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그녀들의 마음은 ? - 11부
감동넘치는 로맨스 명작
그녀들의 마음은 ? - 11부
'여기가.... 어디다냐.'
눈이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지만 나는 이곳이 내 기숙사 호실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기숙사 침대는 이렇게 널찍하고 탁 트인 더블베드가 아니라 그저 좁디 좁은 느낌의 초라한 1인용 침대였으므로.... 게다가 시트나 매트도 이런 고급스런 재질이 아니었다.
"젠장."
눈을 뜨자마자 입에서는 난데없는 욕지거리부터 흘러나왔다. 산산조각이라도 낼 것처럼 머리를 옥죄어오는 무시무시한 두통 때문이었다. 나는 양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으며 잠깐 동안 그 이질적인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다시피 몸부림쳤다.
"으으...."
속은 울렁거리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하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비척비척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부터 우선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먼저 어젯밤에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곰곰히 돌이켜보았다.
'분명히 나는.... 설미랑 술을 마시다가....'
술을 마시다가....
'그래, 술을 마시다가....'
그래, 술을 마시다가....
'그러니까 술을 마시다가.... 뭐야, 왜 기억이 없지?'
깨질 것 같은 골머리를 부여잡고 어젯밤의 일을 어떻게든 떠올려 보려고 애썼지만, 그렇다고 끊어진 필름이 재생될 리는 당연히 없다.
'피, 필름이 끊겼나....?'
말도 안 돼! 하지만 그게 아니고서야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이 사태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지금 기억나는 거라고는 오로지 소주, 소주, 소주....
"우욱...!"
소주 생각을 하니 구토가 치밀어 오른다. 당장이라도 토할 수 있을 것 같아. 제길, 어디 변기 같은거 없나? 하다 못해 비닐봉지라도.... 아니, 그 이전에 대체 여기는 어디야?
"......"
나는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방바닥을 딛고 섰다. 어디인지 도통 짐작을 할 수 없는 이 방은 한눈에 보기에도 무척이나 넓었다. 설마설마 하는 생각에 혹시 여기가 모텔인가 하는 추측을 해보았지만 고풍스런 방의 느낌을 보아하니 암만봐도 그런건 아닌 것 같고, 우선은 여기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철컥.
마냥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바보같이 입이 헤 벌어졌다. 누구의 집인지도 모를 낯선 장소의 이질적인 풍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한 몫 하긴 했지만, 사실 그보다는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넓고 으리으리한, 마치 드라마에서나 보던 궁궐같은 집의 모습이 떡하니 눈 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아, 아직 꿈이 덜 깼나...?'
복층 구조로 되어있는 실내의 모습은 거의 운동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넓었다. 나무 난간 너머로 아랫층이 내려다보이는 걸로 봐서 이곳은 아마 2층인 듯 했다. 디귿(ㄷ)자 형태로 이어져있는 2층 복도를 따라서 차마 셀 수도 없이 많은 방들이 죽 이어져 있었고, 아랫층은 거의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사방이 탁 트여 있었다.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장관 앞에 어안이 벙벙해져 입을 쩍 벌리고 있으려니 오바이트 욕구가 더욱 심해지는 듯 해서 나는 우선 벌어진 입을 꾹 다물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내 평생 이런 집을 어디서 봤더라....? 나홀로집에? 리치리치?
술을 마시다가 어느 순간 기억이 뚝 끊어졌는데, 눈을 떠보니 다음날 아침 내 방 침대 위에 있더라~ 하는 식의 이야기는 꽤 자주 들어본 적이 있다지만, 살다살다 필름 끊기고 다음날 눈 떠보니 도통 어딘지 알 수도 없는 집에서.... 그것도 이렇게 으리으리한 대궐같은 집 안에 있더라~ 하는 얘기는 겪어본 적도 없고 어디서 들어본 적도 없었다.
순간 '여기 아무도 없어요?' 라고 소리칠 뻔 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무슨 조난 당한 것도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외쳤다가 누군가 정말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엄청나게 쪽팔릴 것 같아서였다. 우선 좀 둘러보고 판단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복도에서 아랫층으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을 밟고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도둑놈도 아닌데 왜 살금살금 걷고 있는거지...?'
간신히 아래로 내려왔지만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것은 둘째치고 하도 넓다 보니까 어디로 가야 사람이 나올지, 심지어는 나가는 곳이 어디인지조차도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당장에라도 토할 것 같은데, 낯선 곳 한복판에 서 있자니 울렁증까지 도지는 듯 하여 속에서 갑자기 뭔가가 격하게 역류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욱...!"
그야말로 일보직전이었다. 나는 일단 화장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문으로 보이는 문은 모두 닥치는대로 열어보기 시작했다. 남의 집 안을 이렇게 함부로 헤치고 다니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지만 상황이 너무나도 급박하여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집이 워낙 쓸데없이 크다보니까 심지어는 화장실 하나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으악....! 대체 어디야?'
- 철컥.
여기는 그냥 방이었다. 화장실이 아니라.
- 철컥.
여기도 그냥 방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방.
- 철컥.
여기도 그냥 방이었다. 역시 아무 것도 없는 방.
'젠장! 아무 것도 없는 방이 왜 이리 많아?'
사람은커녕 말그대로 가구 하나조차 없는 을씨년스러운 방들이 연속해서 줄줄이 이어져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뛰어다니며 찾아보고 싶었지만 조금이라도 격하게 움직였다간 지금 참고 있는 것들이 곧바로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아서 나는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채 계속해서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려는 내용물(?)들을 삼키는 수밖엔 없었다.
- 철컥.
여기도 그냥 방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의 방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방에는 그래도 가구가 있다는 점이었다. 넓은 침대도 있고, 책상도 있고, 옷장도 있고.... 하지만 지금 이게 중요한게 아니다.
- 철컥.
"꺄아악!"
여기는 그냥 방이 아니었다. 왜나하면 여자 비명소리가 나오는 방이었으므로. 호오.... 신기하군. 여자 비명소리가 나오는 방이라.... 하지만 지금 이것도 중요한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건 화장실이니까.
'......?'
이게 아닌 것 같은데?
여태까지처럼 또 방문을 기계적으로 닫고 다음 방을 열어보기 위해 가던 도중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자 비명소리라고?
- 철컥.
나는 방금 전에 열어보았던 방문을 조심스럽게 다시 열었다.
"꺄아아악!"
한층 더 톤이 올라간 비명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 방 안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노란색 조명과 코팅된 바닥 타일이 보인다. 그리고 세면대와 선반, 변기와 욕조, 욕조 속의 한 여자도 보인다. 하하, 변기가 있는걸 보니 여기가 화장실이었군. 난 그것도 모르고 하마터면 다른 방으로 갈 뻔 했네.
'......'
욕조 속의 한 여자?
"으하악!"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놀랐다고한들 그 여자만큼 놀랐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욕조 안에 서서 손으로 알몸을 가린채 울상이 되어 이쪽을 보고 있는 그 여자는 이제 아예 목이 터져라 있는 힘껏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여자가 들고 있었던 샤워기가 대리석 욕조 바닥에 그대로 힘없이 떨어져 쿵 하는 천둥같은 소리를 한차례 울렸다.
"꺄아아아악!"
"으아아악! 죄, 죄송해요!"
이 초유의 사태에 멘탈붕괴를 일으킨 내가 어떻게든 사과를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게 실수였다. 입을 열자마자 그동안 입을 꾹 막으면서 참고 있었던 구역질이 어떻게 수습해볼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머리로 생각하고 말고를 떠나서 내 몸은 거의 로봇처럼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나는 번개같은 움직임으로 세면대 옆에 놓인 좌변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변기 뚜껑을 위로 올렸다. 그리고는....
"우웨에엑!"
내가 안주는 하나도 안처먹고 소주만 디립다 마셨나....? 밖으로 나오는 거라고는 술과 위산 뿐이로다. 안주는 이미 안에서 다 소화되고, 술은 간이 미처 분해를 다 못해서 밖으로 튀어나오는 거란 사실을 알 턱이 없는 나는 마냥 그렇게만 생각할 뿐이었다. 아아.... 어쨌든 속이 존나게 아프다....
"웨엑... 우웨엑..."
한번의 큰 파도(?)가 지나가고나서도 속에 남은 알콜의 찌꺼기들이 끝도 없이 치밀어오라서 나는 거의 위장 자체를 토해내는 기분으로 한참동안 변기 앞에 앉아있었다. 내가 어제 마셨던 그 끔찍했던 소주들과 불과 하루만에 재회하는 뜻 깊은 시간을 보내면서....
"흑... 흑흑... 흐흑.... 저, 저기요...."
신나게 내용물을 확인하는 그 격한 작업에 열중하다보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아서 순간 모든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울먹이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변기 속에 토하다말고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차마 고개를 위로 들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도 입에서 어제 마셨던 이슬방울들이 주륵주륵....
"흑흑.... 흑.... 괘, 괜찮으세요....? 흑흑...."
누군지도 모를 그 여자는 거의 펑펑 우는 와중에도 내가 괜찮은지를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어떻게든 뭐라고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사람의 입은 한번에 두 가지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닌 듯 했다.
"우웩! 웨엑!"
"흑.... 흐흑.... 등 두드려.... 흑흑.... 드려요? 히끅...."
"......"
흐느끼는 목소리로 저런 말을 하니까 어쩐지 굉장히 그로테스크한 기분이 든다. 나는 차마 말은 못하겠고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만들어서 흔들어보였고 그 여자는 이내 자그마한 손으로 조심스럽게 등을 퍽퍽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온 몸의 장기 전체가 입으로 튀어나오는 아주 판타스틱한 기분을 느끼며 한동안 오바이트에 열중하다보니 간신히 어느정도 속이 잠잠해졌다.
"하아아...."
마침내 토악질이 멎어들자 나는 온몸에 힘이 쫙 빠져서 그대로 변기 속에 엎어질 뻔 했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을 뻗어 변기물을 내리려했지만 등 뒤에 서있었던 여자가 먼저 팔을 내밀어 대신 내려주었다. 그 배려가 너무나도 고맙게 느껴져 뭐라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이제보니 그 여자는 아직도 서럽게 펑펑 울고 있었다.
"흑... 흑흑... 그러게... 적당히 드시지 그러셨어요.... 흑흑... 히끅..."
"......"
알았으니 울지 좀 마요.... 정신 사납잖아요.
나는 오바이트의 후유증으로 잘 보이지 않는 눈을 힘겹게 들어 그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두 눈망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너무나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익숙한 얼굴이었다.
'설미....?'
하지만 속마음과는 달리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왜 우세요?"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멍청한 말. 하지만 말을 해놓고 보니 왠지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잘은 기억 안 나지만 이것과 비슷한 상황이 예전에도 한 번 있었지 않나....?
"그.... 그거야.... 갑자기 들어오시니까.... 너무 놀라서.... 흑흑...."
이제보니 그녀는 어느새 급한대로 커다란 타올 한장을 몸에 두른채 엉거주춤하게 서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건 한 장으로 몸 전체를 가릴 수는 없는 것이라서, 가슴부터 아랫도리까지만 아슬아슬하게 가린 상태였고 새하얀 어깨와 두 다리의 속살은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어찌나 놀라서 몸을 제대로 닦을 시간도 없었는지 겉으로 보이는 매끈한 피부 곳곳에는 아직도 물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상태였고, 젖은 머리카락에서도 물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욕조 안에 떨어뜨린 샤워기를 미처 잠글 생각도 못했는지 욕조 안에서는 샤워기에서 나온 물줄기가 거꾸로 솟구쳐 거의 분수대를 이루었다. 허공으로 뿜어지는 힘찬 물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순간 '아, 여긴 아직 꿈속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눈은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알몸을 모두 숨기기에는 수건 한장이란 참으로 작고 초라한 역할밖에 하지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 얇은 타올 한장은 새하얀 두 가슴의 봉긋한 굴곡을 미처 가려주지도 못했고, 매끈하게 뻗은 허벅지도 절반을 가리는 것조차 힘에 버거워 보였다. 그리고 그 밑으로 고스란히 적나라하게 드러난 늘씬한 두 다리를 보고 있자니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게 마른침이 넘어간다. 제길.... 목구멍에 걸려있었던 토사물의 비릿한 맛이 느껴져.
자고로 여자가 가장 아름다워 보일 때가 샤워하고 난 직후라고들 하는데, 온몸이 물에 젖어 아슬아슬하게 수건 한 장만으로 알몸을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보니 나는 지금의 상황도 순간 잊고 그녀를 덮치고 싶은 아찔한 욕망을 느꼈다. 아마 지금 몸 상태가 조금만 더 정상이었어도 하마터면 오늘 강간범이 되지 않았을까....?
"꺄아악! 보지 마세요!"
"으아아.... 죄, 죄송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창백하게 질려있었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잽싸게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아쉬운 마음도 살짝 들었다.
나는 어쩐지 말하지 않아도 이 여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누군가와 거의 똑같은 얼굴을 가진.... 그러면서도 성격은 전혀 다르고,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 두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두 번 다 우는 얼굴로 헤어졌던 그녀.
"저기... 혹시...."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내가 더듬더듬 입을 떼려던 찰나 퉁명스런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나지막하게 날아왔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유도 모른채 심장이 정지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있었던 두 차례의 레퍼토리가 마치 주마등처럼 생생하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누군가가 울고나면 꼭 나타나는 또다른 누군가가 있었으니....
"설미....?"
"언니....?"
우리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한몸처럼 뒤를 돌아다 보았고, 그곳에는 아니나 다를까 냉기를 풀풀 풍기는 차가운 인상의 아름다운 여인이 문간에 서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처음에는 시큰둥하기 그지 없는 무미건조한 표정이었지만, 눈가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혀있는.... 게다가 심지어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훌쩍이고 있는 동생의 모습을 본 순간 눈가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돌았다.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 전개는 아니겠지.'
우연도 세 번이면 필연이라고 했는데 설마 그럴려구....
"너.... 내 동생한테...."
"으아악!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나의 결백(?)을 입증시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거의 나를 죽일 듯한 기세로 덤벼드는 설미를 피해서 내가 운동장 같은 집 안을 이리저리 도망다니고, 알몸에 수건 한 장 두른 그녀의 동생이 쫓아다니며 그녀의 언니를 뜯어말리고, 덕분에 도망다니는 와중에도 나는 눈요기하고.... (?) 어쨌든 그런 일련의 해프닝이 한차례 지나간 후에야 나는 생명의 안전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저기.... 정말 죄송해요."
"흑흑.... 아니에요.... 훌쩍...."
거실....로 추정되는 널찍한 공간에 마주 앉은 우리는 그 험악하고 어색한 침묵 속에서 잠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설미의 동생, 설희는 끝도 없이 정말 잘도 울어댔다. 그녀는 어느새 급한대로 간단히 옷을 걸쳐입은 상태였지만, 그렇다고해서 아까 전의 그 충격적인 일이 뇌리에서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여전히 구슬프게 훌쩍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설미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어서 나로서는 심장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넌 외간 남자가 집에 자빠져있는데 왜 샤워 같은걸 하고 그래? 애가 생각 없이."
설미가 앙칼진 목소리로 설희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녀가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굉장히 신기한 기분도 들었지만, 이미 어젯밤에 더욱 굉장한 모습을 보았기에 생각보다 그리 놀랍진 않았다.
"흑흑.... 그래도.... 언니랑 술 마셨다고 하니까.... 하루이틀은 못 깰 줄 알고.... 흑흑...."
"......"
차마 할 말이 없어진 우리는 무안한 표정으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하기사 나도 내가 이렇게 일어났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을 정도니.... 아마 내 몸이 위기감을 느끼고 오바이트나 하라는 뜻에서 억지로 나를 깨운 것이 아니었을까?
"훌쩍.... 제가 너무 부주의했어요.... 손님도 계신데... 훌쩍.... 죄송해요...."
"아, 아니요.... 제가 더 죄송한 걸요."
서럽게 훌쩍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까의 장면들이 떠올라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순진하고 예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가슴의 볼륨과 하얗고 매끈하게 쭉 뻗은 두 다리.... 아아, 더 자세히 보지 못한게 정말 평생의 한으로 남을 것 같다.
"내 동생 가지고 이상한 생각하면 죽어."
"......"
정말 여자들은 귀신같은 구석이 있다니까.
"저, 저는.... 잠시 방에 좀 갔다 올게요."
설희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피해서 많고 많은 방들 중 어떤 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러고보니 저 방은 아까 내가 화장실 찾다가 봤던 그 방인 것 같은데.... 이제보니 문 장식이 유난히 아기자기하군.
"......"
"......"
설미와 단 둘이 남으니 정말 괴롭고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무슨 말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천만다행스럽게도 먼저 입을 뗀 것은 그녀였다. 하지만 그 첫마디가 사람 신경을 건드렸다는게 문제였다.
"약골."
"어?"
"비리비리하더군."
"우, 웃기지 마! 내가 비리비리하다니? 네가 사람이 아닌 거지!"
"흥."
설미는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심히 억울해진 나는 따지고 들기 시작했다.
"언제는 나보고 잘 마신다며?"
"기억 안 나."
"근성 있다며?"
"글쎄."
"맘에 든다며?"
"......"
설미의 표정이 한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더니 만년한설처럼 차가운 얼굴로 내게 나지막히 말했다.
"쓸데 없는거 기억하지 마. 죽어."
"......"
뭐 내가 말만 하면 죽이냐?
"흠, 흠.... 여, 여기 너네 집이야?"
말을 돌리려고 그렇게 묻긴 했지만 사실 나는 물어볼 필요도 없이 확신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달리 어디겠는가? 하지만 뒤이어 나온 그녀의 대답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아니."
"엥? 그, 그럼 여긴 어디야?"
"여긴 우리 엄마집."
"......"
그게 그거 아닌가?
"난 잠깐 얹혀사는 것 뿐이고."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농담이나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뜻일까?
"집이 엄청 넓은데.... 너 되게 잘 사는구나."
"......"
설미는 더 얘기하기 싫다는듯이 다시 입을 꼭 다물고 평소의 그 묵묵부답 상태로 돌아가버렸다. 그러자 넓찍한 거실에는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깔리기 시작했다. 나는 뭔가 말실수라도 한건가 싶어 속으로 초조해하며 그녀의 눈치만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그러는 사이에 설미의 동생이 다시 밖으로 나왔다.
"......?"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본 설희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쟁반에 머그컵 세 잔과 과일 같은 것들을 한가득 채워서 나타났다.
"이, 이거 좀 드세요."
"고, 고마워요."
어쩜 이렇게 자매가 성격이 다를 수 있을까? 문득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리며 얼굴을 붉혔다. 아마 이건 평생가도 못 잊을 만큼 충격적인 경험으로 기억 속에 남을 것 같다. 그리고 보아하니 그녀 역시도 나하고 거의 비슷한 생각인 듯 했다.
어디서 굴러먹던지도 모를 외간 남자가 샤워하는 도중에 갑자기 기어들어와서는 알몸을 보고 그것도 모자라 변기에 구토까지 하는데, 화 한 번 내지 않고 오히려 등까지 두드려주는 맘씨 넓은 여자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아마 없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서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거였다.
예전에는 그녀의 순하고 답답한 성격이 못마땅했는데, 지금은 그 천사같은 마음씨가 너무나도 고마워서 눈물이 줄줄 흐를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런 해프닝이 일어난게 동생쪽이었기에 망정이지 혹시라도 만약 그게 설미였다면.... 뒤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음.... 하지만 어쩌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또 좋을지도....'
설마 진짜로 죽이기야 하겠어? 근데 왜 진짜로 죽일 것 같을까. 실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설미가 동생의 차림새를 이리저리 훑어보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화장은 왜 했어?"
"으응?"
"옷도 차려 입었네."
"그, 그냥...."
옅게 화장을 하고 청초한 느낌의 원피스를 입은 설미 동생의 모습을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라서 그런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미를 빼다 박은 듯한 얼굴을 하고서 저런 차림을 하고 있으니 마치 설미의 색다른 매력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듯 했다.
"언닌 아침부터 어디 갔다 오는거야?"
"오토바이 찾으러."
"뭐?"
"어제 택시 타고 오느라고 오토바이 세워놓고 왔잖아."
"언니 또 오토바이 탔어?"
"왜?"
"타지 말랬잖아."
"오늘부터 안 탈게."
"자꾸 그러면 진짜 혼난다."
"알았어."
그 순박한 성격과 얼굴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게도, 두 주먹을 꼭 쥐어보이며 으름장을 놓는 동생의 모습을 보니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지만, 그런 깜찍한 협박에 그 살벌한 성격의 설미가 숙이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시계를 확인해보니 벌써 열두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월요일은 열시 수업이 있는 날인데.... 이런 식으로 나도 모르게 빼먹고 말다니. 흑흑, 그놈의 술이 정말 사람 하나 제대로 말아먹는구나.
"그, 그럼 난 이만 가볼게."
하룻밤 신세 졌으니 이제 그만 깔끔하게 사라져주는 일만 남았다. 여자들만 사는 집에 오래 앉아 있는 것도 그다지 예의가 아닌 것 같으니.... 아무튼 정말 잊지 못할 신선한 경험이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넓은 집에 정말 이 두 자매 말고는 아무도 없는 건가? 아까보니까 가구 하나 없는 텅 빈 방들도 무지하게 많던데.
"잠시 기다려."
"왜?"
"학교 가야 돼."
설미는 그 말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 추측컨대 이 넓은 집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듯 했다. 저 멀리서 그녀가 문 하나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한 집안에서 이렇게까지 원근감을 느끼게 되다니....
"언니가 저런 말을 하는건 '같이 가자' 라는 뜻이에요."
"......"
설희의 해석 아닌 해석이 이어지자 나는 그게 정말 그런 뜻인가 싶어 얼이 빠졌다.
"......"
"......"
졸지에 거실 바닥에 나와 설미의 동생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되고나니 설미와 있을 때보다 족히 백배는 더 어색한 침묵이 자욱하게 깔리는 듯 했다.
"으음... 아깐 정말 죄송했어요."
"아, 아니에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새삼 느끼는 거지만 그녀는 정말 착한 것 같다. 하지만 차라리 화를 내면 속이라도 편할 텐데 저렇게 울상을 해가지고서 괜찮다는 말을 하니 사람 마음이란게 더욱 불편할 수 밖에.
"속은 좀 어떠세요?"
"아, 예.... 괜찮아요."
사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 그런데....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되요. 전 언니보다 두 살이나 어린걸요."
"네? 정말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나이가 생각보다 어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언니를 거의 빼다 박아놓은 듯이 똑같은 외모를 가진 그녀를 보면서 이 자매는 일란성 쌍둥이가 분명하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의외의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네. 언니는 스물두살이고 저는 스무살이에요."
"스무살....?"
"네."
맙소사. 그럼 혜진이랑 동갑 아닌가?
"당연히 쌍둥일줄 알았는데.... 놀랍네요."
"저, 저희가 좀 닮았긴 해요."
좀 닮은 정도가 아닐 텐데.... 그녀들의 외모는 웬만한 쌍둥이들보다도 훨씬 더 싱크로율이 잘 맞았다. 물론 말투나 느낌, 성격 등등은 완전히 달랐지만.
"그러니까 말 편하게 하셔도 되요."
"으, 으응...."
졸지에 설미 뿐만 아니라 그녀의 동생과도 말을 트게 된 나는 요새들어 참 알게 모르게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긴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지난 번엔 정말 고마웠어요."
"아냐.... 그건 그만 고마워해도 돼."
오늘 돈 주고도 못 보는 진귀한 눈요기로 충분히 보상을 받았으니까....
"으음.... 언니랑 같은 학교이신가봐요?"
"응. 같은 학과 선배야."
"네? 정말요?"
"응."
"근데 왜 언니가 반말을 하죠?"
"......"
그러게 말이야. 동생인 너도 참 궁금하지?
"저 언니 학교에 자주 가는데.... 종종 으면 좋겠네요."
"으응."
자연스럽게 대하려고는 했지만 암만 그래도 어색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까의 일도 그렇거니와, 자꾸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설미와 대화하는 것 같아서 매우 이질적인 기분이었다. 흡사 착하고 순박한 버전의 설미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어색할 수 밖에....
"으음, 저기...."
나는 설희에게 설미와 그녀의 가족관계에 대해서 물어볼까 생각했다. 그리고 이 넓은 크기에 비해 가구라고는 몇 군데 없는 을씨년스러운 집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그런 질문을 함부로 하는 것이 실례로 여겨질 것 같아서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다음에 더 가까워지면 물어보기로 질문을 미루고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둘러대버렸다.
"야, 나와."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준비를 마치고 나온 설미가 앞장 서서 걷기 시작하자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비척대며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쪽이 나가는 곳인가보다. 정말 미로같은 집이 아닐 수 없었다. 으음.... 그런데 나는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지진이 일어나는 기분인데 같이 마신 저 여자는 왜 저렇게 멀쩡한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아까 동생한테 오토바이 안 탄다고 그러지 않았어?"
설희의 배웅을 받으며 저택같은 집의 현관문을 열고 나온 설미는, 설희가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높게 솟은 담벼락 앞에 다소곳이 서 있는 연두색 가와사키 바이크 위에 몸을 휙 올렸다. 너무나도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니까 안 들켜야지."
"......"
안 타는게 정답 아닐까?
"설희한테 말하면 죽어."
"......"
이거 이러다가 골백번도 더 죽겠다.
"진짜 죽어?"
"그래. 진짜 죽어."
"알았어. 무덤까지 가져갈게."
"그래. 빨리 타."
설미가 고갯짓으로 뒷좌석을 흘끗 가르키자 나는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는 것을 느꼈다. 어젯밤에 같이 오토바이를 타며 신체 접촉을 했던 기억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렸기 때문이었다.
"허리 잡아도 돼?"
"알아서."
알아서? 알아서 하란 뜻인가?
"으악!"
뒷좌석에 몸을 올리자마자 설미는 역시나 예고도 없이 액셀러레이터를 당겼다.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이번엔 나름대로 대비를 했지만 그래도 갑작스러운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또다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말았다.
'신이시여. 요새 왜 이렇게 아스트랄한 일이 많은 건가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빠른 속도로 튀어나가려던 오토바이가 갑자기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설미가 갑자기 바이크를 정지시킨 것이다.
"왜, 왜 그래?"
혹시 허리를 껴안아서 화난 건가?
"......"
설미는 말없이 앞만 보고 있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더욱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그 시선을 쫓아 나도 따라서 앞을 보았다. 그러자 저 멀리서 검은색의 외제차 한 대가 느릿느릿한 속도로 골목을 돌아 안쪽으로 진입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는 차야?"
이렇게 물어보니 질문이 좀 이상하군. 아는 사람이야? 도 아니고.
"......"
설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그 검은색의 외제차는 이 골목 안쪽으로 서서히 들어오고 있었다. 맞은 편에서 가까이 접근하던 그 검은차에서도 이쪽 오토바이를 보았는지 코앞까지 다가와서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나는 그 검은 외제차의 모델이 메르세데스 벤츠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영화에서나보던 그런 외제차가 눈앞에 떡하니 서 있을 것을 보고 나는 입이 쩍 벌어졌다. 하지만 설미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기만 했다.
- 덜컥.
짙은 검정색의 차체가 열리더니 운전석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정장을 입은 말쑥한 차림의 남자가 내리자 나는 순간 부모 잘 만나서 흥청망청 돈 쓰고 다니는 부잣집 아들인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 남자가 뒷좌석으로 돌아가 누군가를 위해 문을 열어주는 것을 보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운전기사였던 것이다.
"사모님. 댁에 도착했습니다."
일반인들은 타 보기는커녕 만져보기도 힘든 차에서 연녹색의 고급스런 정장을 차려입은 한 중년의 여성이 내렸다. 척 보기에도 귀부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그 여인은 방금 우리가 나왔던 집.... 그 으리으리하고 넓은 설미의 집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다시 이쪽 오토바이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설미니?"
"......"
나는 그 귀부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두 가지 의미에서 놀라고 말았다. 첫째는 그 귀부인이 설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놀랐고, 둘째는 그 귀부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놀랍도록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는 점에서 놀랐다. 문득, 아까 전에 들었던 설미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긴 우리 엄마집.'
그러면 혹시 저 사람이....
"......"
"오랜만에 얼굴 보는구나."
또각또각 높은 구두굽 소리를 울리며 귀부인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뒤에 서있었던 운전기사는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생각인지 한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동안 잘 지냈니?"
"......"
설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중년의 여인도 굳이 대답을 들으려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는지 개의치 않고 이번에는 뒷좌석에 뻘쭘하게 타고 있는 내 얼굴을 보았다.
"음, 그쪽은 누구신지?"
여인의 말투에서는 왠지 모를 기품과 여유로운 태도가 느껴졌다.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듯한 말 한마디였지만 말투에서부터 이미 사람을 억누르는 듯한 아주 기묘한 느낌이 있었다. 내가 당황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귀부인은 싱긋 웃음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설미는 일부러 입을 꾹 닫고 있는 듯 했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녀 혼자서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설미 친구분이신가요?"
"아.... 네."
이유 모를 중압감에 눌려있었던 내가 간신히 대답을 하자 귀부인은 흥미롭다는 듯 나를 이모저모 뜯어보았다. 여인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괜히 숨이 가빠지는 듯 했다. 귀부인의 기품 있는 미모 때문이 아니라, 그 호수처럼 빛나는 두 눈동자가 내가 알고 있는 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설미의 눈이었다.
"설미가 친구를 데려오다니 놀라운걸. 그것도 남자를...."
"갈게요."
설미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첫마디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벌써? 오랜만에 봤는데 얘기라도 좀 하지 그러니."
"학교 가야 해요."
설미는 더 얘기하기 싫다는 듯이 액셀러레이터를 다시 두어차례 당겼다. 엔진소리와 함께 바이크가 다시 요동치기 시작하자 귀부인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보아하니 굳이 말리고 싶은 마음도 없는 듯 했다.
"또 보자꾸나."
"......"
"그리고 그 쪽도."
귀부인은 나를 향해 고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한쪽 눈을 감았다. 윙크를 날린 것이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두 눈을 깜박거렸다. 하지만 귀부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설미와 너무나도 닮은, 하지만 느낌만은 너무나도 다른 그 얼굴로.
설미가 가늘게 뜬 눈으로 중년의 여인을 한번 노려보았다. 뒤에서 그 옆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던 나는 어쩐지 그녀가 화가 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오토바이는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오토바이가 귀부인의 곁을 스쳐지나갈 때, 서로의 눈이 마지막으로 한번 마주쳤다. 기품이 온몸에 넘치는 고귀한 미모의 여인이 슬쩍 웃음을 지었다. 그 원숙미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뭐지?'
오토바이가 캠퍼스 정문을 넘어 건물 입구에 멈춰서기까지 설미는 한 마디도 말이 없었다. 물론 운전 중에는 말을 해봤자 들리지도 않고, 평소라고 해서 딱히 말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이 침묵은 어쩐지 어제의 그 고요한 아늑함과는 느낌이 완전히 다른 차가운 침묵이었다.
"나 간다."
나는 그녀에게 방금 전의 일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설미는 오토바이를 세워놓자마자 무뚝뚝한 한마디만을 남기고 발걸음을 돌렸다.
"어어? 잠깐...."
당황스러운 마음에 그녀를 불러세웠지만 부르고 보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게 좋을까? 하룻밤 재워줘서 고마웠다?
"......"
멀뚱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던 설미가 다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몇걸음 걸어가다말고 다시 돌아서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스트레스 쌓여."
"응?"
"나한테 한 대만 맞아."
"뭐, 뭐라고?"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여 아래로 몸을 피했다. 바람을 가르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한차례 울리고나서 나는 잽싸게 허리를 숙인 채로 두어걸음 뒤로 빠르게 몸을 내뺐다.
"......"
설미는 미간을 찡그린채 오른발로 돌려차기를 먹이려던 그 자세 그대로 굳어있었다. 그녀의 컨버스화 뒷굽은 정확히 내 관자놀이 근처 부근까지 올라와 있었는데, 만일 방금 전에 허리를 숙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아마 바닥을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무, 무슨 짓이야?"
"흥."
지난번에 목뼈가 잡아뜯길 뻔한 그 섬뜩한 기억이 절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그 때도 한번 말했지만 이런거 보통 사람이었으면 못 피했다.
"우연은 아니었다 이거군."
"......"
뒤돌려 찬 오른발을 마지못해 내리는 그녀를 보자 울컥 화가 치밀어 꼭 해주고픈 말이 있었다.
"너 팬티 보여."
"......"
문득 슬그머니 자신의 스커트 자락을 내려다보는 설미. 하지만 사실 난 못봤다. 그저 뻥이었을 뿐. 그리고 다시 고개를 천천히 들어 내 얼굴을 마주보는 그녀였다. 그리고 그 무표정한 얼굴을 마주보는 나.
- 퍼억!
"커헉!"
전광석화같은 주먹이 복부에 정확하게 꽂혔다. 그러잖아도 울렁거리던 속이 거의 대분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나는 혼수상태에 가까운 고통을 느끼고 그 자리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주, 죽을 것 같애...."
"죽어."
그리고 설미는 몸을 돌려 다시 뚜벅뚜벅 걸어가버렸다. 겨우 제정신을 차린 내가 일어섰을 때는 이미 그녀가 사라지고 없었다. 삽시간에 홀로 남은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맞은 곳을 쓰다듬으며 멍하니 굳어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야, 너 뭐하는 거야?"
난데없이 들려온 다른 여인의 목소리에 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으윽, 눈물까지 찔끔 나왔다.
"세, 세나?"
사회관 계단을 내려오던 세나의 모습이 보였다. 세나는 넝마가 되어버린 내 꼴을 보고서 소스라치게 놀라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너 뭐야? 왜 그러고 있어?"
"아, 아니.... 그럴 일이 좀 있어."
세나는 나를 거의 부축(?)하디시피 하여 사회관 앞 벤치에 앉혔다. 옆자리에 나란히 앉은 그녀는 추레하기 짝이 없는 내 몰골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그 여자애 백설미 아냐?"
"어? 봤어?"
"얼핏 봤어."
"너 그 애 제대로 본 적 없다고 그러지 않았어?"
"멀리서 몇 번 보긴 했지. 근데 너 걔랑 친해?"
"그, 글쎄.... 친하다기보단...."
나는 순간 우리 사이를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심히 고민했다. 술 배틀 뜨다가 털리고 하루 신세진 사이?
"근데 왜 때려?"
"응?"
"혹시 작업 걸었어?"
"그, 그런거 아냐,"
"소문으로는 걔한테 작업걸다가 죽어나간 사람도 있다던데. 혹시 그게 너야?"
"......"
새삼 백설미 씨의 어처구니 없는 성격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끈질기게 의심스런 눈길로 나를 추궁하던 세나는 시계를 내려다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수업에 늦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그녀가 사라지고나서야 나는 뭔가가 머릿 속에 떠올라 세나가 사라진 자취를 뒤늦게 눈으로 쫓았다.
"으.... 할 말 있었는데."
참으로 아스트랄한 하루였다. 아니, 오늘 뿐만이 아니라 어째 요즘들어 이런 초유의 사태가 계속해서 터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일이 계속되다보니까 마치 소설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드는데.... 착각이겠지.
수업을 모두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은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고 무겁기만 했다. 일초라도 빨리 기숙사 침대에 누워 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오늘은 운동도 생략이다. 운동도 몸이 멀쩡해야 하는 거지....
그러고보니 단비 누나 생각이 난다. 엊그제 전화만 한번 했을 뿐 얼굴을 못 본지가 어느새 꽤 되었기에 오늘은 한번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오늘 같은 피곤한 날에 억지로 운동시설로 내려가기는 싫었다. 부디 나는 운동시설이 아닌 곳에서라도 단비 누나를 우연히 볼 수 있게 되기를 마음 속으로 바랐다.
'어?'
하늘이 내 바람을 이루어준 것인지 저 멀리 기숙사 입구 근처에서 익숙한 여인의 실루엣이 보였다. 꽤 거리가 멀었지만 저 화려한 몸매의 실루엣은 먼 발치에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뚜렷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소리쳐 누나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그녀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단비 누나는 기숙사 정문 근처에 서서 누군지 모를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내용이란 것이 결코 좋은 내용은 아니었는지 단비 누나의 표정은 멀리서도 확연히 보일 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은 일임을 확신하고 누나가 모르게 정문 근처 기둥에 몸을 숨겼다.
모르긴 몰라도 제발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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