 붉혔다. 취기로 얼굴이 이미 달아올라 있었던 것이 그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혼자 안 했거든요!"
"파하하하하."
가만 놔두면 거의 바닥이라도 데굴데굴 구를 기세였다. 뭔가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 쩌렁쩌렁한 웃음소리 때문에 술집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음을 깨닫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한참이 지나고 누나가 겨우 조용해지자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누나."
"......."
"......누나?"
"......."
한참을 웃다 말고 벽에 머리를 기댄채 갑자기 조용해진 단비 누나를 재차 불러보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서 떠들다말고 갑자기 잠들어버리는 누나의 이 술버릇을 예전에도 겪어본 적이 있는 나는 불현듯 불안한 기분을 느끼고 손을 뻗어 누나의 어깨를 툭툭 건드려보았다.
"혹시.... 또 자는 건 아니죠?"
"......"
역시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기적적으로 딱 천원짜리 두 장을 남기고 아슬아슬하게 술값을 내고나자 나는 허탈함에 빠졌다. 이 돈으로는 요즘 세상에 택시도 탈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술에 취한 단비 누나를 업고 비척비척 휘청거리며 기숙사로 향해야만 했다. 예전에는 그리 무겁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업어보니 술에 취해서 그런가.... 은근히 무겁다.
"으음.... 변태자식.... 그래.... 기특해.... 음냐...."
"......"
술에 취한 여인을 업고가는 이 상황이 보기에 따라선 행복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여러가지 의미에서 그리 썩 좋지만은 않았다. 일단 자꾸만 등에 전해지는 풍만하고 뭉클한 감촉을 견뎌내는 것이 정말.... 여러 모로 힘들었다. 하기사 이렇게 풍만한 몸매를 하고서 마냥 가벼울 수만은 없겠지....
"누나, 오늘 왜 이렇게 무거워요?"
"......음냐."
대답을 할 리가 없는 누나가 괜스리 밉살스러워보였다.
"어휴... 오늘 누나 기분 안 좋은 일 있으니까 내가 한 번 참는 거에요. 알겠어요?"
".....드르렁....."
얼씨구, 코까지....
"진짜 궁금한거 있는데 물어봐도 괜찮아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알고서 던진 질문이니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쓰리사이즈가 몇이에요? 가슴이랑 엉덩이가 너무 크니까 이렇게 무겁지...."
"......"
야한 농담도 상대가 받아줘야 재밌는 법인데 대답이 없으니 그저 그렇기만 했다. 하지만 대신 손과 등이 호강을 누리고 있으니 그리 상관은 없었다. 물론 팔은 아팠지만....
가뜩이나 내 몸 가누기도 힘든 상태에서, 무사히 누나를 기숙사 앞까지 운반(?)하는 일에 성공하자 나는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어서 잠시 혼자 뿌듯해 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직면하여 나는 꼼짝없이 얼어붙어야 했다.
"그러고보니...."
그러고보니 누나가 깨지 않으면 누나를 방에 넣어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성간의 호실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고, 아무리 단비 누나가 예전에 몰래 내 방에 숨어들어온 적이 있다지만, 내가 술에 취한 누나를 업고 여자 기숙사층의 엘리베이터를 탄다는 것은 위험도면에서 차원이 전혀 다른 얘기였다.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누나는 내 방의 위치를 알겠지만 나는 누나의 호실 번호를 모른다는 거였다.
"제, 젠장."
결국 나는 바깥 벤치에 누나를 앉히고 잠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괜히 누나를 업고 로비까지 들어가게 된다면 수위아저씨나 사감의 눈에 띄일 위험만 커지는 거였다. 여기서 잠시 누나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마땅한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누나, 좀 일어나봐요."
"으음.... 5분만...."
"5분만이 아니라, 누나방이 몇호실이에요. 그것만 말해봐요."
"음냐.... 통닭 사줘...."
"..... 젠장."
우리 기숙사도 다른 기숙사처럼 룸메이트니 뭐니 하는 그런게 있었다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편했을 거야.... 평소에는 1인실 체제가 유일하게 맘에 드는 구석이었는데, 지금은 이게 그렇게나 짜증날 수 없었다.
딱 하나 남은 방법은 누나를 내 방에 몰래 데려가는 것이었지만, 이것도 썩 내키는 방법은 아니었다. 일단 위험하기로 따지면 그거나 이거나 마찬가지였는데다, 일단 누나를 방에 데려다놨다간.... 그 때처럼 참지 못하고 실수하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이렇든 저렇든 여러가지 의미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에요?"
"......"
잠든 여인은 답이 없었다.
"......"
나는 잠시 말없이 곤히 잠든 누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취기가 가시지 않아서 빨개진 얼굴로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고 있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영락없이 곯아떨어진 모습이었다. 업고 올 때는 힘들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나란히 벤치에 앉아 있으니 묘하게 흥분이 되었다.
"진짜 자요?"
나는 잠든 누나의 볼을 건드려보고, 옆구리를 찔러보고, 심지어 가슴도 살짝 건드려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절로 지난 번의 기억이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누나 또 자는 척만 하고 있는거 아니에요?"
솔직히 단비 누나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사실 지난 번에도 정말 자는 줄 알고 그랬던 건데.... 이번에도 안 그럴 거란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왠지 마음 속에서는 다른 목소리도 생겼다. 누나가 일부러 자고 있는 척 하는 거라면, 사실 그래도 별 상관은 없는거 아닌가....?
'개한테 물렸다 셈치지 뭐.'
문득 누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다시 눈앞의 잠든 얼굴을 보았다. 어두운 가로등 조명 아래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입술에 시선이 머물렀다.
'예쁘면 입술을 덮치거나 해야 되는거 아니야?'
과연 그 말대로였다. 그 때는 왜 몸부터 더듬었을까...? 잘 안보여서 그랬나?
"그럼 누나 말대로 할 테니까, 한 번 더 물렸다 셈쳐요."
나는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뱉는 누나의 입술에, 내 입술을 천천히 가져다 댔다. 닿지 않을 것 같은 점근선이 사라지고, 이내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 끝에 닿았다. 촉촉한 것 같기도 하고, 축축한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나는 그 상태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렇게 1초, 2초, 3초.... 그리고 입술을 떼었다.
"......"
누나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정말로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 때에도 물론 확신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속은 거라고 보면 할 말은 없었지만, 어찌되었든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금은 깨어있는 편이 오히려 더 좋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깨어있으면서도 가만히 있어주는 편이 더 좋은 뜻이었으니.
"내가 이렇다는거 이미 알고 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유혹하면 어쩌란 건지...."
나는 잠시 누나를 내버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였다. 하지만 그 망설임은 너무나도 부질 없었다. 짧았는지 길었는지 모를 망설임 끝에 다시 자리에 앉은 나는, 나도 모를 만큼 순식간에 누나의 입술을 다시 덮쳤다. 잠깐 입술만 붙였다 떼었던 방금 전과는 달리, 혀를 내밀어 입술 안쪽부터 서서히 핥아나갔다.
잠결에 헤 벌어져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혀의 움직임을 느낀 것인지 단비 누나의 아랫니가 살짝 열리며 입 안쪽으로 혀가 조금씩 움직여 들어갔다. 그 때까지만 해도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두 목소리가 싸우고 있었다. 힘든 일로 술에 취해있는 여자를 상대로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그 목소리는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혀와 혀가 서로 엉키는 순간,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희미해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누나 잘못도 조금쯤은.... 있는 거였다.
"으음...."
잠꼬대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묘한 소리가 맞은편 혀 안 쪽에서 흘러나왔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나는 거의 일방적인 움직임으로 단비 누나의 매끄러운 혀를 얽어갔다. 누나의 움직임이 거의 없다보니 타액이 뒤엉키지는 않고 그저 내가 누나의 입술을 빨아대는 질척한 소리만 울렸다.
아무리 밤이 늦어서 인적이 뜸하다고는 해도, 바깥 벤치에서 잠든 누나를 덮치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취기가 그 때보다 더 많이 올랐기 때문일까? 나는 오히려 불과 몇 일 전의 그 날 밤보다도 더 대담해지고, 더 무모해져있었다.
- 야옹....
지나가던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놀라 도둑이 제발 저린 나는 황급히 입술을 떼었다. 일방적으로 얽혀있던 혀는 서로 떨어졌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나의 옷자락 안쪽으로 파고든 손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오른손이 누나의 도톰한 실크 브래지어 위를 더듬고 있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처음 만져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 때엔 손길이 이 정도로까지 노골적이지는 않았다.
고양이는 마치 나무라듯이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 눈길이 왠지 평소 때의 단비 누나와 그렇게 똑같아 보일 수가 없어서, 나는 괜스레 죄 지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나, 안 자고 있죠?"
"......"
"대답 안 하면 여기서 벗길 거에요."
".....니가 만져서 깬 거야."
퉁명스런 목소리와 함께 닫혀 있던 눈꺼풀이 열렸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생각보다 그리 당황스럽지 않았다.
"사실 깨라고 만진 거에요."
"....흥."
부루퉁한 목소리가 왠지 귀여워 나는 속옷 위로 가슴을 한번 더 주물렀다. 그러자 단비 누나가 얼른 치우라는 듯이 옷 위로 안쪽에 있는 내 손을 탁 하고 때렸다.
"강간도 모자라서 야외플레이라니.... 넌 정말 최악이구나."
"뭘 얼마나 했다고 벌써부터 강간이에요."
"까딱하면 하려고 했잖아?"
"그래서 허락맡고 하려고 깨웠잖아요."
"어휴... 말은 참 잘해요."
"개한테 물렸다 셈 쳐요."
뻔뻔스러운 내 낯짝을 잠시 흘겨보던 단비 누나가 다시 한번 가슴 봉우리 위에 얹혀 있는 손등을 찰싹 때렸다.
"어쨌든 이 무례한 손 좀 어떻게 해줄래?"
"키스 한 번 더 하면 치울게요."
"이게 정말 누나 무서운 줄 모르고.... 흡."
나는 더 기다릴 것도 없이 누나의 입술 위를 다시 덮었다. 입술과 입술이 만나고, 혀와 혀가 엉키었다. 나는 혀 끝으로 단비 누나의 혀 끝을 자꾸만 건드렸다. 일종의 노크같은 거였다. 입이 더 크게 열리고, 맞은편의 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액이 뒤엉키고 있었다.
암만 생각해도 이번엔 그리 실패한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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