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그녀들의 마음은 ? - 8부
감동넘치는 로맨스 명작
그녀들의 마음은 ? - 8부
양을 세었다. 고전적인 수법이지만 어느새 삼백마리까지 세었다. 머릿 속에서는 이미 벌판 위에 양떼목장을 차린지 오래였지만 나는 그래도 꿋꿋이 양의 숫자를 하나하나 늘려나갔다. 하지만 백마리가 더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잠이 오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잠이 안 온다.'
나는 애써 감고 있었던 눈을 슬쩍 떠보았다. 초롱초롱하게 참 잘도 떠진다. 짙은 어둠 속이었지만 벽지무늬 하나하나까지 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별볼일 없는 탁상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시간을 확인하진 않았지만 새벽이 깊어가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
우리 학교 기숙사의 내세울 만한 장점인 1인 시설의 특징상, 룸메이트로 인해 취침시간을 방해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그 중에서도 꽤나 좋은 점이었다. 덕분에 나는 여태껏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었고, 원치 않게 잠을 방해 받았던 적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정말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으음...."
단비 누나가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는 소리가 또 들린다.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운 나는 애벌레처럼 몸을 돌돌 말고서는 괜시리 바닥을 득득 긁었다. 여태까지의 기숙사 생활을 통틀어서 잠을 잘 때 이렇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숨소리나 뒤척이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었기에 굉장히 낯설다 못해 신기한 기분마저 들었다.
'참 잘 잔다....'
다른 사람의 방에서, 그것도 남자의 방에서 저렇게 곤히 잘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암만 술을 많이 마셨다지만.... 그에 비해 아직까지도 제대로 잠을 못 이루고 있는 내 모습은 어찌보면 웃기기까지 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여자가 더 긴장해야 하는거 아닌가?
"휴우."
의미도 없는 한숨을 푹 뱉으며 나는 잠 드는 것을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새우처럼 누워있어봤자 어차피 잠 들 수 없다는 사실은 벌써 수시간 동안 충분히 실감했다. 바닥에 멍하니 앉은 채로 침대 위를 올려다 본 나는 이불 속의 희미한 실루엣을 확인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잠든 누나를 침대 위에 눕혀놓고 이불을 덮어주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누나는 옷차림이 불편한지 자꾸 잠결에 몸을 뒤척거렸다. 물론 타이트한 스커트에 블라우스차림으로 편히 잠을 잘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옷을 벗길 수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한 겹만 벗기면 안쪽은 속옷 차림일걸 뻔히 아는데.
'한 겹만 벗기면 속옷....'
나는 단비 누나의 속옷 차림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그렇잖아도 술이 취해서 곤히 뻗은 여자와 한 방에 단 둘이 누워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이성이 자꾸만 흐려지려고 하는데, 이 마당에 그런 생각까지 했다간 무슨 일을 낼 것만 같아서 스스로를 타이를 수 밖에 없었다.
허리를 일으켜 바닥에 앉긴 했지만 잠을 자려니 잠이 안오고, 그렇다고 안 자려니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고, 참 못할 짓이었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나도 모르게 다시 침대로 다가가서 잠든 누나의 모습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이런 식의 반복이었다. 내려다보고, 다시 가서 눕고, 다시 와서 내려다보고, 또 다시 가서 눕고....
한 대여섯번 그게 반복되고 나니 심신이 지치는 기분에 가슴이 답답해질 지경이었다. 단비 누나는 술에 취해 잠든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기같은 모습으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낮고 규칙적인 숨소리에 따라 이불 속에 감싸인 누나의 몸이 희미하게 오르내렸다.
블라우스가 많이 불편했던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단비 누나가 또 한 차례 몸을 뒤척였다. 천사처럼 새근새근 잠을 자다가도 그렇게 몸부림을 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여기서 그녀의 옷에 손을 댔다가는 '내가 오늘밤 당신에게 못할 짓을 하겠소'라고 선포하는 거나 다름이 없을 것 같아 자꾸 망설여졌다.
"누나."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사실 웃기게도 대답을 바라고 부른 것이 아니었다. 나는 누나에게 내어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정쩡한 높이의 침대는 바닥에 앉아서 보기에는 너무 높고, 그렇다고 일어서서 보기에는 너무 낮은 위치에서 누나를 품고 있었다.
"누나, 자요?"
"으음... 나쁜 자식... 음냐...."
순간 누나의 입이 열리고 난데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나는 깜짝 놀라 그 자세에서 펄쩍 뛸 뻔 했다. 잠을 깨우려고 던진 말이 아니라 오히려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던진 말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에 대답한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몸을 뒤척이며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잠꼬대였던 것 같다. 마치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살짝 벌어진 입에서 연달아 잠꼬대가 또 흘러나왔다.
"음... 너... 그러면 안 돼...."
무슨 꿈을 꾸길래 잠꼬대가 이래?
"못 된 놈.... 음냐...."
문득 누나가 아까 해주었던 전남친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혹시 꿈에서 그 남자를 보고 있는 걸까? 내가 아는 선에서 생각할 수 있는 답은 겨우 그 정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누나의 그 잠꼬대가 지금 은근히 몹쓸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하는 말인 것 같기도 한 기분도 들어서,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리고 있었다.
'그 놈은 대체 뭐가 잘나서 이런 여자를 사귄 걸로도 모자라 바람까지 폈을까?'
짙은 어둠에 완전히 적응 되어버린 눈은 유리 너머로 은은히 새어들어오는 희미한 달빛만으로도 단비 누나의 이목구비를 구별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평소에는 너무나 도발적이고 섹시한 느낌을 주었던 누나의 그 여우같은 눈이 지금은 아기처럼 고요하게 감겨있는 모습을 보니 이질적인 느낌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쁘다.... 섹시하기도 하지만.'
누나의 자는 모습에서는 평소에 내가 보았던 그 화려한 이미지와는 대조되리만큼 색다른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섹시함 속의 순진함이 보인달까.... 그렇기 때문인지 야릇한 마음은 쓸데없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누나는 이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잠꼬대만 웅얼거리고 있었다.
"벌 받을 거야.... 너.... 으음...."
문득 주책스럽게도 과거에 단비 누나를 품을 수 있었던 남자들은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못 된 생각이 들었다. 모든 남자들이 탐할 만한 그 환상적인 몸을 안을 때 대체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참 쓰잘데 없는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지금 마음만 먹으면.... 실제로 볼 수 있을까?'
단비 누나의 벗은 몸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시뻘건 거짓말이다. 부끄러운 기억이긴 해도 누나 앞에서 자지를 세웠던 것을 들킨 적도 있으니까.... 운동시설에서도 늘 남자들의 열렬한 시선을 한 몸에 사로잡았던 누나의 화려한 몸매를 혼자서 상상했던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 굉장한 몸매를, 마음 먹기에 따라서 지금 살짝 엿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자마자 목구멍에서는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가고 심장은 미칠 듯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으윽.... 하느님. 제가 뭘 그리 잘못 살았다고 이런 시련을....'
무방비하게 잠든 여자를, 그것도 헤어진 전남친의 꿈을 (아마도...) 꾸고 있는 듯한 누나를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참 몹쓸 노릇이었지만, 남자인 이상 이건 정말이지 불가항력으로 느껴졌다. 세상에 단비 누나같은 여자가 눈 앞에서 이렇게 깊이 자고 있는데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남자가 과연 있을까?
'미안해요, 누나. 그래도 본다고 닳는건 아니니까 술값 대신 쬐끔만 볼게요.'
나는 마음 속으로 누나에게 그리 진실하지는 못한 사과의 말을 건넸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 꿈에라도 알까 싶은 누나는 여전히 뒤척뒤척 몸을 틀면서 자신도 모르게 내가 이불을 들추기 쉽게끔 도와주기까지 하고 있었다. 이건 하늘의 계시다, 라고 되먹지도 않은 합리화를 마무리 한 나는 굳게 마음을 먹고 누나의 몸에서 이불을 살짝 걷었다.
'옷에 손도 안 대고 그냥 눈으로만 볼게요. 진짜로.'
시간을 실제로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실로 몇 시간 동안의 고민 끝에 어렵사리 내린 결정이었다. 침대와 땅바닥을 수 차례 왔다리 갔다리하며 고뇌했던 일을 결국엔 실행에 옮기고야 마는 내 자신이 한심하기까지 했지만 도저히 이렇게 밤을 지샐 자신도, 아니면 이대로 그냥 잠들 자신도 없었다.
그래도 도덕상의 선은 반드시 지키겠노라고 나름대로 굳은 다짐을 하고 이불을 걷었는데, 어이없게도 이불을 들추자마자 그 결심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도 너무나 매끄럽고 늘씬하게 뻗은 단비 누나의 굴곡이 희미한 실루엣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게다가 입은 옷조차 타이트하게 몸에 붙는 블라우스와 H라인 스커트였기 때문에 이 어둠 속에서 누나의 몸을 가려주기 위한 옷으로서의 구실을 전혀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실루엣으로만 보니까 내가 누나의 알몸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조금의 가감도 없이 미려한 굴곡을 뽐내고 있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몸매 진짜 좋다.'
내가 여자를 뭐 자랑할 만큼 많이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질 만큼 유혹적인 몸매를 가진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문득 평소에 누나의 얼굴과 몸을 곁눈질 할 때마다 그 민망한 느낌에 괜히 죄 짓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버리곤 했던 것을 생각했다. 지금은 누나가 자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런 기분이 느껴지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단비 누나의 몸매는 조각을 빚어놓은 듯이 정형화 된 비율의 몸매는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기엔 잘록한 허리에 비해서 가슴과 엉덩이가 너무 글래머러스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단비 누나의 몸매에서는 TV에서 흔히들 말하는 그런 전형적인 황금비율이니 어쩌니 하는 상투적인 표현을 떠나서, 다른 여자들은 결코 흉내낼 수 없는 어떤 야릇함이 느껴졌다.
처음 단비 누나와 만났을 때, 누나의 첫 인상을 '진짜 야하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 때는 그저 막연한 느낌으로만 생각했던 것이고, 지금도 그리 딱 꼬집어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뭐랄까, 누나의 몸매는 어딘지 굉장히 야하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보고만 있어도 괜히 민망해지고 야릇해지는 그런 이상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한 마디로 말하면 진짜 꼴리게 생긴 몸매란 거지.'
누나한테 이런 말을 쓰니까 좀 미안하긴 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자로 잰 듯 딱 떨어지는 비율의 몸이라기보다는 너무나 야해보이고 도발적으로 보이는 섹시한 몸.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남자라면 누구든지 한 번쯤은 품에 안아보고 싶어할 그런 몸이었다.
그 몸을 지금 손대려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미처 어떻게 컨트롤을 해보고 자시고도 없이 자지가 불끈하여 힘이 들어갔다. 손은 안 대고 눈으로만 보겠다는 다짐이 불과 1분 전의 일이었던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이미 머릿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보니까 더 섹시한 것 같아.'
노골적인 실루엣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흐릿한 선으로 그려지는 은근한 모습을 보니 어쩐지 더욱 야릇한 흥분이 샘솟는 것 같았다. 이런 행위에 대한 합리화나, 누나에 대한 미안함 등의 올바른 감정이 점점 이성과 함께 마음 저편으로 멀찍이 밀려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저편에 있었던 즉각적인 본능과 야릇한 흥분 등의 몹쓸 감정이 대신해서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 또한 느껴졌다.
'도저히 못 참겠다.'
긴장으로 입술이 바짝바짝 트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이불을 한 쪽으로 조심스럽게 밀어버리고는 여전히 불편한 옷을 입은 채로 잠들어 있는 누나의 몸 위로 올라가 양쪽 무릎을 그녀의 허리보다 넓게 벌리고 조용히 내려앉았다. 혹시라도 누나의 몸에 닿아 깨는 일이 없도록 너무나 신중하게.
내 양 다리 사이에 갇혀버린 듯한 모습으로 반듯하게 누워있는 단비 누나의 모습을 보니, 혹시 이 상태로 또 몸부림을 치다 내 몸을 쳐버려서 깨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잠시 들었다. 분명히 머릿 속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내 손은 서서히 움직여 누나의 블라우스 위를 더듬고 있었다.
풍만한 두 가슴에 비해서 너무나 잘록한 그녀의 허리선에 손끝이 살짝 닿자, 그것만으로도 벌써 흥분이 되었다. 미려한 곡선이 이끄는 대로 서서히 위를 향해 손을 움직였지만 누나는 여전히 미동이 없었다. 마른침을 한번 더 삼키고 굳게 마음을 먹은 나는, 항상 야릇한 눈길로 곁눈질만 해왔던 단비 누나의 커다란 가슴 위에 살짝 손을 올렸다.
목구멍으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초침소리와 숨소리만 낮게 울리던 조용한 방 안에 처음으로 소음이 생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살짝 얹기만 했을 뿐인데 너무나도 부드러운 봉우리의 풍만한 감촉이 짜릿하게 느껴져 왔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이성이 다음 행동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나도 모르게 누나의 오른쪽 가슴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순간 부스럭 하는 느낌과 함께 누나의 몸이 미세하게 반응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멈칫 하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손은 가슴을 움켜쥔 그대로였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이상의 반응이 없자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누나의 가슴을 움켜쥔 손에 한층 더 힘을 주었다.
뭉클거리는 젖가슴 특유의 감촉이 느껴졌지만, 다른 여자의 가슴을 만질 때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풍만한 느낌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위를 보고 누워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볼륨감이라니.... 단비 누나의 가슴이 크다는 것쯤이야 아까 누나가 날 끌어안았을 때에도 충분히 실감했던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손으로 만져보니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이만한 볼륨에도 탄력을 잃지 않고 봉긋이 서 있는 가슴의 모양이 신비롭기까지 했다.
항상 훔쳐보기만 했던 그 엄청난 가슴을 만지고 있다니. 상상으로나 해봤던 일이 실제로 재현되고 있다는 비현실적인 감각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너무 세게 만지면 누나가 깨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쯤이야 바보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손은 그러한 이성의 만류를 전혀 귀담아 듣지 않고 있었다. 누나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풀었다 하는 간헐적인 반복이 점점 더 노골적으로 변해가더니, 종래에는 거의 주물럭거린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과감해졌다.
게다가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는 왼손까지 누나의 왼쪽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삼매경에 빠져서 시간이 많이 지난 건지, 아니면 몇 초 밖에 안 지난 건지도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볼륨과 탄력이 넘치는 단비 누나의 풍만한 젖가슴을 양손 가득 주무르고만 있었다.
"후우...."
내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얼굴도 대추마냥 벌개져 있을 것이다.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가 어찌나 큰지 꿈속의 누나가 듣지 못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도 누나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새근거리는 조용한 숨소리만 내고 있었다.
이성은 이제 완전한 마비를 향해 미처 말릴 수도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단비 누나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하나씩 풀어내리기 시작했다. 단추 하나가 풀릴 때마다 안쪽으로 보이는 누나의 하얀 속살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모든 단추를 풀어내리고는 조심스럽게 옷자락을 양쪽으로 넓게 펼쳤다.
꿀꺽 하는 그 소리가 또 한 번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어둠 속이라서 자세히는 볼 수 없지만, 척 보기에도 군살 하나 없는 매끄러운 배의 살결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색깔까지는 모르겠지만 부드러운 실크 소재의 브래지어도 보였다. 왠지 모르게 그 천쪼가리는 단비 누나의 커다란 두 젖가슴을 간신히 감싸고 있기에만도 힘에 버거워 보였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누나의 브래지어를 살짝 위로 걷어올리려 했다. 단비 누나의 젖꼭지는 어떤 모양일지가 너무 궁금했다. 하지만 가슴이 너무 커서 타이트하게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인지 걷어올리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았다. 하다 못해 앞으로 여는 브래지어였다면 차라리 속 편하게 열었을 텐데, 심지어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등 뒤로 손을 넣어서 브래지어를 풀겠다는 생각은 아무리 지금 내가 정신이 나갔어도 지나치게 무모해 보였고, 결국 아쉬운 대로 브래지어 위로 만져야 하나 갈등을 하다가 차라리 다른 곳을 찾기로 하고 서서히 손을 남하시켰다. 그리고 누나의 허리 양쪽에 두었던 무릎의 위치를 다리 밑까지 옮겨 몸을 뒤로 빼어 앉았다.
나는 아까 보았던 그 검정 스타킹 위로 단비 누나의 한쪽 다리를 종아리부터 조심스럽게 쓸어올렸다. 까슬까슬한 스타킹의 감촉 아래에 미치도록 매끄러운 살결의 느낌이 부드럽게 쓸려오자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람이 손 끝의 촉각만으로 이렇게 흥분할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새로운 발견을 한 것 같아 경이롭기까지 했다.
항상 나의 은근한 시선을 잡아끌었던 것은 바로 이 허벅지였다. 눈으로 대충 보기에도 꾸준한 운동으로 다져진 듯 너무나 탄력있어 보였던 그 건강미 넘치는 허벅지. 군침이 돌게 만들었던 그곳의 안쪽면을 살며시 더듬어 보았다. 이성이 마비되었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손에 훨씬 더 힘이 들어갔다.
'진짜 죽이는구나....'
요새 주위에서 흔히들 꿀벅지, 찰벅지 등의 표현을 쓰곤 하던데, 그게 정확히 무슨 느낌인지 이제야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찰지고 탱글탱글한 감촉이 손 안 가득히 짜릿하게 번져나갔다. 탄력이 넘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너무나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사람의 살결이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보지 한 번 만져봐도 괜찮을까....?'
얼굴에 피가 쏠리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흥분이 느껴졌다.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마치 귓가에 폭탄이라도 터지는 듯 했다. 이 허벅지 안쪽에서 조금만 더 손을 위로 올리면 팬티스타킹에 감싸인 단비 누나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까슬까슬한 스타킹의 감촉 위로나마 손 대볼 수 있을 것이다.
"으음...."
바로 그 순간 단비 누나가 옅은 웅얼거림과 함께 몸을 뒤척거렸다. 화들짝 놀란 나는 허벅지를 더듬던 것을 그만두고 재빨리 몸을 뒤로 빼냈다. 아까 전에 가슴을 만지느라 허리 부근에 몸이 올라가 있었을 때 몸부림을 쳤다면 영락없이 내 몸을 건드렸을 텐데, 천만다행으로 다리를 손 대느라 몸이 아래로 내려와 있었기 때문에 잽싸게 뒤로 후퇴할 수 있었다.
이번엔 제법 세게 몸부림을 쳐서, 반듯하게 누워있던 몸이 이제는 반쯤 옆을 보고 눕게 되었다. 나는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할까 싶어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이 정도의 몸부림이 나온 이유는 내가 몸을 주물렀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더 선을 넘고 만다면 누나가 정말로 깰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딱.... 저기까지만 만져보자.'
나는 옆으로 돌아누워버린 덕분에 모습이 드러난 단비 누나의 농염한 엉덩이를 마지막 목표로 삼았다. 좀 전처럼 계속 반듯하게만 누워있었다면 만질 엄두도 못 냈던 곳인데.... 왠지 아까부터 누나의 몸부림이 오히려 내게 긍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쨌든 기회가 왔으니 놓쳐버리고 나면 분명 후회할 거란 생각이 들어 나는 다시 한 번 과감한 추행을 감행해보기로 했다.
엄밀히 말하면 단비 누나의 엉덩이에 손을 대본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자정이 지났으니 어느새 어제의 일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담벼락을 넘는 것을 도와줄 때 한 번 만져보기도 했고, 예전에는 자지 끝으로 한 번 건드려 보기도 했으니....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닿았을' 뿐, 이렇게 노골적으로 만지겠답시고 손을 대본 적은 당연히 없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누나의 스커트가 넓게 퍼지는 팔랑팔랑한 디자인이 아니라 딱 붙는 타이트한 디자인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는데, 엉덩이를 탐하려고 보니 이제는 웃기게도 참으로 번거로운 디자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하늘하늘한 스커트였다면 편하게 걷어버리고 손을 안으로 밀어넣으면 될 일인데, 이런 H라인의 스커트라면 안으로 손을 넣기가 수월하지 않기 때문에 아래로 벗겨내리는 수 밖에 없었다.
'괜찮을까?'
극한의 갈등 앞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묻어두었던 이성이 다시 고개를 번쩍 들고서는 이건 정말 아니라며 욕망을 꺾으려 들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잠시일 뿐, 이내 들었던 고개를 다시 꺾어버리고 만용에 가까운 욕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렇게 떨리는 손으로 과연 스커트를 끌어내릴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나는 이미 단비 누나의 아랫배 근처를 더듬어 조심스럽게 후크를 찾고 있었다. 복잡하게 여러 개의 단추로 되어있는 디자인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고리 형식으로 되어있는 하나의 후크를 풀고 나니 더이상 건드릴 것이 없었다.
이제 단비 누나가 깨지 않도록 밑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문제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몸을 띄우거나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고 누나의 몸을 들어올리자니 이건 정말 위험할 것 같고....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단비 누나가 누운 방향으로 그녀의 등 뒤에서 나란히 몸을 눕혔다. 그리고 후크를 풀어버린 덕분에 어느 정도 허리와의 여유가 생긴 스커트의 빈틈 사이로 손을 살짝 밀어넣었다. 틈새로 손이 들어가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후크를 풀고 나서 생긴 공간이 생각보다 넓었는지 조금 타이트하긴 해도 왼손 하나가 어렵사리 들어가 주었다.
진입하자마자 까슬까슬한 팬티스타킹의 감촉 너머로 엉덩이의 탄력이 손바닥을 타고 짜릿하게 퍼졌다. 미친 듯이 발기한 자지가 트레이닝바지 속에서 용트림을 하다시피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얇은 스타킹의 면 너머로 누나의 엉덩이 살결을 더듬는 기분은, 담벼락을 넘을 때 스커트 위로 더듬었던 것보다도 한층 더 적나라하고 자극적인 느낌을 주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극상의 촉각 앞에 눈 앞이 혼미해지면서 그나마 잔재라도 남아있었던 이성의 끈이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도 그렇고 엉덩이도 그렇고, 이런 말도 안 되는 풍만한 볼륨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탱글탱글한 탄력을 겸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믿기지가 않았다. 힙업으로 인해 튼실한 느낌이 제대로 살아 있는 완벽한 엉덩이가 손 안에 가득히 쥐어졌다.
이쯤되니 단비 누나가 깨든 말든 상관이 없다는 생각마저 서서히 들기 시작할 지경이었다. 나는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힘을 주어서 누나의 엉덩이를 감질나게 주물러댔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이렇게 환상적인 엉덩이를 만질 수 있다는 사실이 직접 경험하고 있는 와중에도 믿어지지 않을 뿐이었다. 내친 김에 팬티스타킹마저도 벗겨버리고 맨 엉덩이의 숨김 없는 살결을 고스란히 느껴보고 싶은 욕망이 마그마처럼 들끓었다.
'진짜 하고 싶다.....'
당장에라도 나는 단비 누나를 발가벗겨버리고 싶었다. 이 거추장스러운 스커트와 스타킹까지 내려버리고 누나의 보지를 구경하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몸을 한 군데도 빠짐없이 구석구석 탐하고, 잔뜩 성이 난 자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녀의 보지에 박아버리고 싶었다.
순식간에 불같이 활활 일어난 성욕이 미칠 듯한 갈증을 내며 섹스를 원하고 있었다. 누나가 깨든 말든 힘으로라도 제압해서 범하고 싶었다. 나는 누나의 엉덩이를 주무르던 왼손을 활짝 펴서 가운데 손가락을 최대한 깊숙히 계곡 안쪽으로 밀어넣어 보았다.
살며시 파고 들어간 손가락 끝이 아슬아슬하게 보드라운 둔덕 끝자락에 가서 살짝 닿았다. 지금 손 끝에서 느껴지는 이 말도 안 되리만큼 아찔한 느낌의 감촉이 아마도 단비 누나의 가장 은밀한 속살일 터였다.....
'안 돼.... 참아야 돼.'
극한의 상황에서 나는 간신히 이를 악물고 이성의 끈을 다시 움켜쥐었다. 아무리 추행과 강간이 종이 한 장 차이라지만, 이 이상 욕망이 이끄는 대로 나아갔다가는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머릿 속에 그려지는 행위를 조금이라도 더 행동으로 옮겼다가는 이제는 정말 단비 누나를 강간해 버리고 말 것이다.
'참아라. 이건 안 돼.'
솔직한 말로, 강간에 대한 법적인 처벌 같은 것이 무서워서 망설이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순간 나의 이성을 붙잡아주는 유일한 족쇄는 그런 것 따위가 아니라 단비 누나가 내게 해준 예전 남자친구의 이야기였다. 누나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던 그 옛 애인.
'똑같은 짓을 할 수는 없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눈 앞에 차려진 밥상을 맛있게 해치우고 입을 슥 닦아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단비 누나를 딱히 사랑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양심의 가책이 심해지는 것 같았다. 마음이 아니라 몸만을 탐했다던 그 남자에게서 이미 많은 상처를 받은 누나에게, 사랑하는 마음도 없이 똑같은 짓을 해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누나가 이렇게 술에 취해 잠들어버린 이유도 그 남자에게 있었다. 누나가 그토록 경멸했고, 그녀에게 그런 고통을 주었던 그 남자와 다를게 없는 잘못을 한다면 그야말로 내가 인간쓰레기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지금 꿈 속에서도 그 남자를 미워하고 있을지 모르는 단비 누나에게 도저히 그런 짓을 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진짜 이대로는 안 되겠다.'
나는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든 성욕을 가라앉혀야겠다는 시급한 생각이 들어 스커트 안에서 손을 빼내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손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아쉬운 마음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더 빨리 화장실로 뛰어들어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 동작이 어찌나 다급했던지 누나가 깼을까봐 뒤를 한 번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을 닫고 변기에 걸터앉은 나는 트레이닝바지를 내려보았다. 힘줄까지 솟을 만큼 성이 난 자지 끝에서 찔끔찔끔 끈적한 액체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변기에 기대어 앉아 자지를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혼자서라도 해결하지 않으면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다.
사정의 순간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힘차게 튀어나간 정액이 화장실 문짝에까지 가서 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분이 사그라들지 않아서 한 번 더 자위를 해야만 했다. 폭풍같은 욕망의 순간이 지나가고 어느 정도 잠잠해지고나자 이성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허탈한 마음에 힘이 쭉 빠져 그 상태로 축 널부러졌다. 욕망이 몸을 지배할 때에는 미처 할 수 없었던 생각들이 이성을 찾고 나니 하나둘씩 떠올라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순간 이성을 되찾지 못했더라면 지금쯤 무슨 짓을 하고 있을까 생각을 하니 모골이 송연했다.
비록 술김에 한 얘기일지는 몰라도 나에게 좋은 누나가 되어주겠다고 하던 누나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 누나가 술이 취해서 뻗었다고 얼씨구나 하여 못할 짓을 할 뻔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누나가 말했던 예전 그 남자와 지금의 내 모습이 뭐가 다를까 싶어 난데없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래도 참았으니까.... 그게 중요한 거겠지.'
허탈함에서 비롯된 자기혐오와, 아슬아슬한 선에서 잘 참아냈다는 내 자신에 대한 대견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서로 상반되는 그 두 감정이 이렇게 기묘하게 뒤섞이는 것을 느끼고 있자니 정말 이질적인 기분이었다.
어렵사리 화장실을 나와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보니 누나는 아까 전의 자세 그대로였다. 나는 누나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아까 풀었던 스커트의 후크를 다시 채우고는, 블라우스의 단추도 하나하나 다시 채워주었다. 옆으로 누워있었기에 단추를 모두 채워주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팔에 가려져서 목덜미 부근의 가장 가까운 단추 하나를 채울 수가 없었다. 그 단추는 원래 처음에 채워져 있었던 것이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 포기하고 다시 바닥에 누워 아까 전처럼 애벌레마냥 이불로 몸을 돌돌 감았다.
구석에 찌그러져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젠 무슨 일이 있어도 몸을 일으키지 않으리 나는 굳게 다짐했다. 처음부터 이런 다짐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만은....
고요한 적막이 방 전체에 아득히 내려 앉았다. 초침소리는 다시 아까 전처럼 100배는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베게에 더욱 단단히 얼굴을 묻었다. 설령 잠이 안 와서 이 상태로 날밤을 새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이 눈을 다시는 뜨지 않을 생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 왜 안 했어?"
하지만 불과 바로 다음 순간 그 결심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 짙은 적막을 깨고, 귓전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희미하지만 너무나도 또렷하게 울렸기 때문에.....
그 순간 나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저 말이 잠꼬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너무나 쉽게 구별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절대 뜨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내 두 눈이 등잔만큼 떠지면서,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단비 누나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바닥에 누워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나는 대답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였다. 입을 연다고 하더라도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 자니?"
또 한 번 단비 누나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왔다. 방금 전의 목소리로 짐작은 했지만, 역시 깨어있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확실하게 증명해주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춥잖아.... 여기 올라와서 자."
나는 제발 누나가 내가 잠들었다고 생각해주기를 바랐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얼굴을 마주 대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새우처럼 허리를 굽히고 이불을 몸에 친친 감은 그대로 아무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누나가 침대에서 내려와서 내게 말을 붙이는 일만큼은 없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
단비 누나도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떨리는 심장을 안고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방 안에 다시 내려앉는 고요한 적막을 느끼면서, 그리고 억지로 다시 감은 이 두 눈을 절대 뜨지 않으리라 맹세하면서.
"승태야, 너 감기 걸려. 얼른 일어나."
어느새 살풋 조각잠에 들었나 싶더니 나를 깨우는 단비 누나의 목소리가 들리길래, 나는 순간 이 여자가 결국 침대에서 내려와서 나한테 말을 붙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리창 너머로 밝게 스며들어오는 아침햇살을 느끼고 나서야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아침이 밝아 있었던 것이다.
"어... 음... 지금 몇 시에요?"
이 질문을 던지는 내 몰골이 굉장히 얼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 봐도 훤히 알 수 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재미있다는 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단비 누나와 시선이 마주치니 새삼 얼굴이 붉어졌다.
"8시. 우리 아침 먹자."
8시라니.... 그렇다면 오래라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한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죽어도 잠이 올 것 같지 않더니 그래도 어떻게든 그 와중에도 잠이 들었나보다. 나는 지은 죄가 있다보니 떳떳하지가 못해서 괜시리 고개를 푹 숙였다. 단비 누나와 계속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가는 혼자 제 발 저려서 횡설수설을 해버릴 것 같았다.
"으음, 누나 잘 잤어요?"
시선을 내리깐 채로 최대한 태연하게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덜덜 떨리는 내 말투는 차라리 코미디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단비 누나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 원치 않게 중간에 한 번 깨기는 했지만 뭐 그럭저럭...."
누나의 대답에 내 얼굴이 더더욱 시뻘개졌다. 지난밤의 잘못으로 찔리는 구석이 많은 나는 제대로 말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누나는 특유의 아이같은 웃음을 깔깔 터뜨리더니 내 등을 기세 좋게 퍽퍽 두드렸다.
"더 늦으면 식당 닫을 거야. 빨리 가자."
"네에...."
하지만 문득 나가려고보니 남자 기숙사에서 단비 누나를 조용히 데리고 나가는 것부터가 커다란 난관이었다. 나는 헬쓱한 몰골로 복도를 이리저리 살피며 단 한 명의 인기척도 없을 때까지 망을 보아야 했다. 어느 순간 비로소 복도에 한 사람도 지나다니지 않을 타이밍이 오자 나는 누나에게 신호를 주었고 우리는 한 몸이라도 된 듯 쏜살같이 비상계단을 향해 뛰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남자 층에서 남녀가 같이 타는 모습을 다른 학생이 보게 되면 좋을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7층이나 되는 높이에서 비상계단을 타고 겨우 1층 로비까지 내려온 우리는 서로 숨을 헉헉거리며 얼굴을 마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단비 누나가 다시 뜻 모를 웃음을 터뜨렸고, 그 미소에 불편했던 마음이 왠지 모르게 조금은 편해지는 것 같아 나도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영양사 아주머니들이 우리의 쓰린 속을 어떻게 알았는지 웬일로 아침은 콩나물국이었다. 해장하는 기분으로 실컷 아침밥을 먹은 우리는 다시 로비로 나왔다. 나는 단비 누나가 방으로 올라갈 수 있게끔 여성 기숙사의 엘리베이터 앞까지 누나를 바래다 주었다.
"그.... 푹 쉬세요, 누나."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시선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더듬더듬 작별 인사를 건네자 단비 누나가 엘리베이터에 타려다 말고 나를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이윽고 누나의 입이 열렸다.
"혹시 어제 여기서 했던 말 기억나니?"
"무슨 말이요?"
"뽀뽀 내킬 때 해준다 그랬잖아."
그러고보니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왜요?"
다음 순간, 미처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단비 누나의 입술이 내 오른쪽 뺨에 와서 살짝 맞닿았다. 트고 메마른 내 입술과는 다르게 물기라도 머금은 듯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의 감촉이 볼에 닿았다 떨어졌지만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전혀 감도 못 잡고 멍하니 얼이 빠져 있었다.
"누, 누나."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단비 누나가 살며시 들었던 까치발을 내리고 있었다. 아직도 무슨 상황인지 당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내게 단비 누나가 놀리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계속 느낀 거지만, 넌 변태가 거의 확실한 것 같애."
"......네?"
어안이 벙벙하여 바보처럼 누나의 얼굴만 들여다볼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 얼굴을 잠시 동안 마주 올려보더니 다시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근데 가만히 보니까, 나쁜 변태는 아닌 것 같은걸."
"......"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단비 누나의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문 틈새로 보았던 누나의 마지막 표정이 싱긋 웃고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는 와중에도 저절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나가던 몇몇 학생들이 아침부터 저게 뭐하는 짓이냐는 등의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단비 누나의 입술이 닿았던 뺨 언저리를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아직도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느껴지는 듯 했다. 헛것을 본 것은 아니라는 유일한 증거였다.
주말이 되자 마자 나는 약속대로 집에 들릴 채비를 했다. 사실 채비랄 것까지는 없고, 그냥 호실 문 단속이나 잘 해두는 정도였다. 혜진이의 말대로라면 꽤 보기 싫은 얼굴을 보게 될 것임이 거의 분명해 보였기 때문에, 혹시라도 쓸데없는 말다툼을 할 일이 없게끔 애초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집 앞에 도착하여 초인종을 누를 때만 해도 여느 때처럼 혜진이가 가장 먼저 달려나와 반겨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 밖에도 새어머니가 문을 열어주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선 나는 이내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 승태 왔느냐?"
거실에는 늘상 보았던 우리 가족, 그러니까 혜진이, 아버지, 새어머니를 제외하고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물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아니나다를까 고모부와 꼴보기 싫은 명수놈이었다.
"왔으니 일단 너도 앉거라."
고모부네 집도 아니고, 아버지가 뻔히 같은 자리에 계신데 마치 집주인 행세를 하듯이 앉으라 마라 하는 고모부의 언사가 조금 못마땅했지만 별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애 방금 들어왔는데 우선 손발이나 씻고 얘기해요."
새어머니가 나를 챙겼지만 고모부의 옆에 앉아있는 그 아들놈은 그 꼴이 꽤 못마땅했는지 혼자 궁시렁거렸다.
"앉으라면 앉는거지 뭘.... 쯧."
한명수. 내 사촌형이 되는 사람이었지만 여태껏 형으로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는 재수없는 놈이었다. 군대 갔다와서는 처음 보는 것이니 마지막으로 얼굴 본게 적어도 3년은 넘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새어머니와 혜진이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저 밉살스런 태도는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간단하게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야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서는 다섯 명이 둘러앉아 한창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는데, 솔직한 말로 그리 화목해보이진 않았다. 나는 고모부에게 인사를 하고 혜진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혜진이는 내 얼굴을 보고 반가운 듯 배시시 웃었지만 그 웃음에는 어쩐지 힘이 없었다.
"그러니까 말이다, 혜진아. 재수도 아무도 하는게 아니야. 진짜 대학 가고 말겠다는 의지, 1년 동안 잠 잘 시간까지 쪼개가면서 독하게 공부할 수 있는 그런 애들만 재수하는거지. 아니면 그거 돈낭비야. 재수하는 애 밑에 들어가는 돈 얼마나 되는지 너도 대충은 알지?"
고모부는 혜진이를 앉혀놓고 일장연설을 펼치고 있었다. 명수놈은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리며 가끔씩 제 아빠의 말에 한두마디씩 추임새를 넣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꼴사나울 수가 없었다.
"그럼요. 저도 재수 생활 해봐서 아는데 그게 절대 쉬운게 아니거든요. 외삼촌도 아시겠지만 저도 정말 이 악물고 공부해서 겨우 명문대 들어간건데, 혜진이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웬만한 독기로는 힘들 텐데...."
"그러게 말이다. 재수 학원을 보낸다고 해도.... 생전 공부를 안하던 애가 갑자기 잘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게다가 거기에 맞장구까지 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괜히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나는 혜진이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어쩐지 들어올 때부터 힘이 없어보인다 했는데 오고 가는 얘기를 들어보니 그럴 만도 했다. 평소의 혜진이답지 않게 침울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안쓰럽기도 했고,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삼수해서 겨우 대학 들어간게 뭐 그리 자랑이라고."
나는 혼잣말을 하듯 지나가는 말로 툭 던졌지만, 그 목소리가 결코 작지 않았기에 한순간 거실에 있는 모두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들으라고 한 말이었기에 별로 당황스럽진 않았다. 명수는 눈쌀을 찌푸리며 나를 보았다.
"뭐야?"
"아무 말 안 했다."
혜진이가 내 팔을 툭 건들면서 그러지 말라는 눈치를 주었지만 나는 능청스럽게 딴청을 피웠다. 나를 노려보는 명수놈의 눈빛은 더욱 험악해졌다. 하지만 딱히 반박할 말도 없는지, 다른 문제로 시비를 걸어 왔다.
"넌 오랜만에 보는 형한테 인사도 없냐?"
고모부에게 인사했으면 됐지, 달리 뭘 더 바란단 말인가.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형이 형 같아야 말이지."
"어허, 승태야. 형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아버지의 꾸지람이 떨어졌지만 나는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옆을 보니 내 성질을 잘 아는 혜진이가 불안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하다는 듯 아주 복합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른들 앞이라서 더이상 신경전을 벌이진 않았지만 명수놈이 나를 노려보는 아니꼬운 시선은 신경을 안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다. 하기사 우리는 예전부터 쭉 이런 관계였다.
아버지의 재혼 이후 한창 방황했을 때, 나는 거의 집안의 골칫거리나 다름이 없었다. 허구헌날 주먹질을 하고 깽값을 물어주는 것이 일상이었던 그 시기에, 나는 문제아라는 꼬리표를 달고서 외가와 친가 양쪽에서 안 좋은 소문을 타고 친척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 때 온 집안을 통틀어 나를 가장 손가락질 했던 사람이 바로 저 사촌 형이었다.
그 당시의 한명수는 나를 거의 무슨 벌레 보듯이 경멸하고 무시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온 가족이 모일 때마다 내게 그렇게 살다 인생을 조질거라고 설교를 해대며 형노릇을 하려 들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새어머니에게 나 같은 놈은 일찌감치 대학을 포기하고 기술이나 배워서 먹고 살게 하는 것이 나을 거라고 입방정을 떨어대기가 일쑤였다.
그러다가 정작 지놈이 대학 입시를 말아먹고나서는 재수로도 모자라 삼수를 했다. 삼수 끝에 알아주는 명문대에 들어갔답시고 그 때부터 틈만 나면 거드름을 피웠는데,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진 못 했다. 그 다음 해에 내가 보란 듯이 더 이름 있는 명문대에 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가망 없는 양아치라며 쓰레기 취급하고 한껏 무시해왔던 내가 심지어 재수도 없이 한번에 덜컥 자기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내고 나니 할 말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자 형노릇은 포기했는지 그 때부터는 애J은 혜진이에게로 화살을 돌렸는데, 평소 혜진이가 공부에 관심이 없다는 점을 구실 삼아 틈만 나면 설교를 하려고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엔가, 내가 혜진이를 감싸고 돌면서 조금 말다툼이 붙은 적이 있는데, 그 때 죽은 누나를 들먹이며 잊지 못할 시비를 걸어왔다.
미처 참지 못한 내가 사촌 형을 두들겨 패는 웃지 못할 사건이 일어났고, 그 때부터 아버지와 고모부의 사이도 덩달아 서먹해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듣기론 나 군대 가 있을 동안 아버지와 고모부의 사이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고해서 나와 사촌 형의 사이가 좋아졌을리는 없었다.
그 때 이후로 우리는 처음 얼굴을 맞대는 것이었는데, 눈빛을 보니 그 때 일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앙금을 품고 있는 듯 했다. 그러니 당연히 분위기가 좋을 턱이 없었다. 아버지도 그런 사실을 대충은 알고 계셨기 때문에 더 크게 꾸중을 하거나 하지는 않으셨다.
"명수 너, 이번에 졸업하고 좋은 회사 취직했다고 들었다."
"예. 그런대로 괜찮은 곳입니다."
명수 녀석이 여전히 내게 아니꼬운 눈빛을 보내며 아버지의 말에 건성으로 답했다. 그러자 고모부가 내게 질문의 화살을 돌렸다.
"승태 너는 졸업하고 뭐할 생각이냐?"
고모부의 말에 나는 마땅히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아직 뚜렷하게 목표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없거니와, 있다고 해도 이런 자리에서 굳이 세세하게 털어놓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그걸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고모부의 쓴소리가 또 시작되었다.
"나중에 가서 생각하면 늦다. 남들 다 하는 어중이 떠중이 같은 일 하면서 허송세월 할 생각 말고 어서 목표를 잡거라. 나이 먹고나서도 집안 신세 지고 싶진 않을 테니."
"......"
저 설교는 아마 집안 내력인 것 같다. 나는 뭐라고 굳이 대꾸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아서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그러자 새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만류하고 나섰다.
"오랜만에들 봤는데 너무 딱딱한 이야기만 하지 말고 과일이라도 좀 들어요."
"이럴 때 아니면 저 녀석 얼굴 볼 일이 있어야지."
"그래도 승태가 제 앞가림은 알아서 잘 하는 애에요."
아버지가 재떨이에 담배를 툭툭 털고 나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저 녀석이야 안 될 것 같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번듯한 학교 들어가서 잘 하고 있으니까.... 혜진이가 걱정이지."
이야기의 화살표가 다시 자신에게로 와서 꽂히자 혜진이가 슬그머니 들고 있었던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너무나 의기소침한 동생의 모습에 가슴이 아프다 못해 눈쌀이 찌푸려졌다. 여태껏 혜진이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 못 들어간 것이 뭐 그리 큰 잘못이길래 저렇게 풀이 죽어 있어야 하는 건지....
"명수 네가 공부를 잘 했으니까 가끔씩 혜진이 공부도 봐주고, 과외도 좀 해주고 그래라."
나는 아버지가 진심으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순간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어딜 봐서 저 놈이 공부를 잘했다는 걸까? 혜진이의 표정을 흘끗 보니 나와 마찬가지 생각인지 입을 딱 벌리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하, 어느 정도 기초는 되어 있어야지 제가 가르쳐보기라도 하는데...."
"저, 저도 싫어요. 공부는 우리 오빠가 더 잘 하는 걸요."
잠자코 있었던 혜진이가 사색이 되어 처음으로 볼멘 소리를 내자 나는 그만 헛웃음이 나왔다. 고모부와 명수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가만히 냅두었다간 또 혜진이가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 혜진이도 재수하면 잘 할 수 있어요. 저도 1년 공부해서 대학 들어갔으니까요. 제가 혜진이 옆에서 잘 봐줄 테니까 너무 걱정마세요."
아버지가 담배를 피시다 말고 놀라서 나를 보았다. 집안 꼴이 어떻게 돌아가든 관심없다는 듯이 겉돌면서 살아온 내가 이런 뜻밖의 얘기를 하자 적잖이 놀라시는 눈치셨다.
"대학은 못 갔어도 혜진이 얼마나 좋은 딸인지 아시잖아요. 공부는 지금부터라도 하면 되니까 너무 기죽이지 마세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아버지는 아실 터였다. 혜진이의 노력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와 아버지의 벽은 지금까지도 허물어지지 않았을 테니.
"알았다.... 모처럼 집에 왔으니 이런 얘기는 그만두자꾸나."
그렇기 때문인지 아버지도 다소 불손한 내 말을 받아주시는 듯 했다. 지겨웠던 대학 얘기가 끝나자 혜진이는 그나마 조금 숨통이 트이는지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명수 녀석은 심히 불만스런 표정이었지만, 어찌되었건 그 이후로 혜진이의 얘기는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혜진이가 옆에 앉은 내 무릎에 손가락으로 보이지 않게 글씨를 슥슥 쓰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엔 가렵기만 하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데, 한 서너번 반복해서 쓰는 것을 가만히 추리해보니 아마도 고맙다는 말인 것 같았다.
"그냥 말로 하면 되지 뭘...."
내가 조용히 귓속말을 하자 혜진이가 귀엽게 배시시 웃었다. 어느새 아버지와 고모부의 대화는 증권 투자와 같은 흥미 없는 화제로 넘어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슬쩍 일어서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오빠 오늘 뭐 해?"
혜진이가 가족들에겐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내 귓가에 물었다.
"집에 왔으니 쉬어야지. 뭐 하긴...."
"우리 나가 놀자."
"고모부도 있는데 어떻게 나가?"
"좀 있음 가실 거야."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혜진이가 옆구리를 콕콕 찔러댔다. 뭔가를 재촉하거나 할 때 쓰는 손버릇이었다.
"알았어. 이따 보고."
그러자 혜진이가 기분이 좋은 듯 빙긋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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