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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그녀들의 마음은 ? - 9부

일병 사다리도박사

1범

2014.06.23가입

조회 1,725

추천 2

2014.10.24 (금) 14:42

                           



감동넘치는 로맨스 명작
그녀들의 마음은 ? - 9부




주말 저녁의 시내 거리는 많은 사람들도 북적였다. 교복 입은 학생들부터 술 한 잔 하려고 모인 아저씨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길이 붐비고 있었고, 그 와중에 찬바람까지 으슬으슬 불고 있어서 거리를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뭐가 그리 신나는지 여기저기를 계속 돌아다니고 싶어하는 혜진이의 기분을 맞춰주느라 벌써 서너군데를 왔다갔다 했더니 벌써부터 힘이 쭉 빠졌다.



"아우, 진짜 생긴 건 오타쿠같이 생겨가지고!"



벌써 한 시간째 이어지는 혜진이의 험담을 묵묵히 들어주던 나는 문득 굉장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얼굴은 웃고 있는데 어떻게 저 표정에서 저런 험담이 나오는 걸까?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닌데 네가 참아."



한명수를 싫어하기로 따지자면 혜진이보다 더 한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자니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모처럼 나온 남매간의 외출을 험담으로 보내고 싶진 않았기에 나는 혜진이를 최선을 다해 달래주었다. 표정만은 웃고 있었지만 여전히 혜진이의 입이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는 회유책을 쓰기로 했다.



"우리 저기 가 보자."



내가 가리킨 곳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는 시내 의류 상가의 어느 옷집이었다. 개강맞이 세일이 아직도 진행 중인지 유리창에 비친 가게 안의 모습은 마치 콩나물시루처럼 드글거렸다. 솔직한 말로 저런 곳에 발 디디고 싶은 맘은 눈곱만치도 없었지만 예쁜 옷에 껌뻑 죽는 혜진이의 기분을 달래주기 위한 지금으로서의 최선책이었다.



"어? 나 사주려고?"



"아니. 내꺼 사게."



뚱한 표정을 짓는 혜진이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지만 하도 사람이 많다보니 가게 점원은 우리가 온 줄도 모르고 다른 손님들에게 입어보라는 말을 차례차례 던지고 있었다. 혜진이가 가게 안을 슥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얼굴을 보았다.



"여긴 여자 옷집인데?"



"그러니까 들어왔지."



"오빠꺼 살 거라며?"



"그걸 믿었어? 맘에 드는거 있나 봐봐."



혜진이의 표정이 감동으로 환하게 물들려는 찰나 이제서야 우릴 발견한 점원이 달려와 열띤 호객행위를 펼치기 시작했다. 신이 나서 여기저기를 살펴보고 있는 동생을 보다가 문득 연분홍색의 얇은 야상 점퍼가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귀여운 얼굴의 혜진이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거 입어봐."



그러자 옆에서 타이밍만 노리고 있던 점원이 끼어들어서 신나게 재잘재잘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남자친구분이 너무 안목이 좋으시네요! 요거 들어온지 얼마 안 되는 신상인데 나오자마자 다 팔리고 지금 딱 하나 남은 거에요! 두께감도 얇아서 날씨가 풀려가고 있는 요즘 시즌에 딱이구요, 봄에도 항상 가볍게 입어주시기 좋은 상품이랍니다. 귀여운 여자친구분한테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죠?"



점원은 아마 나와 혜진이를 애인 사이라고 착각한 듯 했다. 처음엔 점원의 호객 행위를 거북해하는 눈치였던 혜진이가 점원의 말을 듣고 나니 빈말이라는걸 알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헤헤 웃으며 내게 팔짱을 껴왔다.



"정말요? 그렇게 보이세요?"



"네, 그럼요! 몸매도 날씬하셔서 입었을 때 박시한 핏이 너무 이쁠 것 같네요."



"아니, 옷 얘기한게 아닌데...."



점원의 떠밀림을 몇 차례나 받고 입어보라는 나의 권유까지 이어지자 혜진이는 원래 입고 있었던 베이지색의 아우터를 벗어놓고 내가 골라준 점퍼에 차례로 팔을 끼웠다. 



"오빠, 잘 어울려?"



"응. 귀엽다."



"대충 보고 말하는거 아니지?"



"정말이야. 이렇게 보니까 너 같지 않은데?"



혜진이가 곱게 눈을 흘겼지만, 건성으로 말하는게 아니라 정말로 깜찍했다. 설령 전혀 안 어울리는 옷을 입은 손님을 보더라도 언제나 최고의 멘트를 던질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던 가게 점원은 혜진이의 귀여운 모습을 보자 더욱 신이 나서 침까지 튀길 기세였다. 



"어쩜, 너무 이쁘세요! 핏이 정말 예술이에요! 남자친구분도 마음에 쏙 드시죠?"



남자친구가 아니라 오빠라고 말하려다가 그랬다가는 어차피 남매가 너무 선남선녀라느니 하는 별반 다를게 없는 뻔한 멘트가 돌아올 것이 분명해 보였기에 그냥 그만두었다. 혜진이는 옷이 퍽 마음에 드는지 어느새 전신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가며 모습을 비추어 보고 있었다.



"그거 맘에 들어?"



"응. 헤헤, 근데 너무 비싸. 다음에 사야겠다."



"왜? 맘에 들면 사줄게."



점원은 세일 막바지인 상품이라 지금 사지 않으면 후회한다는둥 열띈 부추김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애초에 혜진이의 기분을 달래주기 위함이니만큼 어느 정도는 돈을 써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드를 긁을 때가 되어서야 보게 된 옷의 가격을 알게 되니 헛숨이 삼켜지긴 했다.



한사코 말리는 동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산을 하고나서 한 손에 쇼핑백을 든 채로 가게 문을 나섰을 때 혜진이는 연신 난처해하면서도 감동으로 기뻐하는 듯한, 아주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빠가 무슨 돈이 있다고...."



"내가 돈이 없어야 안 놀고 공부를 하지. 술 먹고 노는데 쓸 바엔 동생 옷 한 벌 입히는데 쓰는게 더 낫지 않겠어?"



그러자 혜진이는 다시금 배시시 웃으며 팔짱을 꼈다. 



"이제 기분 좀 나아?"



"응.... 헤헤. 근데 나 이런거 안 사줘도 오빠랑 있으면 좋아."



"알아. 그래도 공부 열심히 하라고 사주는 거야."



"응! 그럼 나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매일매일 이 옷만 입을게."



여자애들은 선물에 약하다는 말을 여동생이라고 비껴갈 순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내 생각보다 회유책이 더 잘 먹혀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혜진이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기분이 나아진 듯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뭐가 재미있는지 킥킥거리는 웃음을 멈출 생각도 않고 있었다.



"왜 자꾸 웃어?"



"히히. 웃기잖아."



"뭐가?"



"아까 그 언니 말야. 오빠가 내 남친인 줄 알았나봐."



혜진이가 슬그머니 까치발을 들더니 내 왼쪽뺨에 가볍게 뽀뽀를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따가운 눈총을 한번씩 뿌리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보잖아, 라고 괜히 한마디 하려다가 나는 문득 여동생의 가벼운 애교에다 대고 그런 과민반응을 보이는게 더 웃길 것 같아서 그러지 못했다.



하기사 혜진이는 어릴 때부터 종종 손을 잡거나 뽀뽀를 하는 등의 가벼운 애정 표현을 좋아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나이를 먹고나서 여동생한테 뽀뽀를 받으니 조금 어색한 기분도 들긴 했지만....



"이러면 좀 더 남친같이 보이려나?"



"우리 얼굴도 안 닮아서 안그래도 그렇게 보일걸."



농담 삼아 슬쩍 던져본 말이었지만 뱉고보니 아차 싶기도 했다. 혜진이는 어릴 적부터 우리가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사이라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드러내는걸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별달리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고 헤헤 웃는 혜진이의 얼굴을 보니 괜한 걱정인 것 같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우리 애인처럼 보일까?"



"글쎄...."



사실 애초에 피가 다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오누이라고 하기엔 우리 남매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인형처럼 작고 귀여운 얼굴의 혜진이와 나를 나란히 세워놓고 본다면, 누구나 예의상으로라도 남매같다는 생각은 좀체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자매보다도 더 가깝고 정다운 사이라는 것만이, 유일하게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가족으로서의 유대감이었다. 그리고 여태까지는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그것이 흔들렸던 적이 없었다. 정아 누나도 혜진이를 친동생처럼 생각했었으니까.



"춥다, 이제 집에 들어갈까?"



"벌써? 에이... 싫어. 더 놀자."



"그럼 어디 갈까?"



"음... 우리 맥주 먹으러 갈까?"



"너 술 마셔도 돼?"



"어허, 왜 이래? 나 이제 스무살이야."



깜빡 잊고 있었지만 혜진이가 어느새 성인이라니 참 믿기지가 않는다. 그렇게 말하기에는 사실 나랑 혜진이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해도 동생이 커가는 모습을 실감하는 오빠 입장으로서 새삼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 맥주 먹고 싶어! 응?"



"알았어. 대신 아버지한텐 비밀이야. 동생한테 술 먹였다는거 아시면 무슨 소릴 들을지 모르니까."



"응! 헤헤, 비밀."



귀엽게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대면서 팔짱을 껴오는 혜진이의 모습을 보니 정말로 다른 사람들한테는 우리가 영락없는 애인사이로 보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렇게 한손에 쇼핑백을 대신 들어주고 있는 모양새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혜진이는 한쪽팔을 감싸 안고 더욱 가깝게 몸을 붙여왔다.



'뭐 상관 없나...?'



하지만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본의 아니게 신경이 쓰이게 되는 부분들이 가끔씩은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지금 이렇게 팔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뭉클한 감촉과 같은....



"이제 어린애는 아니구나."



"응? 뭐라구?"



"아무 것도 아냐."



말해놓고도 나는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만 오빠라지만 내가 생각해도 너무 애늙은이같은 대사였다. 혜진이가 듣지 못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조용한 분위기의 호프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문득 단비 누나의 생각이 났다. 얼마 전에 누나랑 기숙사에서 거의 맥주 잔치를 벌이다시피 했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때의 숙취가 아직도 조금 남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또 맥주를 마시러 오게 되었다. 우연치고는 참 얄은 일이었다. 



어차피 혜진이랑 마시는 것이니 가볍게 딱 한 잔 정도만 하고 들어갈 생각으로 나는 500cc 단위로 주문을 했다. 사실 호프집이라기보다는 비어마트에 가까운 분위기를 풍기는 집이었는데, 그런 만큼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한켠에 진열해놓고 판매하고 있었다.



"나 이런덴 첨 와보는 것 같아."



"너 스무살된지 얼마나 됐다고 당연히 처음 와 봐야 되는거 아냐?"



"에이, 왜 그래. 친구들이랑도 가끔 놀잖아."



"걔네들이랑 술 마시면 어디 가는데?"



"음... 그냥 좀 흔하고 시끄러운 곳? 펍이나 바 같은데는 잘 안 가. 비싸니까."



"술 자주 마셔?"



"아냐, 나 술 별로 안 좋아해. 잘 마시지도 못하고."



"근데 왜 맥주 먹자 그랬어?"



"헤헤, 오늘은 오빠랑 마시니까 그런거지."



비록 혜진이가 내게 거짓말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실제로 같이 술을 마셔보니 혜진이가 정말로 술이 약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간에 기별도 안 가는 500cc를 단숨에 들이키고나니 나야 허전함마저 느낄 정도였지만 혜진이는 그 한 잔만으로 벌써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오빠 더 안 마셔?"



"쪼금 허전하긴 하네."



딱 한 잔만 해야지 하고 마음 먹었지만 실제로 한 잔이 들어가고나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게 신기한 일이었다. 결국 1700cc 를 더 주문하고나자 혜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빈 잔을 쏙 내밀었다. 



"너 괜찮아?"



"에이, 뭐 어때? 오빠랑 같이 있는데. 어차피 나 취해도 오빠가 데리고 갈 거잖아."



뭐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벌써부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동생에게 술을 또 따라주고 있자니 지금 내가 오빠로서 잘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그러는 사이 거품이 아슬아슬하게 넘치지 않을 정도만큼 서로에게 맥주를 따른 우리는 가볍게 잔을 살짝 부딪혔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오누이간에 술을 마시는 것은 혜진이 말대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동생은 이제 갓 성인이 되었으니까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나나 혜진이나 그런걸 그리 신경쓰는 편은 아니고 특히 나는 고등학교 때도 심심찮게 술을 마셨던 것 같은데 여태껏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게 새삼 조금은 의외였다. 어느새 동생이 음주가 법적으로 인정되는 나이가 되었다는걸 다시 한 번 실감하는 걸지도.



나는 혜진이가 좋아할만한 소시지 안주를 더 시켜주었다. 특이하게도 혜진이는 마시는 듯, 안 마시는 듯 하면서 꾸준히 홀짝홀짝 잔을 비워가는 스타일이었다. 딱히 많이 마시는 것 같지는 않는데, 어느샌가 보면 잔이 미워져 있었다. 안주도 천천히 야금야금 해치우는 모습이 어쩐지 술자리에서는 얇고 길게 가면서 오래 살아남을 것 같은 타입이었다. 



그래, 세상이 험하니까 차리리 그 편이 안심이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학 가면 술 많이 마셔?"



뜬금없는 질문. 나도 모르게 혜진이의 시선을 쫓아가니 대학생들로 보이는 남녀들이 무리지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뭐.... 아무래도 고등학교 때보단 많이 먹지."



당연한 대답에 혜진이가 풋 하고 웃었다.



"오빠도 내가 대학 갔으면 좋겠어?"



물어오는 혜진이의 표정은 마치 내가 아니라고 대답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글쎄.... 물론 네가 싫다면 강요할 수 없는 거야 그건. 하지만 내 솔직한 마음으론 혜진이 네가 대학에 갔으면 좋겠어. 꼭 대학에 가야한다, 이런 얘기는 아니지만 공부를 위해서든 취업을 위해서든 대학을 나오는게 너한테 도움이 되는게 솔직한 현실이니까. 사실 그렇다고 대학을 안 가고서 딱히 하고 싶은 일이 당장 있는 것도 아니잖아?"



"으응."



직설적인 이야기에 혜진이가 침울한 기색을 보이자 문득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혜진이의 기분을 달래주는게 우선이니까. 나는 재빨리 시덥지 않은 농담을 이어붙였다.



"그리고 대학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재밌고 다닐 만한 곳이야. 멋진 남자들도 많고."



"그리고 예쁜 여자들도 많고?"



"뭐, 그렇지."



"치.... 오빠는 여자친구 없어?"



"내가 공부해야지 연애할 틈이 어딨어?"



"에이, 못 만드는 건 아니고?"



"아픈데를 그렇게 찔러야겠니?"



혜진이가 까르르 웃더니 귀엽게 눈을 깜박거렸다. 



"마땅한 여자 없으면 내가 오빠 애인 해줄까?"



"그러던지."



서로 농담으로 주고 받긴 했지만 말하고보니 속으로는 왠지 좀 민망하기도 했다. 어릴 적엔 혜진이가 이런 장난을 쳐도 아무 거리낌이 없었는데 지금은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이 의아한 노릇이었다. 이것도 어느새 동생이 훌쩍 커버렸기 때문일까?



옅은 조명 아래 길게 드리워진 동생의 속눈썹이 반짝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새삼 군 시절 생각이 났다. 당시 여고생이었던 혜진이가 면회를 올 때마다 그리 크지 않았던 우리 부대는 여러모로 술렁이곤 했었다. 어쩌다보니 혜진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부대 내에서 인기인이 되어있었는데, 우리가 남매 사이란걸 몰랐던 부대 사람들의 입을 타고 혜진이가 내 여자친구라는 소문이 어느 날엔가 부대 전체에 만연하게 퍼져있었다.



고참들이 새끼를 쳐달라고 하도 귀찮게 굴자 나는 혜진이가 내 여동생이라고 해명을 했었는데, 그러자 그 때 이후로는 오히려 혜진이를 소개시켜달라는 고참들이 너무 많이 생겨서 역효과로 더욱 군생활이 귀찮아졌다. 개중에는 너무 끈질기게 압박을 가해오는 놈들도 몇몇 있었기 때문에, 그 놈들이 모조리 전역하기 전까지 내 군생활은 알게모르게 꽤나 귀찮았던 편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과연 혜진이가 알고는 있으려나?



- 위이이이잉.



그리 즐겁지 않은 옛 생각에 잠겨있는데 익숙한 진동소리와 함께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야, 변태!]



귓전을 찌르는 높은 톤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너무 크게 울리자 나는 그만 당황하여 잽싸게 액정 옆의 버튼을 눌러서 통화음을 두 칸 정도 내려버렸다.



"다, 단비 누나?"



다짜고짜 전화해서 변태라니.... 목소리도 목소리지만 이런 식의 돌발 멘트를 던질 사람도 이 여자 말고는 없었다.



[너 뭐해? 왜 하루 종일 안 보여?]



"아, 지금 집에 왔어요. 그.... 지난번에 말했죠? 주말에 집에 간다고."



내가 말하는 지난번이란 내 방에서 단비 누나와 같이 술을 마신 날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나는 괜히 단비 누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또 부끄러워져서 왠지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그 때 엘리베이터에서 단비 누나를 배웅했던 이후로는 누나와 얘기를 나누는 것이 처음이었다. 



[어어? 아아, 그랬지, 참. 그럼 오늘 기숙사에 없겠네?]



"흠흠, 네."



[어쩐지, 주말이라 수업도 없는데 밥 먹을 때 계속 안 보이길래 이상하다 했지. 그럼 언제 와?]



"내일 갈 거에요."



단비 누나의 목소리에는 별다른 거리낌이나 이상한 기색이 없었다. 그 때 일을 기억 못하는 것은 아닐 테데.... 어쩌면 벌써 다 잊었다는 걸까? 아니면 그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뿐인가? 어찌되었든 단비 누나를 대하기가 조금 껄끄러웠던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오케이. 심심하니까 빨리 와.]



오히려 꺼린다기보다는 예전보다 더욱 정답게 대하는 느낌마저 살짝 드는 것이 기분이 묘했다.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애교 비슷한 것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으음, 알았어요."



게다가 단비 누나가 오늘 하루 동안 내가 있는지 없는지를 계속해서 살펴보았다는 얘길 들으니 괜스레 마음이 싱숭생숭하기까지 했다. 누나가 술에 취해 뻗은 틈을 타서 엉큼한 짓을 시도했던 내 괘씸한 행동을 알고 있을 텐데도 이렇게 서슴없이 대해주는걸 보니 고맙기도 하고 미심쩍기도 하고.... 아무튼 이상한 기분이었다.



"누구야?"



전화를 끊고 나서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나니 맞은편에서 혜진이가 뚱한 얼굴이 되어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나는 단비 누나를 뭐라고 설명해야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혜진이는 내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한 마디 톡 쏘아붙였다. 



"연애할 틈 없다더만.... 순 뻥쟁이 같으니."



"야, 그런거 아냐."



"그럼 뭔데?"



"그냥 같은 기숙사 아는 누나야."



"그냥 아는 누나가 남의 집 아들 집에 갔는지 아닌지는 왜 굳이 확인한대?" 



"뭐... 나름 친해졌으니까 안 보이니 궁금했겠지."



"그리고 목소리는 왜 그렇게 아양을 떨어?"



"아양이랄 것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것 봐, 이것 봐, 지금 편 들고 있잖아. 사귀는거 맞지?"



"무슨 얘기가 갑자기 그렇게 흘러가니?"



"시끄러워. 오빠 바람났구나."



"바람이라니? 뭔 소리야?"



"아까 나더러 오빠 애인 하라며? 말 꺼낸지 몇 초나 됐다고 벌써부터.... 아니지, 그 여자랑은 이미 과거의 일이었으니 바람난게 아니라 양다리라고 하는게 맞겠군."



갑자기 제 혼자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혜진이를 보고 있으니 어안이 벙벙해서 얼이 빠졌다. 아무래도 통화음을 낮춘다고 낮추었는데도 가게 분위기가 하도 조용하다보니 전화 내용이 혜진이에게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자세히보니 어느새 혜진이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아무래도 내가 보기엔 좀 취한 것 같았다.



"혜진아, 너 취했니?"



"응? 아냐, 나 하나도 안 취했어."



퉁명스런 얼굴로 궁시렁궁시렁 소설을 쓰던 혜진이가 갑자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술에 취한 사람일수록 더욱 격하게 자신이 취하지 않았음을 어필한다는 진리는 이미 얼마 전에 단비 누나를 통해서도 실감한 적이 있다. 나는 흘끗 혜진이의 빈 잔을 내려다 보았다. 홀짝홀짝 눈에 띄지 않게 마시느라 굳이 내가 신경을 쓰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새 수 차례 잔을 채워주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제법 마시긴 한 것 같았다.



"그만 집에 가자."



"벌써? 좀 더 있다 가지."



아쉬운 듯 양손으로 맥주잔을 꼭 쥐고 있는 혜진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는데, 아니나다를까 걸음이 비틀비틀 하는 것이 벌써 알딸딸하게 취했다는 사실을 너무 확연하게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맥주 몇 잔에 이렇게 교과서적으로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내 동생이 한편으론 귀엽기도 했고, 세상 험한걸 생각하면 어디가서 술 먹고 취할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호프집을 나와서 집까지 걸어갈지 택시를 탈지 잠시 고민을 했지만 비척비척 몸을 가누지 못하는 혜진이를 보니 답은 뻔한 것 같았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아서 길가의 벤치에 잠시 앉아 빈 택시가 지나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옆자리에 앉아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혜진이가 술이 취해서인지는 몰라도 헤롱헤롱 웃으며 이것저것 알 수 없는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헤헤, 오빠 그거 기억나?" 



"뭘?"



"나 중학교 다닐 때.... 맨날 오빠 다니는 학교 앞까지 가서 기다렸다가 같이 가고 그랬잖아. 근데 어느날인가.... 이름이 뭐였더라? 김형우? 이형우인가? 여하튼 오빠 기다리고 있는데 그런 사람이 와서 나한테 관심 있다며 사귀자고.... 내가 싫다는데도 막 매달리고 그랬었잖아."



술김에 주섬주섬 꺼내놓는 얘기를 모두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듣다보니 띄엄띄엄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모르긴몰라도 아마 그 놈 이름은 박형우였을 것이다. 나하고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동창이었는데, 거의 항상 우리 학교 교문 앞에서 날 기다리곤 했었던 혜진이의 모습을 보고나서 어느날부터인가 끈질기게 혜진이에게 집적거렸던 조금 날티나는 녀석이었다. 



뭐 날티로 따지자면 그 당시의 내가 그 녀석보다 훨씬 더 했지만.... 어찌되었든 지금은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녀석이었다. 동창인 내가 그러한데 혜진이가 그런 얘기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신기했다.



"헤헤... 근데 나한테 계속 막 찝적거리다가 오빠한테 한번 혼나고나서부터는 안 그러더라. 내가 너무 난처해하니까 오빠가 보다 못해서 그 남자한테 화냈었잖아. 기억나?"



"내가 그랬나?"



사실은 나도 기억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화냈다'라는 표현은 너무 점잖은 어휘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때 아마 그 박형우인지 이형우인지 모를 녀석을 거의 걷지도 못하게 만들어놨던 것 같다. 그 때에는 한창 성격이 더러울 때였고, 주먹질하는 재미로 막나가던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살았나 싶지만....



"그래도 사람 때리면 안 되는 거야 오빠.... 그거 알지? 그 때 오빠는 완전 깡패였어, 깡패.... 오빠 보면서 내가 얼마나 속 썩였는줄 모르지?"



"그, 그래..."



어쩌다보니 술 취한 혜진이에게 잔소리까지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옛날 얘기까지 꺼내가면서.... 하지만 사실 지금 혜진이의 모습을 보니 내가 듣는지 안 듣는지도 모르고 그저 혼자 넋두리라도 하는 것 마냥 중얼중얼 떠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요새는 우리 오빠 많이 착해져서 다행이다. 아이구, 착해.... 우쭈쭈, 우리 오빠 착하다."



"......"



평소에 철부지 동생으로만 생각했던 혜진이가 대견하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자 굉장히 기괴한 기분이 들었다. 이질적이다 못해 그로테스크한 느낌마저 드는 것 같았다. 단비 누나도 그렇고, 혜진이도 그렇고.... 왜 여자들은 술에 취하면 사람이 바뀌는 걸까? 이렇게 연달아 여인네들의 만취한 모습을 보게 되니 뭔가 재밌기까지 했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아주 불길한 느낌이 찾아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만취한 여자의 술주정을 보게 되는 것이 이걸로 끝이 아닐 것 같다는 이상한 예감이었다. 단비 누나와 혜진이에 이어서.... 어쩐지 또 누군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기분 탓이겠지....?'



애써 그 느낌을 지우고 간신히 택시를 잡아탔을 때에는 이미 시간이 많이 늦어있었다. 기껏 아버지에게 비밀로 하라고 했지만, 이렇게 헤롱거리는 혜진이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선다면 비밀로 하고 자시고도 없이 말짱 들통날 것이 뻔했다. 그러면 아버지가 또 한 소리 하시겠지.... 벌써부터 한숨이 푹 나왔다.



"8,800원입니다."



"여기요. 잔돈 안 주셔도 됩니다."



오천원짜리 한 장과 천원짜리 네 장을 기사 아저씨에게 내밀고는, 오는 내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꾸벅꾸벅 잠에 빠져있었던 혜진이를 간신히 부축하여 등에 업었다. 맥주 몇 잔에 이렇게까지 취할 수 있다니 그저 놀랍다는 말 밖엔 나오지 않았다.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자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벌써 자고 계신 듯, 온 집안이 캄캄했다. 아까 나올 때 열쇠를 챙겨간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이 야밤에 초인종을 눌러서 아버지와 새엄마를 깨우고 말았을 테니.... 만약 그랬다면 그 뒤는 생각하기도 싫었다.



이대로 조심스럽게 혜진이를 방에 재워놓고 조용히 나도 잠자리에 든다면 아버지 모르게 아무 탈 없이 지나갈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나는 괜스레 도둑걸음으로 살금살금 혜진이 방의 문을 열고서 캄캄한 안을 더듬어 형광등을 켰다. 익숙하긴 하지만 그리 자주 들어오지는 않았던 혜진이의 방 안이 보였다.



나는 침대의 위치를 확인한 후에 다시 불을 껐다. 안방과 혜진이의 방은 베란다로 이어져있는 구조였기 때문에 불을 켠 것을 보고 혹시라도 새어머니가 일어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다시 어둠이 찾아오자 나는 봐두었던 침대의 위치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혜진이를 내려놓았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아서 발에 자꾸 뭔가가 툭툭 걸리곤 했다.



술 취한 동생을 침대 위에 눕혀놓고 이불까지 야무지게 덮어준 나는 그만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완전히 잠에 빠져있었던 줄로만 알았던 혜진이가 손을 살짝 뻗어 내 팔목을 가볍게 쥐었다.



"으음... 어디가, 오빠...."



"이제 가서 자야지. 너도 계속 자."



"음.... 안 돼.... 나 오빠한테 물어볼거 있어...."



"뭔데?"



술에 취한건지 잠에 취한건지 알 수는 없지만 몽롱하기 그지없는 희미한 목소리로 혜진이는 뭔가를 자꾸만 웅얼거렸다. 그 작은 속삭임을 알아듣기 위해 나는 귀를 바짝 갖다대어야만 했다.



"나 대학가면.... 으음.... 오빠한테 더 좋은 동생 되는 거야?"



"지금도 충분히 좋은 동생이야."



"아니야, 아니야.... 거짓말.... 오빠 거짓말 하는 거야."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 해."



"그러면서.... 나 보러 집에 한 번도 안 오고.... 뻥쟁이.... 순...." 



"......"



"으음... 오빠는... 구라쟁이야.... 오빠 나빠."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 것 같기는 한데, 잠꼬대마냥 혼자 웅얼거리는 모습을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음.... 나 대학 가면.... 나한테 더 잘 할거야?"



"혜진아."



"그러면.... 나 공부 열심히 할게.... 진짜로...."



술주정인지 진담인지는 몰라도 왠지 내 동생이 너무나 기특하고 갸륵하여 나는 어둠 속에서도 손을 더듬어 혜진이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여지껏 너무 혜진이에게 거짓말을 많이 해왔던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물씬 솟구쳤다. 자주 오겠다 약속을 했었지만 실제로 그 이후 집에 들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미안해. 이제 정말 자주 올게.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자주 오진 못해도 너 보러 가끔은 올게. 정말이야."



"으음.... 그래야지.... 당연히 그래야지...."



그 와중에도 이불 속에 파묻힌 고개를 끄덕끄덕 흔드는 혜진이가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근데.... 오빠...."



"응?"



"바람 피우지 마...."



"....뭐?"



"난 안 피우잖아...."



"......"



말문이 막혀 내가 아무 대답을 못하고 있자 혜진이도 더이상 말이 없었다. 좀 더 귀를 기울여보니 어느새 다시 곤한 잠에 빠진 듯,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이어져 나왔다. 나는 그렇게 잠든 동생의 침대 머리맡에 잠깐 동안 그대로 앉아있다가, 혜진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방을 나왔다. 





















"넌 술 마시면 안 되겠다."



다음날 혜진이가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 되어서야 간신히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으로 문을 열고 나오자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었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혜진이는 눈을 부비면서 하품을 했다.



"하암.... 어제 우리 뭐했더라?"



"글쎄...."



다행히도 아버지나 새어머니는 어제 우리가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오늘 아침에 교외 지역으로 외출을 나가셨다. 그 때문에 나는 혜진이를 위해서 엉성한 솜씨로나마 손수 해장국을 끓여야만 했다. 말끔히 세수를 하고 나온 혜진이가 식탁에 앉아 국을 한숟가락 뜨더니 전혀 사심없는 표정으로 감상을 표했다.



"으음, 오빠 요리 되게 못한다."



"......"



이걸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때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 잠시 TV를 보며 같이 시간을 보내다가 초저녁이 되자 나는 기숙사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있으려니 문 틈새로 혜진이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벌써 가려구?"



"이제 가야지. 입실 시간 안 지키면 또 감점이야."



집을 방문하겠다고 허락을 받고 나왔기 때문에 어제 들어가지 않은 것은 상관이 없었지만 오늘은 복귀 시간을 잘 지켜야만 했다. 안 그랬다가는 가랑비에 속옷 젖듯이 감점이 야금야금 쌓일 테니까....



"치... 그깟 기숙사가 뭐라구 오누이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나 몰라."



"조만간 또 올게."



"흥, 이젠 안 믿어."



"이번엔 정말이야. 어제 약속도 했는데 기억 안 나?"



하지만 표정을 보니 혜진이는 기억을 못하는지 무슨 말을 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다음에 오빠 기숙사에 놀러가봐도 돼?"



"기숙사엔 왜?"



"오빠가 안 오니까 내가 갈 수밖에 없지. 그리고 오빠가 사는 곳이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와봤자 별 거 없는데...."



"군대 가기 전에도 별 거 없다면서 못 오게 했었잖아. 이번엔 꼭 갈 거야!"



"에이, 너 방에 데리고 들어갔다가 걸리면 나 퇴실인데?"



"흥. 안 걸리면 그만이지 핑계는."



"......"



문득 얼마 전의 단비 누나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똑같았는지 그대로 빼다 박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빤 내가 그렇게 귀찮아?"



"아니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럼 놀러가도 되잖아."



"아, 알았어. 다음에 놀러오던지."



"정말이지?"



"그래...."



설마 진짜로 올까 싶은 마음에 나는 그러라고 하고는 신발을 신었다. 혜진이는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조금이나마 밝아진 얼굴로 집 밖까지 나와서 배웅을 해주었다. 멀찍이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고 서 있는 동생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는 나는 몸을 돌렸다. 





















제시간에 맞추어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벌렁 누워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단비 누나에게 전화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 동안 혜진이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 반성하는 마음도 들었다. 앞으로는 혜진이의 공부를 봐주기 위해서라도 조금 더 자주 집에 들러야만 할 것 같았다.



'오빠는 여자친구 없어?'



뜬금없는 혜진이의 질문이 갑자기 생각났다. 물론 요새 여자가 좀 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아무 여자나 만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머릿 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몇몇 여자들의 얼굴은 있었다. 얼마 전에 잊지 못할 해프닝을 겪었던 단비 누나의 얼굴도 떠올랐고, 도저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미 남자친구까지 있는 세나의 얼굴도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또....'



정말 신기한 일이지만, 서로 아무런 친밀감도 없는 사이인 한 여자의 얼굴도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나 더욱 신기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의 얼굴이 가장 뚜렷하게, 그리고 가장 강렬하게 떠올랐다는 것이었다. 나는 겨우 그 여자의 얼굴과 이름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인데도.....



'백설미.'



그러고보니 그녀에게 사과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지 오래였는데, 여태껏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망설여지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앞으로 계속 같은 조에서 볼 사이인데 이런 기분으로 지내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되도록이면 다음 수업시간이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그녀와 말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 그 수업을 제외하고는 내가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딱히 없었다....



'카페...?'



문득 설미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 카페가 떠올라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카페로 가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물론 만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만나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또 별개의 문제였다. 단 둘이 보고 얘기를 해도 대화가 될지 안 될지 장담할 수가 없는데 그런 어수선한 곳에서 말을 꺼내도 과연 괜찮을까 싶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일단 카페에서는 점원과 손님의 입장이니까 완전히 무시하진 못할 테니 그녀의 냉정한 성격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또한 들었다. 하지만 그걸 일부러 이용하겠다면 굳이 대화를 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무튼 별의별 생각이 다 들어서 머릿 속이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가볼까?'



어차피 그 곳이 아니라면 마땅한 방법도 없었다. 한번 마음 먹은 일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빨리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되려 나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떻게든 다음 수업시간이 오기 전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쇠뿔도 단 김에 빼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런 고민에 시간을 더 끌어봐야 갈수록 망설임만 더 늘어날 것 같았다. 기왕 마음 먹은거 지금 당장 해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과를 하는 김에 그녀에게서도 오해에 대한 사과를 받아낼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하지만 그런 일은 아마 없겠지?'



나는 최대한 신경 써서 옷을 주워입기 시작했다. 옷가지라봐야 몇 종류 있지도 않았지만 사람 마음이란게 참 어쩔 수가 없어서 되도록 있어보이게 꾸미고 싶었다. 옷을 입으면서도 머릿 속은 설미와 마주쳤을 때 과연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할지에 대한 구상으로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었다. 



'근데 오늘 일요일인데.... 오늘도 알바 하려나?'





















AMANTE 카페 안은 지난번에 왔을 때처럼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오늘은 주말이기 때문인지 오히려 그 때보다 더 붐비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유난히 남자 손님의 비율이 훨씬 더 많아보이는 것은 내 기분 탓일까....? 심지어 남자 너댓명이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웬만해서는 결코 보기 힘든 광경까지 보였다.



'이, 있구나...'



나는 바보처럼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주문대 너머에 서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은 먼발치에서도 그 아름다움을 너무나 뚜렷이 드러내고 있어서, 그녀가 백설미라는 사실을 단숨에 확신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진짜 예쁘긴 예쁘다.'



주문대 앞에서 서성이는 수 많은 남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개중에는 주문을 빙자해서 사적인 말 몇 마디 걸어보려다가 결국 뻘쭘한 표정으로 돌아서고 마는, 예전 제광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손님들도 꽤 있는 듯 했다. 조금 후에 나도 저 사람들처럼 되진 않을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꿈틀 고개를 들었다.



말을 거는 것보다도, 말을 걸겠다고 마음을 먹는 것이 몇 배는 더 어려운 일처럼 느껴졌다. 살면서 이렇게 용기를 내기가 힘들었던 적이 또 있었을까 싶다. 나는 그렇게 한참 동안 카페 문간에 바보처럼 서있었다. 카페 문을 지나쳐 나가는 남자 둘이서 두런두런 주고받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왔다.



"어휴... 진짜 너무 무뚝뚝하네."



"야, 오히려 그게 매력이지."



"저 얼굴에 저러니까 그게 매력일 수 있는 거지. 조금만 더 안 생겼어봐. 그럼 무뚝뚝한게 아니라 싸가지가 없는거지."



"예쁘면 다 용서가 된다는 말이 틀린게 아니니까."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는 안 봐도 뻔히 알 수 있었다. 알바생의 미모를 두고 자기들끼리 입방아를 찧어대며 멀어져가는 그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나는 왠지 모르게 기묘한 자기 위안에 빠져들었다. 이쯤되니 어차피 모든 남자들이 다 퇴짜를 맞는거, 내가 한번 시도했다가 설령 실패한다한들 뭐 그리 큰 창피를 당할까 싶은 긍정적인 생각까지 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용기를 내어 나는 카페의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딱 한 번 와보았을 뿐이지만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있는 이곳의 몽환적인 호박색 조명은 그 때와 다름없는 빛깔과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그 은은한 불빛 아래에서 나는 주문대 앞에 서 있는 설미의 모습을 보았다. 



"주문 하시겠어요?"



"......"



몽롱한 조명 아래에서 본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기분마저 들어서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물론 내가 커피 주문이나 하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문이 막힌 이유도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아무 말도 못하고 굳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음.... 저기...."



지난번처럼 고개를 숙인 채로 목소리만 듣고 주문을 받던 그녀였지만, 내가 말만 더듬거리고 있자 이상했는지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녀의 두 눈이 나를 보았고, 나는 그 보석같은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느꼈던 아찔한 감각이 다시 한번 등골을 스치고 흐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



내 얼굴을 본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반가움 따위는 애초에 생각할 수조차 없었지만 조금의 의아함이라거나, 심지어 언짢은 기색마저도 없었다. 그저 당연한 사물을 보고 있다는 듯이 아무 느낌도 없는 무감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일관성있고 변함없는 반응에 벌써부터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저 기억나요?"



따지고보면 학과 후배인 그녀에게 이렇게 만날 때마다 존댓말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이 조금 웃긴 기분도 들었다. 설미는 나를 잠시 동안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웬일인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반응을 보니 어지간해선 결코 깨트릴 수 없다고 알려진 그녀의 무표정을 깨버렸다는 사실이 왠지 뿌듯하게 여겨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시덥지 않은 뿌듯함도 뒤이어 날아온 그녀의 한 마디에 산산히 부서져 내렸다.



"....치한?"



"......"



단비 누나의 변태에 이어서 이젠 치한이라니.... 요즘 내 이미지가 왜 이렇게 되버렸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손님한테 치한이라니 말씀이 심하시네요."



"......"



약간이나마 찡그린 그녀의 얼굴을 보니 왠지 서글프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예의 그 무표정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기쁘기도 했다. 아무래도 무시받는 것보다야 그나마 낫지 않을까....



"무슨 일이신지?"



이내 곧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간 설미가 평소의 그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그 차가운 말투는 왠지 평소의 그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각한 차가움이라기보다는, 노골적으로 밉살스럽다는 감정을 드러내는 듯한 차가움에 가까워 보였다. 혹시 나한테 뭐 화난거 있나? .... 아, 생각해보니 있겠구나. 



"음.... 시간 좀 내주실래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



그 말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놀랄 만큼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그녀가 나를 밉게 보고 있다는 사실 덕분에 웃기게도 오히려 없던 용기가 생긴 것 같았다. 그 용기란 마치.... 어차피 곱지 않은 시선으로 찍힌 이상 여기서 더 거리낄 것이 뭐가 있겠으며 물러날 곳이 어디 있겠냐는 식의, 어쩐지 뭔가가 어긋난 용기였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특히 그 호수같은 두 눈동자를 마주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시 그 눈을 마주보게 된다면 기껏 쥐어짜낸 용기가 다시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기분이라기보단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이런 주제에 얼마 전에는 대체 어떻게 그녀에게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르고, 버럭 화를 냈는지 참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과연 동일인물이 맞긴 맞는 건가 싶었다. 



"......"



설미는 한참 동안이나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고, 나 또한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괴롭고 어색한 침묵이 쭉 이어지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해주면 좋겠건만, 좋다 싫다를 떠나서 그녀는 아예 묵묵부답이었다. 이거 또 무시받고 있는 건가.... 하는 기분도 들었지만 이번엔 그런건 아닌 것 같았다. 왜나하면 그녀가 나를 줄곧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평소처럼 무시할 생각이었다면 지금쯤 나를 보고 있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렇게 나를 응시하던 그녀가 이윽고 몸을 돌려버렸다. 역시나 또 무시당하는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입맛이 썼다.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행동을 보고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들어와."



"네?"



설미가 주문대의 안쪽과 바깥쪽을 가로막고 있었던 작은 나무문을 열었다. 겨우 허리 높이까지 오는, 손으로 툭 밀기만 해도 쉽게 열리는 작은 문이었지만 그것은 점원과 손님의 위치를 구분해주는 경계선이었다.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그녀의 말은 내게 주문대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 안에 들어가도 괜찮은 건가요?"



"......"



다시 또 이어지는 묵묵부답. 쓸데없는 말은 하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어찌되었든 내가 방금 잘못 들은 것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나는 머뭇거리며 주문대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하지만 대체 내가 왜 여기에 들어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전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설마 여기서 아르바이트나 하라는 뜻은 아닐테고.



"음.... 설미 씨."



"앉아."



"네?"



"앉아서 기다려. 곧 끝나니까."



설미가 주문대 안쪽에 놓여있는 작은 나무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점원들 쉬라고 마련해놓은 것인지 주문을 받는 카운터 바로 뒤편에 의자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일방적인 명령조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녀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할 말만 던지고는 다시 등을 돌려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멍청하게 우두커니 서서 굳어있었던 나는 이내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주문대 앞에 몰려있었던 수 많은 남자들이 저 놈은 알바생도 아니면서 왜 저기 들어가 있냐는 듯한 시선을 쏘아대고 있었다. 사실 나도 그게 굉장히 궁금하다. 내가 왜 여기 들어와 있을까?



'......'



나는 엉거주춤하게 설미가 가리킨 나무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 마냥 서 있기도 어색한 노릇이었고, 또 그녀의 말을 왠지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막연한 느낌이긴 했지만, 여기서 그녀의 말대로 하지 않았다가는 영영 말을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그냥 앉아있으라구요?"



"......"



하기사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지. 이쯤되니 나는 질문을 던져놓고도 내 스스로 대답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내가 잘못 본 것인지, 순간 그녀의 고개가 위아래로 작게 움직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실 카페에 와본 적도 몇 번 없었지만, 여기에 들어와 본 적은 당연히 처음이었다. 주문대 안쪽은 늘 아르바이트생만 서 있는 장소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내가 아니더라도 이 안에 점원이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는 경우를 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신기하다면 신기했고,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설미는 우아한 손짓으로 머그잔을 쥐고 커피를 탔다. 그 차갑고 쌀쌀맞던 여자의 손끝에서 저렇게 섬세하고 유연한 움직임이 나오는 것이 문득 너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몽환적인 조명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의 색다른 모습 때문인지 참 모를 일이었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도 같고, 빠르게 가는 것도 같았다. 카페 안의 아늑하고 몽롱한 분위기가 바깥과는 너무 동떨어진 괴리감을 주고 있어서 그런 듯 했다. 나는 하염없이 그녀가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문을 받고, 계산을 하고, 커피를 만들고.... 



그녀는 나를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여기 앉혀놓았다는 사실을 혹시 잊어버린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옆에서 보니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려고 괜한 용건으로 주문대를 찾는 남자 손님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한눈에도 알 수가 있었다. 그 모습이 한심하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지만, 더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와 저 사람들이 별로 다를게 없는 것 같아 적잖이 서글퍼졌다. 



저 남자들은 바깥에 서 있고, 나는 이 안에서 앉아 있다는 것만이 오직 단 하나의 차이점이었다. 이것이 과연 얼마만큼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됐어. 나와."



상념에 빠져있었던 나를 설미의 짤막한 목소리가 깨워놓았다. 곧 끝날거라던 그녀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정신을 차리고보니 어느새 뒤이어 들어온 다른 알바생과 교대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예전에 왔을 때도 한번 본 적이 있는 그 통통하고 푸근한 인상의 점원이었다.



"수고해요, 언니."



"응, 그래. 수고했어. 근데 기다리고 있는 저 분은 누구? 혹시 남친?"



"......"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싫어도 들린다. 그리고 역시나 설미는 묵묵부답이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쓰여있는 문을 열고 안쪽으로 사라진 설미는 잠시 후에 방금 전과는 달라진 옷을 입고서 다시 나타났다. 아마 가게 복장을 벗어놓고 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고 나는 주뻣거리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가게 밖으로 나온 설미가 먼저 벤치에 앉았다. 그곳은 예전에 내가 세나와 나란히 앉은 적이 있었던 바로 그 벤치였다. 앉으라는 말 같은건 당연히 없었지만 나는 그냥 그녀의 옆에 앉았다. 왠지 이 정도는 알아서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할 말이 뭐야, 치한?"



"이 봐요, 설미 씨. 전 치한이 아니라구요."



"그래서 할 말이 뭐냐니까, 치한?"



"......"



의외로 고집스런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준비해 온 말을 두서없이 꺼냈다.



"일단은.... 사과하려구요. 지난번에 화 냈던거."



"......"



"설미 씨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기분 나쁘다고 함부로 말 했던거 미안해요. 저는 그러려던게 아닌데 설미 씨가 자꾸 저를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 홧김에 그렇게 말했어요. 우리 앞으로 수업에서 같은 조로 계속 볼 텐데 오해가 있다면 풀고 잘 지내야 하지 않겠어요? 뭐 그래서.... 온 거죠."



"......"



어김없는 묵묵부답. 하지만 이 침묵에 익숙해진 나는 잠자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기로 했다. 내가 입을 열지 않자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게 다야?"



"네?"



"그게 끝이냐구."



"아니, 그게...."



그럼 뭐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이왕 이렇게된거 한 번 하고 싶은 말을 싹 털어보자는 기분에서 아무 말이나 줄줄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 그리고 가능하다면 설미 씨가 저를 오해하셨던 거에 대해서도 사과를 좀 받고 싶구요."



"무슨 오해?"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얼마 전에도 그렇고 저는 두번 다 설미 씨의 동생을 도와줬던거지 나쁜 짓을 하려던게 아니었어요. 동생분한테 들었을 거 아니에요?"



"나도 알아."



"그, 근데 왜 자꾸 치한이라고....."



"치한 같이 생겼잖아."



"......"



꿀밤이라도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아, 암튼.... 제가 사과했으니까 설미 씨도 사과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또 뭐?"



"그리고 사실 저 설미 씨랑 같은 학과 선배에요. 설미 씨는 잘 모르겠지만."



백설미가 이건 좀 의외라는 듯이 한쪽 눈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녀의 눈이 궁금증을 담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나는 살짝 뿌듯해졌다. 참으로 가치 없는 뿌듯함이었지만.



"근데 왜 나한테 존댓말 써?"



"......"



그래요. 바로 그게 여태껏 저도 궁금했던 점이에요.



"이상한 사람이네."



"윽... 예의 없는 것보단 낫잖아요, 누구처럼."



마치 들으라는 듯한 내 소심한 지적에도 설미는 아무 반응이 없더니, 이윽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툭 내뱉았다.



"그럼 말 놓던지."



"설미 씨는 왜 저한테 반말해요? 내가 선밴데."



"그건 내 맘이고."



"......"



당당하다 못해 자연스럽기까지 한 그녀의 뻔뻔함에 말문이 막혔지만 여기서 페이스가 흔들렸다가는 기껏 그녀와 터놓은 말문이 다시 닫힐 것 같아서 나는 잽싸게 입을 열었다.



"좋아.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럼 나도 말 놓을게. 어쨌든 나는 네가 나한테 사과를 했으면 좋겠어."



"거 참 쪼잔하네. 사내자식이 그깟 사과가 그렇게 받고 싶어? 벌써 지나간 일 가지고."



순간 의아함에 입이 딱 벌어졌다. 그녀의 말이 기분 나빠서는 아니었다. 



"시, 신기하네."



"뭐?"



"내가 들었던 네 말 중에서 방금 그게 제일 길었어. 너도 그렇게 길게 말할 줄 아는 구나."



"......" 



설미의 표정은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어처구니없는 표정마저도 어찌나 아름다운지 내가 지금 그녀 앞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을 쏟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을 지경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렇게 막힘없이 대화를 하고 있다는게 너무나도 놀라웠다.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내내 생각하고 준비했었던 말들은 지금 이 순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즉각적으로 무슨 말이든지 튀어나와주는 것이 지금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모르긴몰라도, 그 어떤 남자와도 단 세 마디 이상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는 설미와 이렇게 비교적 제법 긴 얘기를 이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지금 이 상황이 내게 썩 나쁘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암튼.... 내가 이러는건 쪼잔해서도 아니고, 너한테 나쁜 감정이 있어서도 아냐. 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게 있다면 바로 잡아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어쨌든 앞으로 계속 볼 텐데 서로 어색하게 지낼 순 없잖아."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마치 동문서답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하나 잠깐 망설였다. 네가 유명해서? 아니면 소문을 들어서? 아무리 그게 사실이라도 그렇게 대답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거야.... 너한테 관심이 있었으니까."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돌발적인 발언이 폭탄처럼 터져나왔다. 나는 내 입으로 말해놓고도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아 입을 틀어막을 뻔 했다. 어쩌자고 이런 말을 냅다 내뱉았을까?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설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잖아도 이런 멘트를 싫어할 것 같아보이는데 너무 다짜고짜 수작을 걸어버린 것 같아서 심히 후회가 되었다. 자칫 잘못하면 기껏 운 좋게 몇 마디 나눠봤는데 그게 모두 허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후에 이어진 그녀의 다음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그럼 고기 사 줘."



"....뭐?"



순간 잘못 들은게 분명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소주랑."



"......"



요 근래 내가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어이없고, 가장 황당한 말이었다. 물론 잘못 들은게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가, 갑자기 왜?"



"사과하라며."



"그게 무슨 상관인데?"



"니가 말하는 사과란게 미안하다, 잘못했다, 뭐 그런거 말하는거 아냐?"



"그, 그렇긴 한데 그러니까 그게 무슨 상관...."



"난 그런 말 술 안 마시고는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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