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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그녀들의 마음은 ? - 5부

일병 사다리도박사

1범

2014.06.23가입

조회 1,516

추천 3

2014.10.24 (금) 14:35

                           


감동넘치는 로맨스 명작
그녀들의 마음은 ? - 5부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교양과목을 더 자주 듣고 싶은 사람은 좀체 없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유가희 교수님의 다음 강의를 일주일 동안 기다리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혹시나 다음 수업시간이 오기 전에 어딘가에서 우연으로라도 백설미를 마주칠 수 있었으면 하는 나의 소소한 바람은 역시나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때문에 비로소 일주일이 지나서 기다리고 기다렸던 그 날이 오자 나는 기필코 오늘은 내가 들었던 이름의 진위 여부를 확실히 알아내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아예 강의실에 일찍 도착해서 들어오는 학생들을 차근차근 체크해보고 싶었지만, 이전 수업이 연달아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심지어 학관 사이의 거리 또한 멀었기 때문에 수업을 마치자마자 쉬는 시간 동안 서둘러서 이동하지 않으면 일찍 도착하기는커녕 지각을 할 수도 있었다.



전공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가방을 챙겨서 멀티미디어관으로 쌩하니 내달렸다. 개강 첫날과는 다르게 수업을 일찍 마쳐주지 않으니 고작 10분 만에 그 상당한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상당한 고역이었다. 



"으앗!"



쏜살같이 달려서 멀티미디어관의 계단을 뛰어올라가 모퉁이를 돌았을 때 나는 그만 급정지하고 말았다. 너무 급하게 달리다보니 코너를 돌자마자 그 방향에서 걸어오던 사람과 그만 충돌할 뻔 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멈춰설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보기 좋게 맞부딪혀 넘어졌을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



코 앞에서 가까스로 멈춰 있는 상대방에서 우선 고개 숙여 사과를 했다. 하지만 상대방 쪽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상대방의 얼굴을 보았다.



"어....?"



놀란 목소리는 내 입에서 나왔다. 그러자 마주 서 있는 그 사람도 나를 보았다. 검고 긴 머리의 여학생이 눈 앞에 서 있었다. 그 얼굴은 내가 분명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고, 잘 알지는 못하더라도 결코 잊을 수는 없는 얼굴이었다.



말 없이 바라보는 특유의 무표정이 거기에 있었다. 내 기억 속에 너무나 선명히 남아있는 사람, 그렇게나 찾고 있었던 사람의 얼굴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백설미... 씨?"



보석을 연상케 하는 한 쌍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보았다. 그리고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나를 보았다. 흔들림이 없는 무표정 속에 약간의 의아함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낯선 사람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일까? 문득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있기는 한 것인지 궁금했다.



"......"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반면에 나는 그야말로 공황 상태에 빠져있었다. 우연히 학교 어딘가에서 마주치는 것을 줄곧 바래왔긴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카페에서 그녀를 처음으로 보았던 그 날 이후로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린 끝에 재회한 것이었다. 하지만 재회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그녀가 나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같아서 내가 이 여자에게 아무런 존재감도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누구?"



꽤 오랜 정적이 흐른 끝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그거였다. 나는 허탈한 마음에 그만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 때의 일을 모조리 설명하고 어떻게든 나를 기억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우물쭈물거리는 사이에 그녀는 먼저 강의실로 들어가버렸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그녀에게 집적거리는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소문을 들어서라는 등의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제길."



이로써 두번째 만남이지만 지금은 그 날과는 상황이 여러모로 달랐다. 카페 점원과 손님으로서 만난 것이 아닌 바깥에서의 만남. 그녀의 성격으로 봐서 여기서 괜스레 아는 척을 했다가는 무시당할 확률이 120퍼센트로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는 것이 보였다. 강의실에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주위의 공기가 바뀌는 것 같았다. 근처의 남학생들은 어떻게든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너무나 차가운 분위기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는지, 그녀의 옆자리는 휑하니 비어있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그 빈자리로 가서 앉았다.



"저, 저기... 안녕하세요."



한심하게 말을 더듬는 내 모습이 굉장히 낯설었다. 어디가서 움츠러들고 살지는 않았는데 바보같게시리....



"......."



역시나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저 길게 드리운 속눈썹 아래로 흘끗 나를 올려다 보았을 뿐이었다. 유리보다 더 투명하고 호수보다 더 깊은 칠흑같은 눈동자가 나를 보았다. 마치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그 눈동자에 그 때처럼 나는 그저 시선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전율을 느꼈다.



"저, 아까 부딪힐 뻔 했는데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신데는...."



나는 그녀에게서 어떻게든 대답 같은 대답을 듣고야 말리라 오기가 생겼다. 하지만 말을 뱉고 나니 어쩐지 내 자신이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여자는 모르고 있겠지만 나는 그녀의 학과 선배인데.... 왜 후배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는 걸까? 



어쩐지 가타부타 그녀에게 함부로 말을 놓아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참으로 기묘한 느낌이었다.



"네."



그녀에게서 나온 대답은 짤막한 단 한 마디. 나는 이쯤되니 짜증이 날 정도였다. 



'윽... 억울해.'



그렇다. 정말 억울했다. 그렇게 죽일 듯이 달려들어놓고서는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말로 표현하지 못할 서러운 감정이 물밀 듯이 솟구쳤다. 물론 골목길에서는 너무 어두워서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없긴 했을테고, 카페에서도 그녀에게 있어선 수 많은 손님들 가운데 한 명이었을 뿐일테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다시 만나면 반드시 그 때의 일에 대해서 따져보고 사과를 받아내리라 마음 먹었던 굳은 다짐조차 그 허탈한 마음에 그만 깨끗이 씻겨내려가 버렸다. 어떻게든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너무나도 거리감 느껴지는 그녀의 태도를 보니 주눅이 들 정도였다.



"다, 다행이네요."



"출석 부르겠어요."



그러는 사이에 언제 들어온 것인지 모를 여교수가 어느새 앞에 서서 출석부를 꺼내고 있었다. 지난주에 보았던 그 젊고 예쁜 강사였다. 나는 속으로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옆을 흘끗 보았다. 그녀는 옆에 내가 앉은 것에 대해서는 하등의 관심도 없는 듯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에서 낮게 들리는 수군거림과 웃음소리가 아무래도 나 또한 그녀에게 수작을 걸다가 망신을 당한 수 많은 남자들 중 한 명으로 생각되고 있는 듯 했지만, 그런 것보다도 이 여자가 지금 내 기분이 어떨지를 전혀 알지도 못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더 기분이 씁쓸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말했던 대로 조를 구성하겠어요. 말씀드린 대로 학과 위주로 조를 구성하겠지만 학과 별로 인원이 다르니 다른 학과끼리도 같은 조가 될 수 있다는걸 알아주세요."



유가희 교수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정말 그녀의 설명대로 같은 학과끼리 조가 묶인다면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이 여자와 같은 조가 될 확률도 우연에 기대지 않아도 좋을 만큼은 된다고 할 수 있었다. 



"강정식. 유혜미. 최유선. 도길수."



조는 평균적으로 4인 1조로 이루어지는 듯 했다. 아슬아슬하게 같은 학과의 인원이 한 명씩 남게 되는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조가 4명으로 구성되었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내 이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출석부에는 학과 별로 이름이 등재되어 있으니 교수도 그것을 보고 조를 짜는 듯 했다. 



'그러고보니....'



예전 시간에서 출석을 부를 때 그녀의 이름 바로 다음이 나였다는 사실이 문득 기억났다. 출석부의 순서대로 조가 엮인다면 더욱 확률이 올라가는 셈이었다. 그러는 사이 드디어 기다렸던 내 이름이 유가희 교수의 입에서 호명되었다.



"정영식, 최민지, 백설미, 서승태."



'좋아!'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슬아슬한 세이프였다. 강사의 지시에 따라 호명 된 사람들이 손을 들어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신기하게도 우리 조로 지목된 네 사람은 모두가 다 가까운 위치에 앉아 있었다. 나는 내 옆자리에서 조용히 손을 들어올린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문득 그녀는 내 이름조차 모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조가.... 되었네요."



옆자리에 앉은 사람끼리 나란히 손을 들어놓고 모르는 척 하는 것도 되려 이상할 것 같아 나는 먼저 말을 붙였다. 



"......"



하지만 돌아온 것은 침묵 뿐이었다.



"그....잘 부탁 드려요."



"......"



심지어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않는 무시의 연속. 이런 성격이라는 것은 물론 얘기를 미리 들어 알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막상 이렇게 무시를 당하고 보니 학과 내에서 가장 예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인기가 없다는 세나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많은 남자들이 접근해왔다가 망신만 당했다는 뜻이 이런 말이었구나 싶었다.



"그러면 같은 조원들끼리 앉을 수 있도록 잠시 자리 이동을 하겠어요. 조원들은 서로 가까운 위치로 자리를 옮겨 앉아주세요."



유가희 교수의 지시가 떨어졌지만 우리 조는 그리 큰 이동이 필요치 않았다. 모두가 가까운 곳에 뭉쳐 있었기 때문에 나와 백설미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이 우리 근처로 이동한 것이 전부였다.



"안녕하세요, 행정학과 XX 학번 정영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같은 학과 후배 최민지에요. 잘 부탁드려요."



같은 조로 지목 된 나머지 두 사람은 알고 보니 다른 학과의 학생들이었다. 한 명은 남학생, 또 한 명은 여학생이었는데 보아하니 서로 굉장히 친한 사이인 듯 했다. 붙어있는 모습을 보니 어쩌면 애인 사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서승태라고 합니다."



여자 쪽은 나보다 한 학번이 낮았지만 남자 쪽은 오히려 나보다 학번이 위였다. 다른 학과 사람에게 선배 소리를 해야할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어찌되었건 나보다 나이가 적은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남은 한 사람인 백설미 쪽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저기, 그 쪽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이름을 정영식이라고 소개한 그 남자가 가타부타 말이 없는 그녀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조원들간에 이름을 알아두어야 하는 것은 물론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남자의 표정이 너무나도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최민지라는 이름의 여학생이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그 모습을 보고서 나는 둘 사이가 연인 관계, 혹은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보통 이상의 관계일 것이란 사실을 더욱 확실히 짐작할 수 있었다. 



"......."



그녀, 설미는 지나칠 정도로 말이 없었다. 질문에 대답도 않고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상대방의 얼굴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내가 초조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민지라는 여학생의 얼굴이 점점 더 언짢은 듯 찌푸려지는 것 같았다. 



남자의 말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불쾌함을 느낀 여학생이 설미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려던 찰나 드디어 설미의 입술이 떨어졌다.



"백설미입니다."



정중하지만 차가움이 뚝뚝 묻어나는 짧은 한 마디. 마치 칼바람이라도 쌩하니 불고 지나간 듯 무뚝뚝한 소개였다.

그녀는 그 외에 다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닫고 평소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무표정이 아니라 무감각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미동 없는 그 모습에 마주 앉은 남녀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하하, 그렇군요. 반가워요, 설미 씨. 아무튼 같은 조가 되었으니 우리 잘해봐요."



"......."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표정을 바꾸고 설미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남자. 하지만 역시나 대답이 없는 그녀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여학생의 표정이 더욱 기분 나쁘게 일그러지고 있는 것이 이제는 눈에 확실히 보였다. 



'잘못 걸렸단 예감이 든다.'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불길한 감각을 느꼈다. 4명이 같은 조라고는 하지만 그 남자는 내게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으며 계속해서 설미에게 말을 붙이는 일에만 열중하는 듯 했다. 그는 어떻게든 대답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거의 대부분 무시로 일관했고 간혹 대답을 한다 해도 두 마디를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 여학생의 기분은 척 보기에도 너무나 불쾌해 보였다.



나는 마치 소외받는 기분을 느끼며 혼자 생각?다.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단결력 있는 조가 될 것 같지는 않다고. 



"그리고 수업 계획에 대해서 여러분들께 말씀드릴 것이 있네요."



조별 시간을 잠시 갖도록 기다리고 있었던 유가희 교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웅성거리던 학생들이 이내 잠잠해졌다.



"원래 제 강의에서 개론수업을 진행할 때엔 중간고사 없이 기말고사와 조별 과제만으로 학점을 매기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번 수업 내용은 개론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뚜렷한 변별력을 위해서 중간고사를 추가할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그러자 학생들 사이에서 불만스런 웅성거림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계획에 없던 시험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을 반길 만한 학생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확실히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교수님~ 그냥 중간고사 없이 하면 안 되나요?"



한 여학생이 손을 들고 애교 섞인 불만을 표했다. 다른 학생들도 저마다 동의하는지 이내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서자 유가희 교수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그녀는 부드러운 성격 때문인지 똑 부러지게 학생들을 휘어잡거나 하지는 못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학생들도 그 사실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강력하게 불만을 토로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별 다른 제지 없이 학생들이 불만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 그나마 조금 잠잠해지고나자 젊은 여교수는 투덜거리는 학생들의 모습을 둘러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여러분들 힘들게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미안해요."



사실 교수가 사과할 문제는 아니었고 이렇게 학생들을 납득시켜야 할 만한 내용도 아니었지만 여린 마음의 젊은 강사는 어떻게든 학생들을 달래주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불만스러워진 강의실의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지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쪽에 시선을 던졌다. 



순간 교수가 나를 보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건 착각이었다. 살짝 놀란 것처럼 두 눈을 크게 뜬 유가희 교수가 감탄스럽다는 듯 작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 수업에 굉장히 예쁜 여학생이 있네요."



그녀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내 옆자리의 설미를 보고 있었다. 교수의 말에 따라 학생들이 전부 이쪽을 돌아보았다. 설미의 모습을 본 학생들이 남녀 할 것 없이 너도나도 넋이 나가서 감탄사를 흘리며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교수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생각에서였다면 꽤 성공적인 시도였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옆에 있는 남학생은 혹시 남자친구인가요?"



교수의 말에 100명이 넘는 수강생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내 몸으로 날아와 꽂혔다. 아까 자신을 정영식이라고 소개한 그 남자는 특히나 더욱 강렬한 시선을 보냈다. 남자친구는커녕 그녀와 나는 아직 아는 사이라고 말하기에도 부족한 사이였지만, 혹시 만에 하나라도 그렇다고 대답했다간 수 많은 남학생들의 살기어린 눈빛에 사지가 찢겨 나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부담스런 느낌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씁쓸하게도, 유가희 교수도 애초에 내가 그녀와 그런 사이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싱긋 웃기만 했다. 그리고는 내게 갑작스런 질문을 던졌다.



"거기 남학생도 중간고사에 대해서 불만이 많으신가요?"



난데없는 교수의 지목에 나는 순간 대답할 말을 고르지 못하여 당황하고 말았다. 나는 새삼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젊은 교수의 질문이 나를 향한 것임을 확인하고 헛기침을 했다. 



"으, 으음.... 좋지는 않지만 교수님의 판단이 그렇다면 학생들이 이해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녀를 옹호하고 나서자 유가희 교수는 약간 놀랍다는 듯이 눈끝을 살짝 치켜올렸다. 반면에 학생들의 반응은 꽤 아니꼽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다들 내가 젊고 예쁜 강사에게 잘 보이고 싶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래요?"



"네... 이런 상대평가 수업에서는 변별력이 중요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 학점을 평가하는 일은 교수님의 몫이니,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방식대로 진행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유가희 교수는 나의 말이 상당히 의외였는지 살짝 웃음을 지었다. 비록 주위에서는 못마땅한 시선이 뭉텅이로 날아왔지만 예쁘장한 강사의 웃음 속에 왠지 모를 호감이 느껴져서 썩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내 옆을 흘끗 바라본 나는 다시 침울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남자친구가 아니냐는 등의 얘기가 나왔음에도 아무런 반응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인형처럼 앉아있는 설미의 모습을 보니 나는 절로 맥이 빠졌다.





















"설미 씨, 그럼 다음 시간에 뵐게요!"



정영식이란 남자는 마지막까지 설미에게 지극한 관심을 표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같은 조원인 나에게는 인사치레라고는 일언반구도 없이 강의실을 훌쩍 나가버렸다. 어딘지 뱀처럼 생긴 그의 얍삽한 첫인상이 애초에 맘에 안들긴 했지만, 그 태도를 보고 있자니 더더욱 아니꼽게 느껴져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다.



최민지라는 여학생은 그 남자의 뒤를 쫓아가며 기분 나쁘다는 듯이 설미의 모습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휙 돌리고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뻘쭘하게 가방을 챙기고 있었던 나는 그 여학생이 강의실을 나서면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뭐야.... 얼굴 좀 반반하게 생겼다고.... 재수없긴."



아무래도 이 수업에서 내가 배정받은 조는 조만간 콩가루가 될 것 같은 불길한 조짐이 온 몸으로 엄습해온다.



"그, 그럼... 저도 가볼게요."



마지막으로 남은 그녀에게 나는 돌아올 리 없는 인사를 건넸다. 역시나 그녀는 묵묵부답. 이쯤되니 나는 괜스레 짜증도 나고 지난 일이 억울하기도 해서 그냥 주섬주섬 가방을 싸고는 강의실을 나와버렸다.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미련이 남아서 뒤를 살짝 돌아보긴 했지만 그녀는 이쪽에 전혀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다.



'확실히... 진짜 사교성 없구나.'



물론 나에게 친절한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얘기를 들어보니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저런 태도로 일관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저런 성격으로 커피숍 일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새삼 신기할 따름이었다. 물론 일을 할 때에는 적어도 손님의 말을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무시한다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차가운 여자였다. 그 차가움이라는 것은 냉정의 수준을 넘어서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인형을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차라리 성격이 착하다 나쁘다로 구분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경우에는 아무 것도 읽을 수가 없어서 어떤 판단을 내릴 수조차 없었다. 



단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도무지 그녀와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윽... 이렇게까지 목 멜 필요는 없잖아.'



그녀의 일방적인 무시와 지난 번의 일이 겹쳐서 떠오르면서 짜증이 나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관심을 끊고 아무 신경도 안 쓰고 싶었지만 한 번 관심을 붙이고 나니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너 왜 그래?"



"몰라서 물어?"



멀티미디어관의 계단을 내려가는데 앞서 걷던 한 남녀의 말다툼 소리가 내 신경을 건드렸다. 자세히 보니 아까 같은 조가 되었던 그 한 쌍의 남녀였다. 



"그렇게 다른 계집애하고 시시덕거리고 있으면 좋아? 아주 입이 귀에 걸렸던데. 그 반반하게 생긴 년한테 수작 부리느라 나는 안중에도 없더라?"



"야, 같은 조다보니까 서로 알고 지내려고 그런거지 수작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웃기지 마."



남의 다툼을, 그것도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연인 사이가 거의 확실한 남녀의 다툼을 굳이 엿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너무 커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저 대화의 내용이 아까 정영식이란 남자가 설미에게 추근거렸던 일을 놓고 싸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꼴을 보아하니 저 둘은 아무래도 서로 사귀는 사이가 확실한 것 같은데, 그럼 저 남자는 자기 여자친구가 멀쩡히 옆에 있는데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설미에게 수작을 부렸던 건가? 첫 인상이 별로다보니 왠지 그의 행동 하나하나까지 아니꼽게 보이는 것 같았다. 



'휴... 어쨌든 그 여자한테서는 관심을 끊는게 좋겠다.'



첫 만남부터 왠지 알 수 없는 마력적인 기분에 이끌려 그녀에게 막연한 호감을 가졌었고, 그 이후로 꽤 오랫동안 그녀와 다시 마주치기를 바래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 이렇게 다시 만나고 보니 확실히 그녀와 가까워질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 보였다.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노력이란 것도 어느 정도의 가능성이 보여야 해 볼만한 일인데, 느낌상으로는 그 설미라는 애와 잘 되기는커녕 친한 사이가 되는 것조차도 불가능해보였다. 그만큼 그녀에게서는 타인에 대한 두터운 벽이 느껴졌다.



'그래도 진짜로 좋아하기 전에 단념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더 빠져들기 전에 정리하자....'



세상에 여자는 많다며 나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문득 단비 누나의 얼굴이 머릿 속에 둥실 떠올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세나의 얼굴도. 이거 진짜 여자가 궁해서 그런 건지....





















"어?"



학관 밖으로 나와 길을 걷던 나는 꽤나 뜻밖이면서도 익숙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멀티미디어관 앞에 예전에 예술관 앞에서 보았던 그 졸업 작품 전시회 준비의 현수막이 걸려있었고, 그 옆의 꽤 넓은 공터에서 예대 학생들이 여기저기에 이젤과 화판을 설치해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들 중 몇 명은 나와 세나에게 했던 것처럼 지나가는 학생들 중 연인사이로 보이는 남녀 혹은 눈에 띄게 예쁜 여학생이나 잘 생긴 남학생 등을 상대로 그림의 모델이 되어줄 것을 간간히 제의하고 있었고, 또 한 쪽 테이블에서는 전시회와 관련된 설명을 첨부한 것으로 보이는 팜플렛까지 나눠주고 있었다.



"진짜 본격적이구나."



다른 학관 앞까지와서 이렇게 홍보 활동을 벌일 정도라면, 모르긴 몰라도 그 행사에 쏟아붓고 있는 비중이 결코 적지는 않다는 증거였다. 나는 이 정도의 의욕을 보이는 예대 학생들의 성실함에 새삼 놀라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어차피 세나와 함께 있지 않은 지금은 혹시라도 나를 모델로 쓰겠다는 정신나간 학생이 있을 리가 없으니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행사였다.



"에이, 그러지 말고 잠시만 시간 좀 내주세요~ 그 쪽 여자분 같은 완벽한 모델을 구하는게 하늘의 별 따기라서 그래요."



"아, 그... 저는..."



그런데 공터를 지나치면서 듣게 된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에 일순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분명히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 난처해하는 그 특유의 어감이 내 귀를 잡아 붙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것은 그저 호기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나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귀를 쫑긋 세운 채 공터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한 쌍의 남녀를 바라보았다.



"이번이 졸업 작품이라서 정말 완벽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그래요. 그 쪽 분처럼 아름다운 모델을 본 게 처음이라서 도저히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 부탁인데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면 안 될까요?"



"그... 감사하지만 제가 지금 약속이..."



끈질기게 회유하는 남자와 거절을 못해서 난처해하는 여자. 이거 분명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광경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머릿 속에서 언젠가 보았던 비슷한 모습이 오버랩처럼 그려지면서 어두운 골목길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혹시....'



설마가 혹시가 되었다. 그 혹시가 또다시 역시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당황해하는 여자의 얼굴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매우 낯 익은 얼굴. 그 여자를 잘 알기 때문이 아니라 방금 전에 강의실에서 보고 나온 얼굴과 똑같은 얼굴이었기에 더욱 익숙할 수 밖에 없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맞구나.'



그 여자는 바로 예전에 보았던 그 설미라는 여자의 동생이었다. 



'저 여자애는 왜 항상 저런 일에 휘말리고 다니는 거지?'



물론 언니를 닮아서 가만히 있어도 어쩔 수 없이 주목을 받게 되는 그 엄청난 미모 때문이라는 것은 알지만, 특유의 냉정하고 무뚝뚝한 성격 탓에 주위에서 접근하기조차 꺼려하는 그녀의 언니를 생각해본다면 정말 너무나도 대조되는 자매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그 미대생으로 보이는 남자의 끈덕진 권유와, 그것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는 여자애의 실갱이는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때 보았던 그녀의 성격으로 봐서는 저런 종류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남자가 계속 긍정적인 여지를 가지고 매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신경 끄자...'



저런 상황에 끼어들었다가 좋은 꼴을 보지 못했음은 그 때의 비슷했던 경험으로 충분히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 때와는 다르게 남자 쪽에서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수작을 거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 뿐이니....



'정말 그런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남자의 눈빛과 분위기가 너무나도 수상쩍었다. 뭐라고 꼬집어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남자가 남자를 보면 대충은 맞듯이, 아무래도 지나치게 매달리는 저 모습을 보아서는 그저 작품을 위한 순수한 의도라고만 생각하기에는 조금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에이, 그러지말고 잠시 여기 좀 앉아보세요. 제가 정말 이쁘게 그려드릴게요. 원판이 하도 이쁘시다보니 뭐 그대로만 그려도 대작 하나 나오겠는걸요."



"어어? 아, 안 되는데...."



"자자, 가방은 이리 주시고."



미대생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이제 설미의 여동생에게서 거의 뺏다시피 가방을 받아들고는 그녀를 이젤 앞에 억지로 앉히려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어 떠오르는 잡생각을 머릿 속에서 떨쳐버렸다. 이왕 신경을 끄기로 한 거면 재빨리 이 자리를 뜨는게 차라리 더 낫다. 애써 무시하기로 결정하고 나는 걸음을 떼었다.



"....어?"



하지만 이번엔 신이 나를 돕지 않았다. 공터를 벗어나려고 걸음을 빨리하여 앞을 지나쳐가는 와중에 그 여자애와 나의 시선이 하필이면 정면으로 마주친 것이다.



"어라? 자, 잠시만요!"



나는 과감하게 무시하고 지나쳐가려 했지만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쫓아와 나의 팔을 붙잡았다. 뭔가 또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릴 것 같은 예감이.... 아니, 예감이라기보다 확신에 가까운 불길한 감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네...?"



"저기...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지 않나요?"



"그, 글쎄요...."



그녀는 잠시 양옆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이내 깨달았다는 듯 손을 마주치면서 눈빛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 모습이 마치 평소의 단비 누나를 떠올리게 했다.



"아, 그 때 그 골목길!"



"......."



그녀의 언니처럼 기억하지 못하길 바랬지만 아무래도 여동생 쪽은 언니보단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나보다. 아니면 그저 남을 대하는 성격의 차이 때문일지도 모르고.



"아, 네... 안녕하셨어요?"



나는 멍청하게도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내 등 뒤로 쏙 숨더니 그 때와 정말 한 치도 다를 바가 없는 모습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내게 어려운 부탁을 했다.



"저, 저 좀 도와주세요."



"......"



어째서 이 레퍼토리가 반복되는 걸까.





















"제가 지금 좀 바빠서...."



나는 그녀의 부탁을 무시하고 이 자리를 뜨려 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더이상 이 자매와 엮여서 하등 좋을게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몇 발짝도 채 떼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큼직한 두 눈망울이 울먹거리는 모습을 보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이봐요. 왜 울고 그래요."



그 때에도 그랬지만 왜 이 여자는 뻑하면 눈물을 줄줄 쏟아내는 걸까?



"아,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울지 마세요."



저번에도 느꼈지만 그녀가 우는 모습에는 굉장히 처량한 구석이 있었다. 부모 잃고 미아가 된 어린 꼬마애가 길바닥에서 펑펑 우는 꼴을 가만히 내버려두고 가는 기분이랄까.



나는 어쩐지 원치 않게 또 이상한 일에 걸려든 것 같은 미심쩍은 기분을 느끼며 그녀의 한쪽팔을 잡고는 아직도 그녀의 가방을 들고 멀뚱히 서 있는 그 미대생에게로 다가갔다. 그 학생은 마치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이 놈은 뭐냐?' 하는 띠꺼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 가방 좀 돌려주세요."



남학생의 인상이 삽시간에 찌푸려졌다. 



"저는 저 여자분하고 중요한 작품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쪽은 누구시길래 끼어드는 겁니까?"



그 남자는 방금 전까지의 작업이 꽤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믿는 듯 했다. 그러니 그의 입장에서는 내가 훼방꾼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설프게 말을 했다가는 또 싸움이 날 것 같아서 최대한 빠르고 확실하게 이 자리를 마무리 짓고 신속하게 여기를 뜨고 싶었다.



"제가 이 여자 남자친구거든요. 여자친구 얼굴이 여기저기 팔리는게 싫어서 그러니 다른 모델 알아보시고 그만 가방 돌려주세요."



가만히 듣고 있던 설미 동생의 눈이 왕방울만하게 커졌다. 감정표현이 전혀 없는 언니와는 다르게 참으로 표정 변화가 각양각색인 여자였다. 미대생은 나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도저히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솟구치는 짜증을 느끼며 옆에 서 있는 그녀에게 동의를 요구했다.



"안 그래, 자기야?"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멍하니 내 얼굴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내가 살짝 눈을 찌푸리자 뭔가 깨달았다는 듯 표정을 고치고는 내 말에 어설픈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아, 아아, 으, 응. 그, 그래, 맞아."



한철 사시나무 떨듯이 말을 더듬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쩍어 보였지만 어쨌든 본인이 그렇게 말을 했으니 남학생으로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나는 뜨악하게 입을 벌리고 굳어버린 남학생의 손에서 억지로 가방을 빼앗아들고는 다시 그녀의 팔을 붙들고 순식간에 그 자리를 떴다.



"가자."



"으, 으응..."



뒤에서 쳐다보는 남학생의 시선이 매우 따가웠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고, 고맙습니다. 또 신세를 졌네요."



"아니에요."



하지만 속으로는 부탁이니까 다시는 이런 신세를 지지 않았으면 한다고 간절히 바라는 나였다. 그녀가 조금 진정되고나자 나는 곁눈질로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목구비와 전체적인 생김새는 그 언니를 빼다 박은 듯이 비슷했지만, 이렇게 두 자매의 성격을 알고나서 보니까 느껴지는 분위기부터가 확연히 달라서 구분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가장 큰 차이점인 동생의 뿔테 안경과 그 밑으로 자리 잡은 순박한 눈매를 보니 생김새도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 듯 하여 점점 더 언니와 구별이 되는 것 같았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인형같은 언니의 눈동자와는 다르게 그녀의 동생의 눈망울은 굉장히 서글서글하고 순진해보이는 느낌을 주었다. 



"저... 저는 백설희라고 해요. 이번에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지난 번처럼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백설미 씨 동생이시죠?"



"아, 저희 언니를 아세요?"



"네. 지난 번에 봤었잖아요."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설미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 꽤 놀라운 모양이었다. 



"지난 번엔 미처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는데, 그래도 이렇게 다시 만날 줄 몰랐네요. 헤헤..."



그녀는 뭐가 기쁜지 헤실헤실 웃음을 지었다. 그 순진한 웃음을 마주하고나니 나는 왠지 그녀의 순박한 성격에 대해서 한 마디 충고를 해주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저.... 제가 뭐라고 할 문제가 아닌 건 알지만...."



"네?"



"그렇게 싫은데도 제대로 거절을 못 하는 그 쪽 성격 말인데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조금 고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요?"



"......."



뜻 밖의 얘기를 꺼내자 그녀의 눈이 또다시 왕방울만하게 커지면서 마치 놀란 토끼를 연상케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 놀란 얼굴을 보니 언니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에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언니가 떠올라 아까의 기억 때문에 짜증이 나기도 했다.



"제가 크게 도와드린 것도 아니고, 이번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쪽을 보아하니 이런 일을 평소에도 꽤 자주 겪는 듯 한데, 본인 성격을 고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될 듯 하네요. 힘드시겠지만 좀 제대로 거절하는 법을 익히는 편이 본인을 위해서라도 좋을 것 같아요."



사실 그녀의 성격이 딱히 잘못되었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녀를 위해서 하는 조언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의 언니로 인한 언짢은 기억에서 비롯된 짜증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말투가 조금 딱딱해진 것 같았다. 



토끼같은 표정을 하고서는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설희가 할 말을 잃은 듯이 입을 살짝 벌리고는 멍하니 나를 보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에게 비난을 들었기 때문인지 꽤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에 찝찝함을 느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녀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이제 남은 일은 신속하게 이 자리를 뜨는 것 뿐이다.



"죄... 죄송해요...."



하지만 나는 또 금새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살짝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직감적으로 또 뭔가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다를까 그녀의 큼직한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이 여자 왜 또 울고 난리야?



"저, 저기요... 제발 울지 좀 마세요."



"훌쩍... 훌쩍...."



너무나도 서글프게 훌쩍거리는 모습이 보는 내 마음까지 쓰려올 정도로 처량해보였다. 귀가 축 늘어진 토끼를 떠올리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다시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저.... 울리려고 한 얘기가 아닌데.... 이렇게 또 우시면 어떡해요."



"그, 그래도... 훌쩍.... 저 때문에 많이 화나신 것 같아서... 훌쩍...."



마치 수도꼭지 열었다 닫는 것 마냥 자주 눈물을 쏟아내는 그녀의 눈물샘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언니의 미모를 빼다박아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녀가 애처롭게 울먹이고 있는 모습을 보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너도 나도 걸음을 멈추고는 무슨 일인가 싶어 이쪽을 주목했다.



개중에는 '저 못 된 놈의 새끼가 감히 저렇게 예쁜 여자를 울리다니' 등등의 죽일 듯한 시선을 보내오는 남자들도 있어서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미안해요. 내가 그 쪽이랑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말이 너무 심했어요. 그러니까 그만 울어요."



"아, 아니에요... 제가 잘못한 걸요...."



코를 훌쩍거리며 눈물을 슥슥 닦아내는 설희. 그 순진한 모습을 보자 나는 왠지 지난 기억이 머릿 속에서 겹쳐 지나가면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꼈다. 분명 그 때 이 타이밍에서 그녀의 언니가 등장했던 것 같은데....



".....설희?"



에이, 설마 이번에도 그럴려구.... 라고 생각하고 있던 내 머릿 속에 한 줄기 벼락이 떨어졌다. 나는 내가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하며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신기할 정도로 잘 들어맞는다는 불변의 법칙은 이번에도 엇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 언니."



설미가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방금 멀티미디어관에서 막 나온 듯한 그녀는 드물게도 평소의 그 무표정을 깨고서 매우 언짢은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야?"



"나, 난 그냥.... 언니 일하러 가기 전에 한 번 보고 가려구...."



서로 비슷하게 생긴 두 명의 여인이, 서로 상반되는 성격을 보여주며 말을 주고 받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설희의 곁으로 다가온 설미가 동생의 모습을 이리저리 뜯어보더니 그녀의 눈물자국을 발견하고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 더욱 인상을 굳힐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웠지만, 그런 놀라움보다는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불길한 기분이 더욱 신경쓰였다.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히 이 다음에 나를 공격했던 것 같은데...



"내 동생한테 무슨 짓 한 거야?"



"아,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목을 찌를 생각은 하지 말아요!"



이 대사가 튀어나온 바로 다음 순간 손끝이 목뼈를 순식간에 찌르고 들어왔었던 기억을 떠올리자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다급히 몸을 뒤로 빼면서 양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설미가 이상하다는 듯이 미간을 한 번 찡그리고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더니 나를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잠시 동안 내 얼굴을 말 없이 관찰하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더니 짤막하게 한 마디를 내뱉았다.



".....혹시 그 때 그 치한?"



"누가 치한이에요!?"



억울한 마음에 소리를 버럭 지르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옆으로 달려온 설희가 언니의 팔을 두드리며 그녀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그러지 마, 언니. 이번에도 나 도와주셨단 말이야. 빨리 사과해."



".....몰라. 어쨌든 내 동생 울리지 마."



그녀는 퉁명스럽게 한 마디 쏘아붙이고는 동생의 팔을 붙잡고 몸을 돌렸다. 아무런 감정표현이 없던 그녀가 저렇게 어떤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니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신기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보다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입이 떨어졌다.



"이 봐요, 백설미 씨!"



"......."



내 입에서 정확하게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그녀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화가 난 상황에서도 그 시선을 마주하자 도저히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는 그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에 순간 할 말을 잃을 뻔 했다. 하지만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았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내 이름 어떻게 알아?"



나는 그녀의 질문을 무시하고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그렇게 동생이 소중하면 미리미리 잘 챙겨요! 항상 한 발 늦게 나타나서 왜 애J은 나한테 뭐라 그러는 거에요? 내가 댁의 동생을 도와준건지 해코지한건지 당신이 봤어요?"



"........"



비슷하게 생긴 두 자매가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자 순간 말해놓고도 속으로 아차 싶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당황하는 동생 쪽은 그렇다치더라도, 설미가 움찔하여 조금이나마 놀란 모습을 보이자 나는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댁 동생은 길 가다가도 심심찮게 봉변을 당하는 것 같던데, 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항상 옆에 붙어다니란 말이에요. 죄 없는 사람 함부로 공격하지 말고!"



"......."



비록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 침묵은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일방적인 무시가 아니라 말문이 막혀서 할 말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속으로 지금 내가 뭐하는 건지 스스로를 뜯어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모든 말이 밖으로 튀어나와버린 후였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나는 속으로 패닉에 빠져 있었다. 어쩌자고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을까.... 가뜩이나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인데. 쪼그라든 간이 덜덜 떨리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애써 몸을 돌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거 그녀와 친해진다는 것은 이제 글러먹은거나 다름이 없었다.



"저, 저기요...."



동생의 목소리가 나를 불러세웠다. 마지막으로 뒤를 살짝 돌아보니 설희가 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담에 또 뵈요...."



그녀는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했다. 과연 진짜로 또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나는 설미의 얼굴을 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표정은 평상시의 무표정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어보였다. 하지만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당황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몸을 돌리고 계속 걸었다.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가는 왠지 내가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으아아!"



마침내 두 자매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까지 오고 나자, 나는 머리를 싸매고는 길바닥에서 절규했다. 바닥이라도 구를 듯한 기세의 절규에 캠퍼스를 지나가던 학생들이 별 미친 놈 다보겠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지만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내가 뭔 짓을 한 거야...."



호기롭게 할 말을 모두 쏟아내긴 했지만 막상 5분도 채 되지 않아서 어마어마한 후회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스스로도 모르겠다.



"심지어 앞으로 수업하면서 계속 볼 텐데...."



캠퍼스 한복판에 서서 정신병자처럼 중얼중얼 혼잣말을 뇌까리는 내 모습을 자꾸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지나갔다.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고는 힘이 빠져 그만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심지어 얼굴을 안 볼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 매주 수업시간에 같은 조로서 마주칠 사이인데 그런 말을 해버렸으니....



"흐아아..."



"무슨 고민 있으세요?"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고 있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벤치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그것도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불과 얼마 전에 보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유, 유가희 교수님?"



아까 수업시간에 보았던 예쁜 얼굴의 강사가 눈 앞에서 생긋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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