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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그녀들의 마음은 ? - 4부

일병 사다리도박사

1범

2014.06.23가입

조회 1,594

추천 3

2014.10.24 (금) 14:33

                           



감동넘치는 로맨스 명작
그녀들의 마음은 ? - 4부


교양수업을 마치고 멀티미디어관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해가 지려는지 주위가 어둑어둑했다. 할 일도 없어서 빨리 기숙사로 들어가 저녁밥이나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캠퍼스를 걷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세나?"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세나였다. 그녀도 저편에서 나를 알아보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방향을 틀어 그녀가 가던 길로 잠시 나란히 걸었다.



"개강하니 어때? 제대하고 복학하니까 적응 안 되지 않니?"



"응. 복잡하고 산만하고 그래."



이제 3학년이 되는 세나는 아무래도 나보다는 좀 더 바쁠 것이다. 나는 문득 서현이가 궁금하여 세나에게 물었다.



"서현이는?"



"글쎄, 수업 마치자마자 어디 급하게 가던데?"



"서현이 요즘 바빠?"



"걘 항상 바쁘지."



"왜?"



"남자들이 줄을 서잖아. 약속 없는 날이 언제인지 모르겠다니까."



"그래?"



"따라다니는 남자들 한 번씩 만나주는 것도 벅차대."



하기사 1학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 인기는 변함이 없는 듯 했다.



"너는 뭐 그런 인기 없어?"



"난 남자친구 있잖아."



"서현이는 남자친구 있을 때도 인기 많지 않았나?"



"그래, 난 수준 떨어져서 인기가 없다. 됐어?"



세나가 토라진 듯 입을 삐죽거리자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옆구리를 장난스럽게 찔렀다. 그래도 그녀의 분위기를 보아하니 저번의 일로 뭔가 어색한 벽 같은 것이 생기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부분은 없는 듯 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늘 수업 다 끝난 거야?"



"응. 방금 전에 교양 하나 있었는데 그게 끝이야."



"교양? 들을 만 한 것 같아?"



"응. 영화 분석하는 수업인데, 강사가 엄청 젊었어."



"혹시 유가희 교수님?"



"어? 맞아. 어떻게 알아?"



"그 쌤 유명해. 젊고 예쁘고 인기도 많고. 일부러 그 쌤 수업만 들으려는 남학생들도 많을걸?"



역시 내가 생각한 그대로였다. 하기사 기왕 수업 듣는거 중후한 아저씨나 노년의 지긋하신 교수님보다는 젊고 예쁜 여교수의 수업을 듣고 싶은 것이 남학생들의 솔직한 마음일 것이다. 세나는 수상쩍다는 듯이 나를 살피는 것 같았다.



"혹시 너도 소문 듣고 일부러 그 수업 들은거 아냐?"



"뭐? 아냐. 내가 제광이도 아니고."



나는 그 수업에서 백설미라는 이름을 들었다고 세나에게 말을 할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어쩐지 세나에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제광이는?"



"요새 일한대. 소식 뜸해."



그 후로 잠시 아무 대화도 없이 땅거미가 내려앉은 캠퍼스를 나란히 걷던 우리는 예술관 앞을 지나가면서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시간이 꽤 늦어서 캠퍼스에 인적이 드물 만도 한데, 예술관 앞은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다니며 뭔가 바쁜 일을 진행하고 있는 듯 시끌벅적해보였다.



"저게 뭐야?"



"글쎄. 뭘까?"



세나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조금 미심쩍어하며 우리가 그 앞을 가로질러 가려할 때, 그 많은 인파 속에서 한 남자가 이쪽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며 우리를 불러세우는 것이 보였다.



"저기, 잠깐만요!"



"네?"



나와 세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급하게 달려온 남자는 숨이 차는지 잠시 헐떡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저... 죄송하지만 잠깐 시간 좀 내주시면 안 될까요?"



"네? 왜 그러시죠?"



순간 나는 혹시 무슨 설문지 조사나 종교 전파 비슷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인가 싶어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내 표정을 보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운을 떼었다.



"아, 다름이 아니라, 지금 보시는 행사가 저희 예술대 학생들 졸업작품 전시 준비인데요... 본격적인 전시회에 앞서서 저희가 요즘 연습기간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이번에 복수 인물화를 계획하고 있는데, 요새 모델이 되어주실 분들을 찾고 있거든요. 그런데, 방금 보니까 두 분 지나가시는 모습이 굉장히 잘 어울리셔서...."



남자의 말은 굉장히 뜻밖의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말인즉슨, 우리에게 전시회에 쓸 인물화의 모델이 되어달라는 얘기였다. 



"그.... 저희는 커플이 아닌데....."



"하하, 정말요? 두 분이 너무 잘 어울리셔서 저는 당연히 연인사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래도 두 분을 보니까 굉장히 좋은 그림이 될 거라는 기분이 들어서 말씀드려본건데.... 내키지 않으세요?"



"흠....."



나는 입장이 난처해져 세나를 보았다. 좋은 의도로 부탁을 해오는 사람에게 거절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어떨지가 궁금했다.



"음,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그래?"



의외로 세나는 그리 당황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순전히 내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약간 재미있어하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남학생은 세나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더욱 신이 나서 우리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하하,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제가 선남선녀 그리는건 자신 있는데 한 번 믿고 맡겨 보시죠."



"그거 잘 되면 혹시 예술대 전시회에도 걸리는 거에요?"



"아, 물론 좋은 작품으로 인정되면 그럴 수도 있죠."



"와... 만약 전시되면 무지 창피하겠다. 그치?"



세나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약간 호기심이 생긴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쩔 거야?"



"흠.... 이런거 해볼 수 있는 기회도 많진 않은데. 한 번 해볼래?"



"정말?"



"응. 너만 괜찮으면. 다른데가면 내 얼굴 돈 내고 그려달라 해야 되잖아. 난 재밌을 것 같은데?"



하긴 그랬다. 요즘 시내로 나가면 길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에게 커플들이 즉석 인물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그런걸 생각하면 돈 한푼 안내고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다는건 나름대로 좋은 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실 그런 것보다도, 어쩐지 세나가 우리 사이를 연인 사이로 본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부담감을 전혀 내비치치 않는다는 사실이 내겐 좀 놀라웠다. 게다가 언뜻 보면 다소 창피할 수도 있는 일에 이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점도 굉장히 뜻밖이었다. 예전에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알았어. 그럼 잠시 있다 가자."



남학생은 우리가 승낙을 하자 적잖이 기쁜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는 우리를 실내로 안내했다. 예술대 학생들의 넓은 연습실에는 우리 말고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모습을 보아하니 우리처럼 모델 제안을 받은 사람들과 그들을 그리는 학생들의 구성인 것 같았다.



개중에는 우리처럼 남녀로 이루어진 모델들도 많았는데, 우리와는 다르게 정말로 커플처럼 보이는 한 쌍들도 꽤 있었다. 이렇게 분주한 모습들을 보아하니 졸업 작품 전시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꽤나 규모가 큰 행사인 듯 싶었다. 이거 혹시라도 진짜 전시회에 나랑 세나의 얼굴 그림이 걸리는 것은 아닌지 싶었다.



"최대한 편하게 계시면 되요. 자연스럽게."



"아... 네."



남학생은 딱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 있을 정도의 의자를 준비해주었다. 넓이는 맞춤제작이라도 된 것처럼 나와 세나가 붙어 앉으면 꽉 들어찰 정도의 넓이였는데, 생각보다 몸이 많이 밀착되어 세나의 입장에서는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으음, 두 분이서 조금 다정하게 붙어주시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다, 다정하게요?"



하기사 이런 의자에 앉아서 서로 어색하게 떨어져 있으면 그게 좋은 그림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리는 사람 입장에서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구도를 모델이 연출해주기를 바랄 것이다. 미술에 대한 상식도 없는 나였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물론 세나와 가깝게 몸을 붙이는 것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아까부터 나는 괜스레 세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내 고민을 눈치챈 것인지 세나가 난처하게 웃는 와중에도 몸을 약간 당겨왔다.



"그렇게 해. 어차피 그리기로 한 거, 안 좋은 그림 나오면 우리 기분도 안 좋을 거 아냐?"



"어어? 어... 그, 그렇긴 하지."



"자."



오른편에 앉은 세나는 내 오른쪽 팔을 치우더니 그 틈새로 약간 더 가까이 파고 들었다. 나는 이유도 모를 긴장감을 느끼며 에라 모르겠다 싶어 그녀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세나는 약간 움찔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렇다고 팔을 치우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남학생은 비로소 만족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밑그림을 그리는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세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지가 궁금했다. 어쩐지 가냘프게 느껴지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쥔 팔에서 부드러운 몸의 능선이 느껴지는 듯하여 더욱 그랬다. 내 턱끝에 살며시 닿는 세나의 검은 머리칼에서 샴푸향이 은은히 풍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내 심장소리가 세나의 귀에 닿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싫지 않은 걸까?





















"수고 많으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남학생은 중간중간 우리에게 마실 것을 주거나 화장실을 갈 수 있게끔 쉬는 시간을 주면서 배려했지만, 솔직히 나로서는 이 지루한 작업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기를 벌써 수어 차례, 마침내 남학생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이젤과 화판 앞에서 일어섰다. 



그는 꽤 만족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그의 완성작을 흥미롭게 들여다보았다. 선남선녀를 그리는 일에 자신이 있다는 말은 단순한 립서비스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전혀 근거없는 말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어떠세요?"



남학생은 본인들의 얼굴에 대해 우리가 어떤 평가를 내려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세나를 보니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하고 있었다.



"너무 이쁘게 그려주신 것 같아요!"



"하하, 남자분은요?"



사진 속 우리의 모습은 마치 흑백으로 찍은 사진에다 포토샵으로 약간의 수정을 추가한 느낌을 주었다. 초상화를 그린다는 사실에 아주 못 생기게 나와서 창피하진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이목구비가 더욱 뚜렷하게 나오도록 실력을 발휘한 작품을 보니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비록 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아마추어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작품이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작품에서는 실력과 노력의 흔적이 여실히 느껴지는 듯 했다. 



"저도 좋은 작품인 것 같아요."



"혹시 모르니까 전시회 할 때 한 번 와보세요. 본인들 그림이 있을 지도 모르잖아요?"



"네, 꼭 그럴게요!"



대답은 세나에게서 나왔다. 그녀는 그림에 매우 만족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아이처럼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나는 또다시 괜스레 설레는 기분이 들어 어색하게 웃었다. 남학생은 나와 세나를 마중하러 예대 밖까지 직접 나왔다. 우리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했고,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해가 완전히 떨어져 주변은 어느덧 캄캄하게 변해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도 아까에 비해 완연하게 쌀쌀해져 그림을 그리느라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알 수 있게끔 했다. 



"되게 잘 그린다. 그치?"



"어어...? 응. 그러게."



"아까부터 왜 그렇게 굳어 있어?"



"그거야...."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순간 말을 고르지 못했다. 네가 남자친구가 있으니까? 



"흠... 뭐, 어찌됐든 담에 전시회하면 같이 한 번 와보자."



"응! 나 궁금해. 왠지 있을 것 같아."



괜히 어색한 마음에 말을 돌렸는데 다행히도 세나는 공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문득 아까 보았던 그림의 모습을 떠올렸다. 물론 그 학생이 솜씨를 발휘해서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었겠지만, 어쨌거나 그 속에서 우리의 모습은 그의 말마따나 굉장히 다정해보였다. 마치 연인처럼.



그리고 그 속에서 옅게 웃고 있는 세나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새삼스러울 정도로 예뻐보이기까지 했다.



"......."



나는 흘끗 세나의 얼굴을 보았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였다. 친구고 뭐고를 떠나서 그 이전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왜 이렇게 아무런 거부감도 느껴지지 않는 걸까? 아니면 그저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인가?



그녀는 외모 뿐만이 아니라 성격 또한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아마 예전 그 시절의 세나였다면 아까와 같은 가까운 스킨십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유가 뭘까? 



동그란 안경을 쓴 화장기 없는 밋밋한 얼굴과 단아하게 꾸며진 지금의 얼굴이 교차되면서 스쳐지나갔다. 우습게도 나는 지금 그녀를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그림 속 모습만을 보고 느끼는 감상이 아니었다.



"집에 갈 거야?"



"으응. 저녁에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남자친구?"



불쑥 묻고 나서 또다시 그 때처럼 아차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다음 순간 내가 혼자서 지레 겁먹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정도는 당연히 물어볼 수 있는 건데.... 친구끼리 바보같이.



"아니. 그냥 친구."



"아아... 그, 그렇구나."



세나는 아쉽다는 듯이 방긋 웃었다. 나는 혼자서 이유 모를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혼란을 느꼈다. 기왕 이렇게 된거 그녀를 학교 정문까지 바래다주기로 하고 우리는 같이 걸음을 떼었다.



"너는 그림 잘 그려?"



"어? 나는 아예 못 그려."



나란히 걷다가 불쑥 나온 세나의 질문. 나는 괜한 허세를 부리고 싶지 않아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세나는 작게 웃더니 옛 일을 회상하듯 아련하게 말했다.



"대신 너는 피아노를 잘 치잖아."



순간 조금 의아했다. 그걸 대체 얘가 어떻게 알고 있을까?



"어...? 그닥 잘 치는건 아닌데. 근데 어떻게 알아?"



"너 예전에 나한테 피아노 쳐준 적 있었어. 기억 안 나? 쇼팽의 녹턴...."



"........"



그런 적이 있었던가? 세나는 내 표정을 살피더니 서운한 듯 쓸쓸하게 웃었다. 



"기억 못하는구나."



"어어? 미, 미안. 그게 언제였지?"



"우리 신입생 때. 학기 초였어."



하기사 내가 군대가기 전이라면 당연히 신입생 때였겠지. 하지만 나는 여전히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초조한 기분도 들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지금 떠올리지 못한다면 세나가 많이 섭섭해 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난 아직도 기억해. 그 때 기숙사 피아노실에서."



뭔가 불투명했던 흐릿한 기억들이 색깔을 띄고 선명해질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는 새에 우리는 어느덧 학교 정문 앞까지 걸어와있었다.



"나 이만 가볼게. 수업 열심히 듣구."



"으응... 잘 가."



굽 소리를 또각또각 울리며 걸어가는 세나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답답한 기분이 느껴졌다. 분명히 좋은 친구사이였건만, 그 사이에서 이런 이질적인 기분을 느끼고 있는 내 모습이 낯설었다. 대체 달라진게 뭘까? 그녀의 외모? 아니면 내 마음? 





















까딱하면 저녁식사 시간에 늦을 뻔 했다. 비록 맛 없는 기숙사 밥이지만 이걸 굶으면 밖에 나가서 뭘 사먹지 않는 한은 꼼짝없이 저녁을 못 먹게 된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춘 것을 감사하며 영양사 아주머니들이 퍼주는 식사를 식기에 담아서 아무 자리에나 걸터앉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녁식사 시간대가 거의 지나갔기 때문인지 식당 내에 남아있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 아마 내가 거의 마지막이었나보다. 하기사 어차피 일찍 왔어도 밥을 같이 먹을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게 인적이 뜸해진 식당 테이블에 홀로 앉아 외롭게 밥을 꾸역꾸역 먹고 있는데, 뜻 밖에도 내 앞에 또 하나의 식기가 내려앉더니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맞은 편에 앉았다. 



"이승태 씨~ 하이요."



"서승태라니까요. 김단비 씨."



"아아~ 맞다! 근데 저도 김단비 아니에요."



"알아요. 복수해 본 거에요. 윤단비 씨."



요새들어 오며가며 꽤 자주 마주치게 된 여학생의 얼굴이 보였다. 같은 기숙사에 살다보니 밥 먹을 때나 매점 갈 때나 가끔씩 얼굴을 볼 일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이렇게 인사 한 마디씩 주고 받는 사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운동 시설에서 그녀를 볼 수 있을 거라는 내 막연한 기대감은 계속 엇나가고 있었다. 그 때 엘리베이터에서 나눈 얘기로 짐작하면 꽤 운동을 자주 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시설에 내려갈 때면 항상 그녀의 모습은 없었다. 자꾸 시간대가 어긋나서 그런 걸까?



"헤헤. 자꾸 누구 씨, 누구 씨, 하니까 어색하네요. 우리 그냥 편하게 이름 불러요!"



"먼저 이름이나 제대로 외우시고 그런 말을 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뭐야....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꽉 막히셨네요."



".... 어떻게 하면 얘기가 그렇게 되죠?"



요새들어 그녀를 볼 때마다 내게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먼저 얼굴을 보고나면, 그 다음에는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는 버릇이었다. 그 이유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내가 부끄러워지고 죄 지은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그녀의 엄청난 몸매 탓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남자의 본능은 솔직한 법이라, 시선을 돌리고나면 곁눈질로 그녀의 모습을 살피는 추가적인 못된 버릇도 슬슬 생기려 하는 참이었다. 



"그러고보니 단비 씨 몇 살이에요?"



"네?"



배가 고파도 참 많이 고팠는지, 입에 허겁지겁 반찬을 쑤셔넣기 시작한 그녀는 내 갑작스런 질문을 받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편이 튀길까봐 배려한 건지는 몰라도 그녀는 말 대신 양 손을 이용해 손가락을 차례대로 두 개, 열 개, 네 개를 펼침으로써 자신이 스물 네 살이라는 점을 밝혔다.



"정말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쩝쩝, 도아이아서 그애요."



내가 해석을 올바르게 한게 맞다면, 저 말은 아마 '동안이라서 그래요'일 것이다. 보통 저런 말을 스스로 뱉을 수 있나? 참 뻔뻔한 아가씨였다. 간신히 입 안의 내용물을 전부 다 삼킨 그녀는 목이 메이는지 물을 꼴깍거리면서 들이키더니 이내 궁금하다는 듯 내게 역질문을 해왔다.



"승태 씨는요?"



"스물 세살이요."



"뭐라구요? 그러면 내가 누나에요?"



"뭐... 이제보니 그러네요."



"말도 안 돼.... 얼굴만 봐선 그렇게 젊어보이지 않는데."



"험담하시는 솜씨가 아주 자연스러우시군요."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고 그 모습은 퍽 진심인 듯 하여 왠지 김치맛이 씁쓸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볼 때마다 느껴지는 소감은 참으로 도발적인 인상이라는 느낌이었다. 



별다른 표정을 짓거나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마치 유혹하듯이 살짝 치켜올라간 여우같은 눈꼬리는, 그녀의 섹시한 몸매만큼이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낯부끄러운 기분을 느끼게 하곤 했다. 딱히 도발적인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닌데, 그 야시시한 느낌의 얼굴과 몸매가 자꾸만 사람을 괜스레 민망하게 만드는 그런 외모였다. 



엄밀히 말하면 동안이라는 말보다는 화려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외모였다. 얼굴이든 몸매든 말이다. 하지만 본인이 과연 그 사실을 알지는 잘 모르겠다.



"으음. 그러면 내가 존댓말 할 이유가 없잖아! 이제부터 반말할래."



뭔가 깊이 고민하는 것 같더니 그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그래도 되지?"



"벌써 말 놓고 있네요 뭐. 그럼 저도 누나라고 부를게요."



"좋아! 지금부터 내가 누나야."



마치 이겼다는 듯이 뿌듯한 표정을 짓는 모습에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 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여 목을 가다듬고 졸지에 누나가 되어버린 그녀에게 물었다.



"근데 운동하러 요즘은 안 나오시나봐요?"



"응? 자주 가는데?"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잖아요. 그 때 말고."



"뭐야, 그럼 나 찾고 있었어?"



예비과정도 없이 곧바로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는 그녀의 갑작스런 멘트에 그만 미역국을 뿜을 뻔 했다. 나는 얼굴이 그리 붉어지지 않았으리라 스스로 타이르며 궁색한 변명을 했다.



"그, 그게 아니고, 누나가 저번에 한 번 같이 하자고 했었잖아요."



"아아, 그거!"



기억난다는 듯 젓가락을 휘두르며 그녀가 천진난만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아쉬웠단 말이군."



"벼, 별로요."



말을 놓기 전엔 몰랐는데, 편하게 말을 하기 시작하니 어쩐지 내가 휘둘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괜히 그러라고 했나?



"근데 넌 왜 이렇게 늦게 밥 먹어?"



"오는 길에 예대 앞에서 좀 일이 생겨서....."



"예대 앞? 요즘 전시회 준비하는거?"



"네. 아시나봐요?"



"그럼. 나도 예대 학생인데."



"정말요? 그럼 누나도 미술하시는 거에요?"



"응. 난 시각디자인과라서 걔네들 하는 거랑은 좀 다르지만."



그렇군... 화려한 스타일을 보아 짐작하건대 왠지 그녀의 이미지와 잘 어울릴 것 같은 전공이긴 했다.



단비 누나는 정말로 허기져 있었던 것 같았다. 남자가 먹는 속도를 여자가 따라오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누나는 오히려 나보다도 빨리 먹는 것 같았다. 마치 걸신 들린 듯한 그 모습에 체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천천히 먹어요. 그러고보니 누난 왜 이렇게 늦게 먹어요?"



전부 삼키기까지 기다리느라 대답은 조금 뒤에야 나왔다.



"쩝쩝, 원래 오늘은 야간 수업 때문에 늦게 마쳐. 밥도 뛰어와야 겨우 먹는다니깐."



"그래도 배고플 때 빨리 먹으면 체해요."



경이로울 정도의 먹는 속도 덕분에 식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밥을 먹고 식당을 나서면서 단비 누나는 난감하다는 듯 배를 문질렀다. 



"어? 나 소화 안 되는 것 같다."



"그러게 말했잖아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나는 단비 누나의 가슴 언저리를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배를 문지르느라 더욱 타이트하게 붙은 티셔츠 표면 위로 굉장한 굴곡을 뽐내고 있는 봉긋한 가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부디 그 소리가 누나에게 들리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음... 괜찮아! 운동하면 소화 잘 돼."



문득 오늘 시설로 내려가면 그녀를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살짝 기대감이 생겼다. 



"밥 먹고 바로 운동하시게요?"



"아니~ 한 아홉 시쯤?"



뜻 밖의 수확이었다. 나는 잊어버리지 않도록 시간을 잘 외웠다. 



"왜? 나 보려고?"



"하하.. 웃기지 마세요. 저도 매일같이 운동하던 사람이에요."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단비 누나의 말이 반쯤은 진실이었다. 그리고 말은 안했지만 그녀도 속으로는 그걸 눈치채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게슴츠레한 눈과 씨익 웃는 모습을 보니 말이다. 어쩌면 맹해보이는 겉모습하고는 다르게 내 생각보다 훨씬 눈치 빠른 여자가 아닐까 하는 미심쩍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은근히 기다려졌던 아홉시가 되자 나는 지하로 내려갔다. 기숙사 운동시설의 규모가 썩 큰 편은 아니었지만 그리 떨어지는 수준도 아니었고, 게다가 기숙사생에 한해서는 무료 이용이기 때문에 사생들 중에서도 상당히 많은 학생들이 시설을 이용하고 있었다. 



단점이라면 헬스클럽하고는 달라서 샤워시설이나 운동복 제공 같은 서비스가 없이 말그대로 여러가지 운동기구만이 배치되어 있을 뿐이라는 점, 그리고 장점이라면 오로지 대학생들만 이용하는 시설이다보니 물이 굉장히 좋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운동하는 내내 눈이 즐겁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단비 누나는 유독 돋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는 이미 런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었다. 내가 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누나는 뒷모습만 보인 채로 꽤 집중해서 달리고 있었다. 나는 혼잡한 인파 속에서 자리를 잡고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단비 누나의 뒷모습을 흘끗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저번에 보았던 그 엉덩이에 영문 알파벳이 가로로 새겨진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역시나 풍만한 엉덩이의 빵빵한 볼륨감 덕분에 알파벳은 어쩐지 본래의 디자인보다 훨씬 크게 부풀어 보였다. 게다가 지금은 그 때와는 다르게 달리는 중이라 엉덩이가 위아래로 실룩거리며 알파벳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자극적일 수가 없었다. 



'섹시한 것도.... 저 쯤 되면 무기겠다.'



나는 되도록이면 그 야릇한 뒷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왜냐하면 트레이닝복을 입은 상태에서 자지가 섰다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꼴을 연출하게 되니까. 하지만 그것도 말처럼 쉬운게 아니었다. 내 옆에서 같이 스트레칭을 하던 남자들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렸기 때문이다.



"야야, 왼쪽 세번째 런닝 타고 있는 여자 봐봐. 몸매 진짜 죽인다."



"말 안해도 나도 보고 있어. 요새 저 여자 보려고 내려오는데."



런닝 머신의 수를 가만히 세어본 나는 그 말들이 단비 누나를 두고 하는 얘기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기사 누나의 쭉빵한 몸매는 어딜 간들 주목을 모으지 않는 것이 되려 이상하겠지만, 우습게도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나하고 누나는 별 관계도 아니고, 심지어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다른 남자들이 그녀의 몸매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스멀스멀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게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보고 느낀다는 그 근거 없는 소유욕인가?



'운동하자.'



나는 헛생각을 집어치우고 내 할 일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원래 유산소 운동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런닝머신은 빈 자리가 하나도 없이 꽉 차 있었다. 게다가 내 소중한 존슨에 걸고 확실히 장담하건대, 특히 단비 누나의 근처 자리는 주위의 남자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기다리고 있음을 분위기만으로도 딱 알 수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대기열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마 단비 누나의 옆에서 달리고 있는 저 남자가 내려오면 모르긴 몰라도 그 순간 여럿의 남자들이 동시에 우르르 움직일 것임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녀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그 옆의 남자도 내려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 또한 너무나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같은 부류로서의 동질감을 너무나도 쉽게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남성들의 모습이 참으로 씁쓸하다못해 훈훈하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물론 나도 그 중 하나고.



아쉬운 마음에 나는 평소 쓰던 무게의 아령을 집었다. 벤치기구와 웨이트머신에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나는 비교적 한산한 곳으로 옮겨서 팔과 어깨 부위의 근력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운동을 하면서도 계속 단비 누나의 뒷모습에 눈이 가는 것을 스스로도 어찌할 수는 없었다. 



한 세트 하고, 뒷 모습 한 번 보고, 한 세트 하고, 엉덩이 한 번 보고, 한 세트 하고, 야한 생각 한 번 하고......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람?



"헤이!"



엉덩이의 알파벳을 한 번 보고, 다시 한 세트를 하고, 또 뒷모습을 훔쳐볼 요량으로 마침 돌아서려던 타이밍이었다. 누군가가 내 등을 톡톡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어느새 머신에서 내려온 단비 누나가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으면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저 멀리 그녀가 타고 있었던 런닝머신 근처를 흘끗 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주위에서 눈치만 보고 있었던 수 많은 남학생들이 침울해하는 것이 보였다. 나란히 같이 달리던 그 남자는 대놓고 한숨을 푹 쉬면서 운동을 접고 아예 시설을 뜨는 모습도 보였다.



"어... 음... 어디 있었어요?"



나는 짐짓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던 척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자 단비 누나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여태까지 실컷 봐놓고 이제와서 웬 모른척?"



"보, 보다니요...? 제가 언제...."



내 궁색한 반응에 그녀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단비 누나는 이리 와보라는 듯이 내게 손짓했고 나는 영문도 모른채 쭐래쭐래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누나는 아까 자신이 탔던 런닝머신 바로 앞까지 날 데려온 다음 저기를 보라는 듯 손가락을 들었다.



"저기 봐 봐. 보여?"



나도 모르게 손가락의 끝을 시선으로 쫓던 나는 깜짝 놀랄 만할 광경을 보게 되었다. 멀리서 흘끗거리며 봤을 때는 미처 몰랐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그 런닝머신 앞에는 투명한 유리창이 있어서 뒤쪽의 모습을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말인즉슨, 누나는 달리면서도 유리창을 통해 뒤쪽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너 올라가서 뛰어봐! 내가 저~기서 너 보고 있을게. 내 모습 보이나 안 보이나."



"으으.... 알았어요. 인정할 테니 그만 놀리세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발뺌해봐야 꼴만 더 웃길 뿐이었다. 나는 머리를 감싸쥐며 고개를 푹 숙였고 누나는 다시 한 번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솔직히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어벙해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그녀의 눈치가 백 단이라는 사실을. 아니, 어쩌면 이것도 일부분일 뿐 그녀의 진면목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울 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느낌도 살짝 들었다.



"근데 왜 계속 봤어?"



"네?"



"니가 너무 자주 보길래 누가 내 등에 뭐 붙여놨나 싶더라구."



"........"



아아, 쪽팔린다. 아아, 신이시여.



"응? 왜 계속 봤냐니깐? 응?"



"모, 몰라요. 운동이나 하죠, 우리."



"보니까 운동도 그닥 열심히 안 하는 것 같던데."



"윽...."



나는 새삼스럽게도 아까 누나에게 말을 놓으라고 한 것에 대해서 미묘한 슬픔과 미묘한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슬픔은 그 이후로 묘하게 계속 휘둘리고 있는 내 모습 때문이고, 기쁨은 왠지 모르게 그녀와 좀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러니까 왜 봤는지 순순히 털어놓아 보실까요, 동생 님?"



"집요하시군요."



"말 안하면 나 소문 낼거임."



"뭐라고 소문 낼 거에요? 어떤 남자가 자꾸 본다고?"



"아니! 형용사가 없잖아. 기숙사에서 운동하는데 자꾸 어떤 남자가 '음탕한' 시선으로 본다고."



누나는 음탕한이라는 대목에서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또박또박 강조했다. 주위에서 누가 들을까 싶어 순간 그녀의 입을 틀어막을 뻔 했다.



"으, 음탕하다니요? 유리창으로 그런 것까지 볼 수 있었다는 뻥은 사절입니다."



"그건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아우라 같은 거야. 시커멓고 불순한 시선이 말이지."



역시 이 여자는 생각보다 위험한 여자였다. 말을 놓은 이후부터 거침없이 나를 궁지로 몰고가는 면모에 나는 제대로 받아칠 수조차 없었다. 사실 그녀의 말이 어느 정도 진실이기도 했고.....



"암튼 전 그런 적 없어요. 그런 불순한 시선은 다른 남자들이 보냈던 거겠죠."



"다른 남자들? 또 누가 날 보는데?"



하하... 내 눈은 그렇게 잘 캐치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들의 시선은 못 느꼈다니 이건 정말이지 어불성설이다. 이젠 확실히 알 것 같다. 이 여자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척을 하고 있는 거다.



나는 더 얘기했다간 돌이킬 수 없이 휘둘릴 것 같아서 누나를 무시한 채 다시 아령 운동을 계속했다. 날 놀려먹으려는게 분명했던 의도가 실패하자 누나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내 정강이를 한 대 걷어차더니 자기도 가벼운 아령을 들고 와서 내 옆에 나란히 섰다.



"나도 그거 가르쳐줘!"



"네? 뭘요?"



"그거 말야. 그거."



누나는 내가 하고 있는 운동을 가르키면서 아령을 붕붕 휘둘렀다. 여태껏 하고 있었던 것은 간단한 덤벨 삼두 운동이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의아했다. 



"누나가 팔 근육 붙여서 뭐하시게요?"



"바보야. 꼭 울퉁불퉁하게 만들려고 운동하는 건 아냐. 근력 운동도 해야지 탄력이 생긴다구. 봐 봐~"



단비 누나는 장난스럽게 민소매 나시티 밖으로 드러난 자신의 매끈하고 튼실한 팔을 찰싹찰싹 때려보였다. 나는 짐짓 관심없는 척 하면서도 그녀의 몸매를 눈으로 훑었다.



섹시한 몸매라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까 정말로 건강미가 넘치는 몸이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운동을 자주해서 그런지, 온 몸 곳곳에 탱탱한 탄력이 붙어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여태껏 보아왔던 헐렁하고 두툼한 옷이 아니라 이렇게 몸에 달라붙는 타이트한 나시티 위로 보니, 가뜩이나 커다란 그 왕가슴이 더욱 불룩한 곡선을 그리고 있어서 터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민망해지는 그 특유의 야시시한 느낌이 다시 한 번 나의 아랫도리를 찔렀다. 묵직하게 힘이 들어가는 내 소중한 베이비를 느끼고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본능적으로 나의 시선은 그녀의 엉덩이를 훔쳐보고 있었다. 볼륨감으로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그 알파벳들은 이제보니 'passion' 이라는 단어를 이루고 있었다. passion.... 열정이라는 뜻이었다.



"몸매가... 꽤 좋으시긴 하네요."



내가 보기에도 이것은 진실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궁색한 발언이었다. 단비 누나의 몸매는 꽤 좋은 정도가 아니라 단 2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만큼 굉장함을 자랑하는 몸이었고, 또 그러면서도 동시에 무척이나 야했다. 저만한 왕가슴과 빵빵한 엉덩이를 어떻게 저런 개미 허리로 지탱하고 있는지가 참으로 미스테리할 정도였다.



"당연하지. 그러니까 너 계속 보고 있었던 거 아냐?"



"제발 그만 놀리세요." 



정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한 살 더 먹은 위엄을 과시하는 그녀였다. 단비 누나는 놀리듯이 깔깔 웃으며 내게 다시 재촉했다.



"그러니까 가르쳐 달라구."



"뭐 보니까 더 열심히 할 필요도 없겠구만...."



궁시렁거리는 입과는 다르게 나는 꽤 묘한 기대감을 가지고 그녀에게 삼두 운동의 자세를 가르쳐주었다. 처음 배우는 거라고는 생각도 못할 만큼 첫 시범에 자연스러운 자세를 보이며 능숙하게 따라하는 그녀를 보자, 과연 정말로 이걸 몰라서 가르쳐달라고 한 걸까 하는 미심쩍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나는 어쩐지 그녀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된 거 이대로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 휘둘리기보다는 나도 장난으로 응수해보자는 짖은 생각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에이, 그게 아니죠. 이리 와 보세요."



"어어? 아니야?"



역시나 내가 자세를 지적하자 그녀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그럼요. 여기가 이렇게 되면 안 돼요."



나는 이래도 되나 좀 망설였지만, 이미 장난기가 발동하여 그녀의 어깨 아래 팔뚝 부분을 슬쩍 움켜쥐고는 자세를 교정해주는 척 거드름을 피웠다. 손 끝으로 군살 하나 없는 탱탱한 탄력이 짜릿하게 느껴져 왔다. 민소매 차림이었기 때문에 매끄러운 그녀의 맨살을 그대로 만지고 있다는 사실 또한 무척이나 자극적으로 와닿았다.



척 보기에도 근육이 불필요하게 덕지덕지 붙은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보기 좋게 붙어 건강미가 줄줄 흐르는 매끄러운 팔을 이루고 있었다. 손 끝부터 어깨까지 한 번 마음놓고 쓰다듬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팔이었다. 



"정말?"



"당연하죠."



나는 단비 누나의 몸 뒤에서 그녀의 한쪽 팔을 살며시 감싸 쥔 채로 그녀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맨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팔이 외간남자의 손에 붙들려 있었지만 그녀는 조금 움찔하기만 했을 뿐 뿌리치거나 하지 않았다. 



누나가 고개를 뒤로 들었다. 그녀의 키는 딱 내 턱 끝까지 올 정도의 높이였는데, 덕분에 고개를 들자 서로의 시선이 가까이에서 부딪혀 속눈썹 한 올까지도 보일 수 있을 만큼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런 상황까지는 나도 예측을 못했기에 삽시간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



"피~ 거짓말. 그렇게 하면 팔보단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데?"



"그렇게 잘 아시면서 왜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어느 정도 대답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기에 이번엔 흔들리지 않고 받아칠 수 있었다. 단비 누나는 재미있다는 듯이 그 가까운 거리에서 나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그녀가 먼저 부담을 느끼고 몸을 뺀다면 모를까, 나는 먼저 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마주 내려보고만 있었다.



고개를 뒤로 젖힌 탓에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나시티의 앞섶이 조금 벌어지면서 풍만한 가슴의 맨살이 살짝 엿보였다. 충격적일만큼 야릇한 광경에 나는 이 상황도 잊고 그만 아랫도리에 불끈 힘을 주고 말았다.



"어?"



단비 누나가 얼빠진 의문사를 뱉었다. 나는 아차 싶어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당혹감을 느꼈다. 내가 미처 제지할 틈도 없이 우뚝하게 고개를 든 나의 물건이 그녀의 엉덩이 윗부분에 가서 살짝 닿은 것이다. 시와 때를 분간도 못 하는 내 건강한 자지의 머리 부분은 정확하게 트레이닝복 알파벳 'passion' 의 's' 부분을 슬쩍 찔렀다.



"아... 그... 미, 미안해요."



나는 내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황급히 그녀의 팔을 놓아주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큰 실수였다. 트레이닝바지 앞부분이, 비록 완전히 발기된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눈으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은 불룩하게 팽창 된 모습을 그녀에게 보이고 만 것이다.



"어?"



단비 누나는 똑같은 소리를 한 번 더 뱉었다. 나는 바짝 긴장하여 그녀의 얼굴을 차마 마주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다. 그녀가 날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오늘 기숙사로 올라가면 창문을 열고 아래로 고공 낙하하는 것을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았다.



누나는 잠시 말 없이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일분 일초가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어색하고 민망한 침묵이었다. 인간이 순간이동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안타까웠던 적은 없었다. 말그대로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당장 들어가서 숨고만 싶었다.



한쪽 뺨을 손가락으로 긁으면서 내 표정을 가만히 살펴보던 누나가 이윽고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 있잖아."



"....네, 네?"



"건강하다?"



"네에?"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만 멍청한 소리를 뱉었고 누나는 이제 아예 배를 잡고 깔깔 웃어댔다. 그 모습 때문에 족히 열 배는 더 창피했지만, 적어도 그녀가 나를 무슨 짐승새끼 보듯이 보지는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한편으로는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 그만 웃으세요."



거의 눈물이 날 만큼 실컷 웃어젖힌 단비 누나가 속눈썹 끝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웃겨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다시 내 앞에 와서 몸을 돌리고 섰다.



"다른 사람들 보면 난감하겠지? 잠시 가려줄게."



"그... 그... 괜찮은데...."



"어? 괜찮아? 그럼 말고."



"아, 아니에요! 제가 잘못 말했어요."



누나는 다시 푸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너무도 창피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단비 누나와 가깝게 몸을 밀착시키고 있는 나를 부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혹은 죽여버리고 싶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들 있었다.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비교적 한산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인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다들 모르고 있는 듯 했고,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단비 누나의 눈물 겨운 배려에 고개 숙여 인사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이렇게 건강하셔서 아까 그렇게 음탕한 눈으로 계속 쳐다보신 거에요? 건강남씨?"



"으, 음탕한거 아니라니까요....."



"어쭈? 이 마당에 거짓말을? 그럼 난 가지 뭐."



"아악, 잠시만요!"



그녀가 이대로 훌쩍 가버리면 나는 불룩한 텐트의 위용을 만천하에 자랑하며 이 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감사의 인사를 날리고픈 마음도 잠시, 나는 아직도 위기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실감했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대답해 보시죠? 음탕했어요, 안 음탕했어요?"



"쪼... 쪼금요."



나는 엄지와 검지를 닿을락 말락 들어보이며 넌지시 인정했고 단비 누나는 또 한 번 깔깔 웃었다. 누나가 내 텐트를 가려주느라 생각보다 훨씬 가깝게 밀착되어 있어서 웃느라고 몸을 들썩일 때면 아까처럼 계속 내 불끈 솟은 자지가 그녀의 풍만한 엉덩이를 쿡쿡 찌르곤 했다.



그 덕분에, 일초라도 빨리 가라앉혀야 하는 내 물건은 오히려 더욱 탄력을 받아 도무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적극 활용하여 눈을 감고 애국가도 부르고 내 생 최악의 순간들까지 떠올려보며 갖은 시도를 퍼부었다. 



그 눈물겨운 노력을 하늘이 어여삐 여겼는지, 천만다행으로 시간이 지나자 점차 불기둥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제 된 것 같아요."



"호오.... 반가운 소식이로군."



누나는 그제야 몸을 떼더니 빙글 돌아서서 나를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지주대가 가라앉아 잠잠하게 사그라든 나의 조용한 텐트를 슬쩍 내려다보고는, 다시 내 얼굴을 슬쩍 올려다보더니, 아니나다를까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제발 그만 좀 웃어주실래요? 자살할 지도 몰라요."



"푸하핫, 아, 알았어, 알았어. 깔깔깔."



단비 누나는 손을 내저었지만 여전히 웃겨 죽는다는 듯이 자지러지고 있었다. 가만히 놔두면 바닥이라도 데굴데굴 구를 기세였다. 



"으으.... 저, 저 가요."



"아하하하.... 어어? 야, 건강남! 운동 얼마나 했다고 벌써 간대?"



힘들어서가 아니라 쪽팔려서 여기 더 못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오늘의 운동을 주저없이 내일로 미루고 신속히 자리를 떴다. 그러자 단비 누나가 촐랑촐랑 쫓아오면서 계속 까불어댔다.



"야아~ 은인을 이렇게 두고 가는 법이 어딨어?"



"눈물나게 고마워하고 있긴 하지만 신세는 다음 번에 갚을 게요."



내가 단비 누나와 함께 시설을 나서자 등 뒤에서 따가운 눈총다발이 등으로 날아와서 후두둑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도무지 웃음을 그칠 줄을 모르는 단비 누나를 억지로 떠밀어 여자 기숙사의 엘리베이터 속으로 밀어넣고는 나의 호실로 올라왔다. 



별로 운동을 하지도 않았는데 식은땀으로 온 몸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후다닥 끝내고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나는 방금 전의 그 쪽팔린 기억을 회상하며 잠시 손발이 오그라드는 고통을 온 몸으로 체험했다.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던 순간까지 배꼽이 빠져라 웃어대던 단비 누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도 이 와중에 그나마 다행스러운 한 가지 사실은, 그녀가 나를 무슨 천하의 변태자식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정말로 오늘 저 얇은 유리를 산산히 부셔놓고는 주저없이 아래로 몸을 날렸을 것이다.



"으음...."



어느 정도 창피함이 가시고나자 이번에는 흥분이 물 밀듯이 밀어닥쳤다. 나는 자지 끝에서 느껴지던 그 탱탱하고 풍만한 엉덩이의 감촉을 다시 회상하려고 애썼다. 죽을 만큼 창피했던 느낌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지만 그 아찔한 감촉을 다시 되짚는 것은 마냥 쉽지 않았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제대로 새겨두지 못했던 탓이겠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더라."



나는 적적한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달래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렇게라도 위로해야 조금이나마 덜 창피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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