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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그녀들의 마음은 ? - 6부

일병 사다리도박사

1범

2014.06.23가입

조회 2,208

추천 2

2014.10.24 (금) 14:37

                           


감동넘치는 로맨스 명작
그녀들의 마음은 ? - 6부


"교, 교수님... 어쩐 일로...."



유가희 교수는 나의 말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해가 뉘엿거리며 저물어가는 캠퍼스를 둘러보고는 다시 싱그럽게 웃었다. 어쩐지 굉장히 시원한 느낌을 주는 웃음이었다.



"하하, 제가 일하는 학교에 제가 있는게 이상한가요?"



"아, 아뇨... 그런건 아니지만."



하기사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수업시간에 교수님으로서 마주하게 되는 분을 이렇게 캠퍼스에서 단 둘이, 그것도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보고 있으니 굉장히 낯선 기분이 들었다.



"오늘 마지막 강의가 끝나서 퇴근하려는 길에, 아는 학생의 얼굴이 보이길래요. 아까 그 수업에 계셨지 않나요?"



"아... 네. 그럼 그 수업이 마지막이셨나봐요?"



"다행히도 오늘은 야간 수업이 없거든요."



이렇게 가까이서 유가희 교수를 보고 있으니 괜스레 가슴이 뛰었다. 물론 외래강사 중에서도 특히 나이가 젊은 축에 든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 교수님이란 이미지로는 잘 느껴지지 않는 것 쯤은 그렇다 할 수 있었지만, 그런 것보다도 칠판 앞에서 강의하는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으니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 자자한 그녀의 미모가 더욱 실감나게 돋보이는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오똑하게 선 콧날이 전형적으로 선이 뚜렷한 미인이었다. 그 선명하고 시원시원한 매력은 어쩐지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와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건 그렇고, 지나가던 길에 보니까 무슨 큰 고민거리라도 있는 것 같던 걸요?"



"혹시 보셨나요?"



"그럼요. 머리 이렇게 싸매고 흐아아 하시면서 절규하는 모습이...."



"......."



그 창피한 꼴을 보았다니. 왠지 모르게 수업시간에 얼굴을 맞대기 민망해지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냥.... 조금 그런 일이 있다보니...."



차마 '관심 있었던 여자한테 막말을 하고 나니까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라는 식의 유치뽕짝한 고민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상대방이 이런 미인이라면 더더욱....



"흐음."



유가희 교수는 한 쪽 다리 위에 턱을 괴고는 이모저모를 관찰하듯이 내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 시선에 내가 부담을 느낄 쯤이 되자 그녀는 살풋 웃더니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 모습은 아까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네요."



"네? 아까라니요?"



"기억 안 나요? 아까 수업시간에 나한테 얘기했던 거."



그녀는 아마 내가 아까 전에 자신의 말을 지지해 주었던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편을 들어주었다고 말할 만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그걸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주저하는 듯 하면서도 자신있게 할 말을 다 하는 모습이 꽤 보기 좋았어요. 그게 살짝 멋있어 보여서 조금 관심도 갔었는데, 이런 면도 있을 줄 몰랐네요. 의외인걸요?"



순간 나는 무슨 의미일까 싶어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내 혼자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할 이유가 없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강사가 교육자의 입장에서 학생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걸 굳이 수상한 의미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마 나한테 문제가 있기 때문이리라.



"꺼내기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면 한 번 말해 봐요. 제 수업을 듣는 학생이 끙끙거리고 있는데 그냥 지나치고 싶진 않네요."



그녀가 다시 한 번 생긋 웃었다. 나는 이 웃음을 자꾸 미묘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 내 자신을 속으로 나무랐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입장이란 것은 알고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은근히 계속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았다.



"흠흠,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대단한 일도 아닌데 그렇게 절규할 정도라면 아마도 여자 문제인가보죠?"



사레가 들어 기침이 튀어나올 뻔 한 것을 간신히 넘겼다. 당황한 내가 고개를 들어 교수의 얼굴을 보니 그녀는 잔잔하게 웃고 있기만 했다.



"이래봬도 강사 이전에 여자로서의 직감도 꽤 뛰어난 편이랍니다."



"그, 그러시군요."



아닌 척 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수긍하고 말았다. 그녀는 마치 속을 궤뚫어보는 듯한 깊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뭐 그렇다면 남에게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군요."



"그렇다기보단.... 아직 이렇다 할 어떤 사이도 아닌데 그저 나 혼자 고민하고 있는 문제라서요."



"아까 옆에 앉아 있었던 그 여학생과 말이죠?"



혹시 이 여자가 독심술을 쓰는게 아닌가 싶어 신기할 정도였다.



"어떻게 그걸...."



"척 보기에도 그 여학생에게 관심이 있다는걸 쉽게 알 수 있던 걸요? 교탁 앞에 서 있으면 안 보는 것 같아도 학생들의 모습을 두루 살펴보게 되니까요."



"그럼 모든 학생들을 그렇게 세심하게 살펴보시는 건가요?"



"글쎄요. 그렇진 않을 걸요. 아무리 그래도 100 명이 넘는 학생들을 다 관찰하기는 힘들겠죠?"



유가희 교수는 뜻 모를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아까 전의 그 싱그러운 웃음과는 다른 느낌을 주는, 어딘지 모르게 고혹적인 느낌마저 느껴지는 그런 미소였다.



"아무튼 그 여학생 참 예쁘더군요. 올해로 어느덧 꽤 많은 강의를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정도 미모를 가진 학생은 처음 보았으니까요. 그렇죠?"



"그렇긴 하지만 그만큼 가시도 많은 것 같던 걸요."



그러자 유가희 교수가 재미있다는 듯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애매한 느낌의 묘한 미소에서 다시 해맑고 싱그러운 느낌의 웃음으로 돌아온 듯한 모습이었다.



"꽃은 잘 모르겠지만 여자는 달라요. 아름답기 때문에 가시가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가시가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경우도 있는 법이니까요."



"무슨 말씀이세요?"



"한 번 잘 생각해 봐요."



유가희 교수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얼떨결에 나도 따라 일어났다. 해가 빠르게 저물어가고 있어서 이제는 저녁노을이 아닌 어둑어둑한 그림자가 주위를 덮어가고 있었다.



"그 여학생이 좀 부럽네요."



"네?"



무슨 의미인지 몰라 내가 반문하자 그녀가 또 한 번 웃었다. 



"젊고 예쁘니까요. 후후, 그건 참 중요하지요. 저처럼 나이가 들기 시작하면 그게 너무 부러워지거든요."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교수님도 충분히 젊고 예쁘세요."



"아하하, 빈말이라도 기분이 좋네요. 하지만 그런다고 학점을 잘 주진 않아요."



"정말이에요. 저희 학교 남학생들 사이에서 교수님 소문은 자자하던걸요."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실 없는 소리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코트 자락을 살짝 여미고는 내 얼굴을 마주보며 뜻을 알 수 없는 윙크를 날렸다. 그리고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뒤돌아서 훌쩍 가버렸다.



"어찌됐건, 기운내고 수업 열심히 들어요. 꽤 눈 여겨 보게 될 것 같으니까."





















기숙사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내내 나는 마음이 뒤숭숭했다. 머릿 속으로는 자꾸만 유가희 교수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 내용이 아닌 듯 하긴 한데, 그러면서도 어쩐지 유혹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던 그녀의 분위기를 떠올리니 괜스레 마음이 들떴다. 어쩌면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착각도 병이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서 머릿 속에 떠오르는 유가희 교수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하지만 애써 그 얼굴을 지우고 나니, 이번엔 또 새로운 여자의 얼굴이 머릿 속에 뭉실뭉실 떠올랐다. '유혹적인 여자'라고 하니 자연스럽게 연상이 되고 마는, 최근에 알게 된 어떤 누나의 얼굴이었다.



'단비 누나는 뭐하고 있을까?'



그러고보니 오늘 식당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저녁을 굶는 건지, 아직 밖에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매일 보이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궁금증이 일었다. 



얼마 전에 단비 누나와 서로 연락처를 교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화를 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어차피 아홉시쯤 운동 시설로 내려가면 그녀를 볼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예상은 틀렸다. 시간에 맞추어 지하로 내려갔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의 모습은 여기서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쉬는 건가 싶어 괜히 허탈한 마음이 든 나는 운동도 하는 듯 마는 듯 대충하고 다시 호실로 올라와 샤워를 하고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백설미. 백설희....'



나는 오늘 이름을 알게 된 그 두 자매를 떠올렸다. 서로 꼭 닮았으면서도 너무나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던 그녀들. 둘이 합쳤다가 공평하게 반반씩 나누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면 훨씬 다가가기도 쉬울 텐데.



'에이. 무슨 생각 하는 거야.'



관심을 끊으려고 했지만 한 번 붙인 관심을 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에게서 느꼈던 그 미증유의 막연한 이끌림을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설미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일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이기만 했다. 



'많이 화났을까?'



왠지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차가운 분위기만큼이나 자존심도 무척 셀 것 같았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내가 그런 막말을 퍼부었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을 리는 없을 것이다. 나는 다음 수업시간에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볼 생각을 하니 그만 속이 갑갑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같은 조로 계속 볼 사이야. 이렇게 찝찝하게 지낼 순 없지.'



나는 기회가 되면 그녀에게 아까 전 일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사과를 하던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따지고보면 내가 잘못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런 분위기에서 조별 활동이라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녀의 성격으로 봤을 때 먼저 사과를 해올리는 결코 없으니 좀 억울하긴 해도 먼저 숙이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사과를 하던 안 하던 그녀에게서 단결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소리로 들렸지만.... 문득 같은 조로 지목 받은 그 두 남녀의 얼굴도 동시에 떠올랐다. 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던 그 남자와 여자친구로 보이던 그 여자.... 하긴 어차피 시작부터 이미 우리 조는 멤버부터가 콩가루의 조짐이 여기저기에서 보이고 있었다. 



'일단 사과는 하자. 내가 함부로 말을 한 실수도 있으니까.'



결국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와 얘기를 해 볼 필요성을 느끼고 마음을 다잡았다. 좋은 관계가 되어보겠다는 흑심이야 제쳐놓고서라도, 이대로 계속 지낼 수도 없었다. 아까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녀도 이제 내 얼굴을 기억하는 것 같은데, 내친 김에 그 날 골목길에서 있었던 일까지 모조리 얘기해 볼 생각이었다. 게다가 날 치한으로 생각하고 있다니.... 이건 정말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 위이이이잉.



굳은 다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진동이 터지면서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받아보니 익숙한 볼멘 목소리가 귓전을 가득 메웠다.



[오빠, 왜 집에 안 와?]



".....혜진이?"



그러고 보니 입시에서 떨어진 여동생을 달래주려 한 번은 집을 방문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여태껏 시간을 내지 못했다.



[흥! 역시 오빠는 거짓말쟁이야. 내가 걱정되지도 않는 거지?]



"아냐, 아냐. 그럴 리가. 개강하고 나서 정신 없어서 그랬어. 안 그래도 이번 주말에 바로 가려고 했었지."



졸지에 예정에도 없던 주말 집 방문 계획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정말이야? 이번 주말에 오는거지?]



"그래. 그러니까 얌전히 집에 있어. 요새 하는거 없다고 놀기만 하고 그런거 아니지?"



[헤헤... 맞는데.... 그게 다 오빠가 신경을 안 쓰니까 그런거 아냐.]



그래도 목소리를 들어보니 지난 번에 통화할 때처럼 침울하지는 않은 듯 하여 꽤 안심이 되었다. 



[오빠, 그러고보니 주말에 고모부랑 명수 오빠도 온댔어.]



"왜?"



썩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모르겠어. 얘기 들어보니까 명수 오빠 이번에 졸업하고 좋은 회사 취직했다던데. 그거 때문에 아빠한테 축하 받으려고 오는거 아닐까?]



"또 재수 없는 자랑질 엄청 하겠구나."



친척 관계상 사촌 형뻘이 되는 사람이었지만, 되도록이면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그 상판떼기 보기 싫은데 그냥 다음 주말에 갈까?"



[싫어! 이번 주말에 와.]



"왜?"



[그 오빠 성격 잘 알잖아. 나 대학 떨어졌다는거 알고 나면 또 얼마나 비웃겠어. 힝... 오빠라도 내 편 들어줘야 내가 그래도 기를 펴지. 아니면 나 눈치 보여서 죽어야 돼.]



혜진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차마 뭐라고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 주에 와라, 오빠. 응? 응?]



"알았어, 알았어."



여태껏 집에 들르기로 한 약속도 미뤄왔는데 이 부탁마저 거절하면 혜진이가 정말 단단히 화가 날 것 같아서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헤헤, 약속한 거야. 그럼 이번 주말에 꼭 보는 거다! 기다릴게.]



"그래."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또다시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아 핸드폰을 베개 너머로 휙 던졌다. 그렇지 않아도 지끈거렸던 골머리가 전화 한 통 때문에 더욱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런 푸념도 잠시, 머리맡으로 던져버린 전화가 다시 울렸다. 



"혜진이니?"



방금 끊은 전화가 다시 울려오자 당연히 혜진이가 남은 말이 있어서 전화했겠지 싶었는데, 액정 너머에서는 잠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혜진이는 누구야? 혹시 여자친구?]



들려온 목소리는 혜진이의 것이 아니라 꽤 퉁명스러운 톤의 다른 목소리였다. 그것도 꽤나 익숙한 여자 목소리.



"단비 누나?"



[허허, 묻는 말에 대답을 하시죠, 건강남 씨?]



"......."



그 때 일어난 잊지 못할 사소한 해프닝 이후로 그녀는 줄곧 나를 이렇게 부르며 놀려먹곤 했다. 한 이틀쯤 놀리고 그만두겠지 하는 마음으로 내버려 두었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꾸준히 놀려먹는 것을 보니 단단히 재미가 든 것은 물론 이제는 아예 입에 붙어버린 모양이었다.



"여자친구 아니고 제 여동생 이름이에요. 방금 전까지 통화해서....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요?"



단비 누나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혀가 꼬이고 있었다. 항상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화려한 어록을 구사하던 그녀였기 때문에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변화였다. 



[헤헤, 한 잔 했지이... 그것보다 너 지금 뭐해?]



"그냥 기숙사에 있어요. 왜요?"



[잘 됐네. 1층으로 좀 내려와.]



"네? 왜요?"



[왜긴 왜야.... 짜식이.... 내가 누난데 오라면 와야지....]



마치 궁시렁거리듯이 옹알이를 하던 그녀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뚝 끊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잠시 멍하니 손에 든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일단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었다. 간단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는 기숙사 호실 키와 사생증 카드를 챙기고 1층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뭐해요?"



오늘 하루는 참 복잡한 일이 여기저기서 많이도 일어나는 날인가보다. 나는 멀뚱한 표정이 되어 현관 유리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밖에서 오들오들 떨고 서 있는 단비 누나에게 유리 너머로 물었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마치 감방 면회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어찌나 추운지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단비 누나가 유리문에 호호 입김을 불어 희뿌연 그림판을 만들더니, 손가락으로 거기에 글씨를 슥슥 썼다.



[나 들어가게 해 줘.]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유리창 너머로 단비 누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보아하니 또 본인의 카드를 쓸 수가 없어서 저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손목시계를 흘끗 내려다 보았다. 이미 입실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지금 출입기록을 남기면 지난 번에 이어서 또 한 번의 감점기록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일찍 일찍 좀 다녀요."



하지만 유리문 너머의 그녀에게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다만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두 손을 마주 잡고는 애원하는 눈빛을 계속해서 보내오고 있을 뿐이었다. 추운 밤바람에 그녀의 코끝이 살짝 빨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찌되었든 누나를 이대로 놔둘 수도 없는 것이니.



"음?"



나는 왠지 이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가지고 내려온 사생증 카드를 바코드에 대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카드를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제스처로 그녀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복도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 어어?"



단비 누나는 눈 앞에 짠하니 나타난 내 모습을 보고서 얼빠진 소리를 냈다. 나는 왠지 우쭐해진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요?"



"방금 전까지 안에 있었던 애가 어떻게....?"



식당 출입구와 복도 양쪽 문이 굳게 잠긴 지금 이 시간에 밖으로 나올 수 있는 통로라고는 여기 이 바코드가 설치된 유리문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방금 그녀의 눈 앞에서 유리문을 내버려두고 어딘가로 사라졌는데, 잠시 후에 다른 곳에서 이렇게 불쑥 나타나 밖에 있는 모습을 보여주니 그녀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이쪽으로 와요."



나는 마냥 신기해하는 그녀의 손을 이끌고 기숙사 건물을 반대편으로 돌아 후문 근처까지 내려갔다. 그곳은 지반이 내리막길로 되어있어 점점 땅이 낮아지면서 기숙사 지하층과 맞닿는 부분까지 이어지는 곳이었다. 나는 지하 세탁실의 창문 위치를 확인하고는 그녀에게 손짓했다.



"저 창문으로 들어가는 거에요."



"뭐어?"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내 키보다 머리 몇 개 정도는 더 높은 곳에 있는 창문 위치를 보았다. 확실히 대형 유리로 되어 있는 세탁실의 창문 크기는 잘만 하면 성인 남성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넓었지만 문제는 높이였다. 세탁실은 지하 1층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후문 쪽의 내리막은 꽤 길게 이어져 있어서 이 위치의 지반에서는 이미 기숙사 건물의 지하를 훌쩍 넘어 아래로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길 어떻게 올라가?"



"자신 없어요?"



"당연한 거 아냐?"



하기사 여학생이 손쉽게 여기를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면 이미 이런 꼼수는 진즉에 발각되어 폐쇄당했을 것이다. 나는 잠시 곰곰히 고민하다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올라타세요."



"에엥?"



단비 누나가 무슨 소리냐는 듯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목을 들이밀면서 그녀에게 어서 무등을 타라고 재촉했다. 나는 짐짓 단호한 척 하며 말했다.



"저두 감점 관리 해야하는 입장이에요. 맘 같아선 편하게 들어가게 해드리고 싶지만 저두 다음 학기 생각을 해야하니까 어쩔 수 없어요. 그나마 이렇게 방법이 있으니까 다행 아니겠어요?"



"그, 그건 그런데... 저기 진짜 넘어갈 수 있을까?"



"저 군대 가기 전에 자주 써먹었던 방법이에요. 이 허술한 부분이 2년이 지나도록 그대로라니...."



단비 누나는 머뭇거리며 곰곰히 생각해보는 듯 하더니 이내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는지 주춤주춤 내 목 위에 엉성하게 발을 올렸다. 솔직히 이런 상황을 조금은 의도했기 때문에 적잖이 양심이 찔렸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으며 양 쪽 어깨에 그녀의 두 다리가 무사히 안착했는지 확인했다.



누나의 몸에서 은은한 술냄새가 났다. 어쩌면 술기운이 조금 더 거부감을 없애줬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하기로 한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녀는 이제 약간 호기심까지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목 위로 무등을 태운채 그녀의 몸을 실은 그대로 벌떡 일어섰다.



"으아앗!"



깜짝 놀란 단비 누나가 내 머리를 붙잡고 목 언저리 위에서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나고보니 나도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뒷덜미와 단비 누나의 아랫도리가 완전히 밀착되어 목 뒷부분으로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야릇한 촉감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엄동설한의 와중에도 왠지 모를 따끈따끈한 온기가 목을 통해 전해오자 나는 그만 얼굴이 확 붉어졌다. 조금 쯤 이런 장면을 계획하긴 했지만 막상 실제로 이러고보니 생각보다 더욱 민망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은 좋았지만.... 단비 누나가 내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누나, 저기 저 창턱을 잡고 나서요, 저 옆 파이프에 왼발 올리고, 이 쪽 난간에 오른발 올리고 위로 팍 올라가는 거에요. 할 수 있겠어요?"



"으, 으응. 해 볼게."



내가 손가락으로 여기저기의 요소들을 가리키자 단비 누나가 무등을 탄 채로 조심스럽게 창 턱을 양손으로 붙들고는 힐을 신은 발을 파이프 위에 살짝 딛었다. 목 위에 올라탄 높이에서 손을 뻗으니 간신히 창턱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수 있었다.



나는 높은 굽이 방해가 될까봐 그녀의 구두를 벗겨주었다. 검정 스타킹을 신은 그녀의 매끄러운 발과 다리가 눈 앞에 드러났고 나는 이 상황에서도 군침을 꿀꺽 삼켰다. 



"조심해요."



"으응."



술 마신 여자한테 이런거 시켜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하기 때문인지 그녀는 상당한 근력을 자랑하며 어렵지 않게 체중을 견디고 난간 위로 상반신을 올리는데 성공했다. 누나가 몸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목 뒤에서 그녀의 아랫도리가 부벼지는 아찔한 감촉이 느껴졌는데, 그 매끈하고 색기있는 허벅지가 양 볼에 닿으며 부비적거리자 나는 그만 정신을 놓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제 창턱 너머로 올라가봐요. 넘어가면 바로 밑에 드럼 세탁기 있는데 뚜껑 닫아놨으니까 조심해서 거기 밟고 바닥으로 내려가요. 창문은 열어놨으니까."



"아, 알았어."



생각보다 할 만하다고 느꼈는지 그녀가 꽤 단호하게 대답했다. 단비 누나가 창턱에 손을 짚고 위로 몸을 끌어올리자 내 목덜미에서 그녀의 양 다리가 서서히 떨어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매우 아쉬운 순간이었다.



나는 순간 짖은 생각이 들어 누나를 도와주는 척 하면서 그녀의 엉덩이를 밑에서 받쳐주었다. 풍만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농염한 엉덩이가 양 손 가득 쥐어져오면서 아찔한 감촉을 선물해주었다.



"꺄악!"



단비 누나가 참으로 드물게도 당황하여 소리를 빽 질렀다. 



"왜 그래요?"



"어, 어딜 만져!"



"빨리 넘어가야죠.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건데."



"으으, 혼자서 넘어갈 수 있으니까 만지지 마."



"그러다 다쳐요. 자, 빨리빨리 넘어가요."



속으로는 영원히 이대로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단비 누나의 엉덩이를 계속 받쳐주었다. 탱글탱글하고 매끄러운 살결이 스커트 자락 너머로 너무나 아득하게 느껴져오는 기분에 행복감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그래도 나는 근본은 있는 남자였기에 누나의 스커트 안쪽으로 손을 밀어넣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누나는 그 고마움을 모르는지 내내 울상을 짓고 있었다.



"우씨잉.... 너 나중에 봐. 죽었어!"



마침내 그녀가 커다란 창틀 위로 몸을 완전히 올려놓는데에 성공하자 누나의 몸이 완전히 내 손에서 떨어져나갔다. 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것도 술까지 마신 여자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만큼 괜찮은 몸놀림이었다. 



창틀 위에 올라선 단비 누나는 마치 담벼락 위의 밤고양이처럼 표독스럽게 나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녀는 앙증맞게 움켜쥔 주먹을 휘둘러보이며 무언의 위협을 가했지만 나는 그저 더이상 그녀의 몸을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쉬울 뿐이었다. 나는 좀 전에 벗겨낸 하이힐 한 쌍을 힘겹게 창틀 위로 전해주었다. 



"자자, 구두 들고 건너편으로 넘어가 있어요. 누나 생각보다 무겁던데 뚜껑 안 부서지게 조심하고."



"나 안 무거워!"



확실히 그녀의 풍만한 왕가슴과 빵빵한 엉덩이를 생각해본다면 방금 전에 몸으로 직접 느낀 몸무게는 그에 비해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나올 곳은 확실하게 나왔지만 들어갈 곳은 또 잘록하게 들어간 환상적인 몸매 덕분인 듯 했다. 아무튼 몸매 하나만큼은 정말 감탄이 나오는 여자였다.



단비 누나는 두고보자는 듯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창틀을 넘어 어렵지 않게 세탁실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홀로 남은 나는 멀찍이 뒤로 떨어진 후 도움닫기를 하여 외벽의 동파이프 부분을 아슬아슬하게 밟고 창턱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끙."



신입생 시절에는 이 짓거리도 꽤 할 만한 듯 했는데 오히려 군대를 다녀오고나니 어째 더 빡센 느낌이 들었다. 창문을 안쪽에서 열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별로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거 자칫 잘못하면 못 올라가서 지금쯤 안에 있을 여자에게 망신을 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휴우...."



다행히도 어찌어찌 어렵사리 창턱 위로 올라온 나는 안쪽으로 다리를 집어넣고 익숙한 드럼세탁기의 뚜껑을 가뿐히 밟고는 안으로 무사히 착지했다. 캄캄하게 소등이 되어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둑어둑한 세탁실 안으로 들어서니 근처에서 하이힐을 신고 있었던 단비 누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 변태 치한 호색한!"



단비 누나가 그 작고 귀여운 손으로 내 등짝을 퍽퍽 때렸다. 은인에게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나는 검지 손가락을 입에 붙이며 그녀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쉿. 쉿. 누나, 우리 지금 몰래 들어온 거에요. 조용히 해요. 지금 입실 시간도 지났는데."



"씨이, 니가 내 엉덩이 만졌잖아!"



"제가 언제요? 저는 그냥 누나 쉽게 넘어가라고 도와준 거지."



"됐어. 흥.... 벌떡벌떡 세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저질."



"제발 그 일은 좀 잊어주셨으면 좋겠네요."



"혹시 모르지. 지금도 서 있을 지도! 건강한 변태남이시니."



나는 마치 바늘로 찌른 듯이 뜨끔한 기분을 느꼈다. 방금 전에 누나의 몸을 더듬고 엉덩이를 만지다보니 어느새 살짝 힘이 들어간 양물이 트레이닝바지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죽어도 그걸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절대 아니거든요."



"그래? 그럼 내가 확인해볼까?"



"뭐, 뭘 확인해봐요. 어쨌든 무사히 들어왔으면 된 거 아니에요? 서로 감점도 안 받고 좋잖아요. 저 아니었으면 계속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었을 거면서."



입술을 삐죽삐죽거리며 토라진 표정을 짓고 있었던 단비 누나였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 말이 맞다 싶었는지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팩 돌리며 중얼거렸다.



"쳇.... 그래도 이렇게 들어왔으니까 한 번 봐주는 거다. 치한한테 한 번 당했다 생각할게."



".....은인한테 하는 말이 겨우 치한인가요?"



"근데 이런 개구멍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군대 가기전에도 계속 기숙사에서 살았으니까 생긴 나름대로의 노하우 같은 거죠. 신입생 때 새벽 늦게까지 술 마시고 나면 이렇게 종종 들어왔었어요. 누나도 자신 있으면 가끔 써 봐요. 여자 팔 힘으로 될까 모르겠지만...."



"우와, 근데 이런거 있으면 위험한 거 아냐? 사감 쌤도 알고 있으려나?"



"글쎄요? 어차피 이거 써먹으려면 안쪽에서 누가 창문을 열어야 하니까 그리 위험하진 않을 거에요. 이번엔 제가 열고 나왔지만..... 암만 그래도 2년이 지났는데 쇠창살 하나 안 박힌걸 보니 좀 어이없긴 해요. 그 많은 재정을 어디다 퍼붓고 있는지 참 궁금하죠?"



방금 전까지 화내던 것도 잊고 고개를 열심히 주억거리는 단비 누나의 모습이 귀여웠다. 소등 된 어둠 속이라서 그런지 이런 캄캄한 세탁실에 그녀와 단 둘이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방금 전에 손끝을 통해 느꼈던 그 짜릿한 엉덩이의 감촉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녀를 밖으로 이끌었다.



"이, 일단 나가요. 여기로 들어온거 걸리면 안 되니까요."



"나도 기숙사 오래 있었지만 이런건 첨 알았다. 헤헤, 신기해라. 난 아까 니가 뛰어갔을 때 나 버리고 간 줄 알았어."



"제가 어떻게 그래요. 누나 놔두고."



"헤헤, 귀여운 것."



내 말이 기분 좋은 건지 아니면 긴장이 풀렸는지 헤실헤실 웃기 시작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선 다시금 어렴풋한 술기운이 느껴졌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고 나니 살짝 붉어져있는 그녀의 얼굴색이 보이는 듯 했다. 코 끝이 빨개져있었던 것은 추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술기운의 영향도 없지는 않은 듯 했다.



"CCTV에 찍히면 안 되니까 로비까지는 엘리베이터 말고 계단으로 가야 돼요. 이쪽으로 와요."



내가 능숙하게 그녀를 이끌자 단비 누나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나를 군말없이 따라왔다.



"우와아, 너 멋있어. 그거 같애... 뭐더라? 007 ? CSI ?"



"제가 좀 멋있긴 하죠."



"엉덩이만 그렇게 안 주물렀어도 훨씬 더 멋있지 않았을까."



"알았어요. 제가 잘못했으니 그만해요."



단비 누나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나는 혹시라도 사감이 순찰을 돌다가 듣지는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그 귀여운 웃음소리가 너무 듣기 좋은 나머지 뭐라고 핀잔을 주지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텐트나 치는 변태인 줄 알았는데 이런 구석도 있다 이거지. 다시 봤어요, 건강남 씨."



"조용히 좀 해요. 들키겠어요."



나는 얼굴이 붉어져 한 마디 쏘아붙였지만 단비 누나는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끝도 없이 종알거렸다. 원래 수다가 많은 그녀였지만 지금은 왠지 술기운도 한 몫 하는 듯 했다.



"근데 예전부터 궁금했던건데, 왜 누나는 본인 카드로 들어올 생각은 안 하는 거에요?"



"말하자면 적립 같은 거지."



"예?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봐, 이렇게 남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서 하나하나 감점 받을 걸 꼬박꼬박 아껴두는 거야. 그러면 나중에 내가 진짜로 크게 감점 받을 만한 일이 생겼을 때 그나마 덜 피해를 입지 않겠어?"



"......아뇨, 그보다 애초에 감점 받을 생각을 아예 안 하셔야 하는거 아닐까요? 좀 일찍일찍 시간 맞춰서 들어오셔야죠."



"아하하, 너 잔소리 하니까 우리 엄마 같다."



"......."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어찌어찌 겨우 로비까지 비상 계단으로 올라온 우리는 고개를 빼끔 내밀어 복도를 살펴보고 사감 선생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늘은 순찰 안 하나 봐요."



"짜식, 수고 했어. 담에 꼭 갚을게~"



"그 말은 저번에도 하셨잖아요. 그리고 갚긴 어떻게 갚는다고 그래요? 누나가 저 무등 한 번 태우시게요?"



"연약한 내가 널 어떻게 드니? 그리고 이번엔 오히려 네가 이득 본 거지."



"뭘 이득을 봐요?"



"솔직히 더듬으면서 즐겼잖아?"



"에휴.... 됐어요. 제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물론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로비의 조명 아래에서 보니 더욱 섹시하게 보이는 저 풍만한 엉덩이를 방금 전에 내가 더듬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그걸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겉으로 무덤덤한 척 손을 내저으며 한숨을 쉬자 단비 누나가 뭐가 그리 재밌는지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알았어, 알았어. 뽀뽀 한 번 해줄게. 됐지?"



"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순간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 단비 누나가 까치발을 들고 얼굴을 가까이 좁혀오자 순식간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아버렸다. 하지만 기대했던 부드러운 감촉이나, 쪽 하는 낯부끄런 소리 등은 느껴지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눈을 살짝 떠보니 단비 누나가 내 입술에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검지 손가락을 대고 있었다.



"다음 기회에."



"뭐라구요?"



"내가 내킬 때 해줄게."



"......"



아니, 지금 이 여자가 나를 농락하는 건가?



"표정을 보니 아쉽다는 얼굴이네. 혹시 진짜 간절했던 거야?"



"됐네요. 얼른 들어가요. 술 마셨죠?"



"헤헤, 쬐끔~"



"왜 마셨어요?"



"으음. 그럴 일이 좀 있어."



별로 화장을 하지 않아도 특유의 눈매 덕분에 워낙 도발적이고 섹시해보이는 얼굴에다 지금은 화장을 하고 취기까지 올라 있는걸 보니 괜히 또 시선을 두기가 민망하다. 여우 같은 눈매와 도톰한 입술에 자꾸 곁눈질이 간다. 



"저도 오늘 술 생각 간절한데."



"넌 왜?"



"오늘 골치 아픈 일들이 좀 많았거든요."



"젊은 녀석이 무슨 골치 타령이야?"



"...... 그 중에 누나 일도 한 몫 했는데요."



단비 누나는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내게 물었다.



"너 방에 술 있어?"



"얼마 전에 장 볼 때 사놓은 캔맥주 같은건 있어요."



"좋겠다. 나 한 잔 더 하고 싶은데."



"하나 드릴 테니 몰래 가져가서 드시던지요."



"술을 무슨 재미로 혼자서 마시니?"



곰곰히 고민을 거듭하던 누나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나 니 방에 놀러가면 안 돼?"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내 귀가 잘못된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거 저 여자의 입이 잘못된 건가?



"말도 안 돼요."



"왜?"



"누나가 어떻게 제 방에 와요?"



"그럼 니가 내 방에 올래? 맥주 들고."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거 걸리면 바로 퇴실이에요."



"안 걸리면 되지?"



간덩이가 부은 누나의 발언에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입실시간 미엄수로 감점 받는 것은 꺼려하면서, 걸리면 한 방에 바로 퇴실행인 이성 호실 출입을 하겠다는 무모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왜? 싫어?"



"아, 아뇨... 싫다기 보다...."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마른침이 꿀꺽 목을 타고 넘어갔다. 물론 CCTV에 찍히지만 않고 잘 피해서 들어가면 마냥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고, 실제로 이성의 방에 몰래 드나드는 경우도 드물긴 했지만 아주 간혹 한번씩 주위에서 보기는 봤다. 하지만 만약에 걸리기만 한다면 이건 바로 퇴실감이었다.



나는 기숙사에서 쫓겨나고나면 집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암울한 현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 앞에서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단비 누나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싫으면 그냥 나 들어가구."



"아, 아니에요. 좋아요. 가요."



이성적인 판단과 과감한 용기가 서로 싸웠지만 결국 이성이 패배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과감한 용기라기보단 만용이란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어찌됐건 이미 대답은 튀어나오고 말았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엘리베이터를 잡는 단비 누나의 뒷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쫓아갔다. 



누나가 누른 엘리베이터의 버튼은 그녀가 늘상 향하던 여성층이 아니라 남성층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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