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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그녀들의 마음은 ? - 2부

일병 사다리도박사

1범

2014.06.23가입

조회 2,585

추천 4

2014.10.24 (금) 14:31

                           



감동넘치는 로맨스 명작
그녀들의 마음은 ? - 2부

어딘지 모르게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카페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느낀 첫 소감은 그랬다. 안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저마다 고개를 돌려가며 가게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테이블을 비추는 호박색의 희미한 조명 아래 겨우살이를 생각나게 하는 가느다란 장식들이 줄기줄기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일정한 규칙이나 형식 같은 것이 없이 추상적으로 꾸며진 듯한 느낌. 거의 모든 것들이 그러했다. 선반 위의 장식품들도 어떤 것들은 아기자기했지만 또 어떤 것들은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테이블의 수는 많았지만 모양이 대부분 제각각이었고, 심지어 그 위치 또한 일정하게 배열된 것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여기저기에 놓여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개성 있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가게를 둘러보던 세나가 짤막한 감상을 말했다.



"너 여기 처음 와 봐?"



"응."



"남친이랑 와 본 적 없어?"



"원래 우리 카페 잘 안 가."



아까부터 기회만 엿보고 있던 제광이가 이 때다 싶었는지 잽싸게 끼어들었다.



"아까 얘기가 무슨 뜻이야? 여기 알바생이 그렇게 이뻐?"



"아, 궁금하면 직접 가서 보던지!"



서현이가 버럭 성을 내었다. 표정을 보니 당장 주먹이라도 한 방 갈길 기세였다. 세나가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할겸 설명하고 나섰다.



"너 설미 알아?"



"설미? 우리 학과 그 백설미?"



"니가 걔는 또 어떻게 알아? 너 군대 갔을 때 입학했는데."



쌍심지를 켜고 서현이가 또 성질을 부렸지만 제광이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군대 늦게 간 동기들한테 소문 다 들었지 뭐. 그 설미란 애가 입학하고나서 네 존재감이 많이 죽었다지 아마."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원래 학과 퀸카 자리가 네 거였는데 걔가 들어오고 나서 뺏겼다며? 그렇게 이쁘다던데."



"웃기지 마! 누가 그딴 소릴 해?"



"승택이가."



"승택이? 권승택? 아오, 이 새끼를 그냥...."



둘의 대화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던 나는 궁금증이 생겨서 세나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난 그런 소문 못 들었어. 걔가 유명해?"



"응. 유명해. 우리 학과 후밴데 한 학번 밑이야. 너네 군대갔을 때 입학했으니 넌 모르겠구나."



"모르는게 당연한거 아냐? 군대에서도 그런 소문 챙겨듣는 군바리가 이상한거지. 하여튼 여자라면 그저 헤블레 해가지고는....."



"야야, 챙겨들은게 아니라 애들한테 연락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줏어듣는거지. 사람을 뭘로 보고...."



도대체 왜 잠시 동안만이라도 싸우지 않고 지낼 수는 없는 것인지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는 한 쌍의 말다툼을 뒤로하고 세나는 부연설명을 이었다.



"예쁜 걸로도 유명하지만 성격 때문에 더 유명해."



"무슨 성격?"



"음....."



세나는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단어를 고르기가 굉장히 어려운 듯 했다.



"그게.... 무뚝뚝? 까칠하다고 해야 하나? 우리 학과인건 다들 알지만 그 애하고 제대로 말 섞어본 사람은 거의 없대. 먼저 가서 말을 걸어도 세 마디를 넘어간 적이 없다더라."



"그래? 그냥 내성적인거 아냐?"



"난 모르지. 걔하고 말 안 해봤으니까."



"그래그래, 나도 소문 들어봤어. 학기 초에 그 설미라는 애하고 어떻게든 친해져보려고 선배들이랑 남자애들이 말 몇마디 붙여봤다가 망신만 당했다던데?"



"니가 군대를 조금만 늦게 갔어도 그 무리를 선두에서 이끌었겠지."



넌지시 끼어드는 제광이에게 역시나 가차없는 서현이의 면박이 날아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광이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근데 그게 왜? 혹시 여기 알바생이 그 설미라는 애야?"



"맞아. 얼마 전부터 알바 시작한 것 같던데. 그래서 요즘 학과에 소문 자자해. 너도나도 한 번씩 가보겠다고."



"그으래? 좋았어. 내가 주문하러 가면서 얼굴 보고 올게."



괜스레 옷매무새를 두어번 탁탁 정리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제광이. 마치 레이저빔을 방불케하는 도끼눈을 뜨고 서현이가 그 뒷모습을 노려보았지만 녀석은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세나는 얼이 빠져서 중얼거렸다.



"......우리가 뭐 마실 줄 알고 지가 주문을 한대?"



"내가 가서 주문할게. 니들 뭐 마실래?"



나는 속으로는 제광이의 뒤를 따라갈 수 있는 좋은 구실이 생긴걸 아주 약간은 기뻐하면서 짐짓 근엄한 표정을 유지했다. 세나는 약간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외우기도 힘든 긴 이름의 무슨 모카치노 어쩌구를 부탁했고 서현이는 골머리가 아프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은채 시원한 스무디를 주문해달라고 했다.



나는 메뉴의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서너번 달달 외운 후에 호기심 반 기대 반의 충실한 궁금증을 품고 제광이의 뒤를 쫓았다.





















"뭐야? 예쁜 여자는 안 보이는데?"



주문대에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 멈춰 선 제광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실망스러운 한숨을 토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물론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니가 보기에도, 지금 주문대에 서 있는 저 후덕한 아가씨가 학과를 떠들썩하게 만든 그 전설의 미녀는 아닌 것 같지?"



"어어. 만약 그렇다면 우리 학과에는 이제 정상적인 남성의 씨가 말랐다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밖에."



확실히 내가 생각해도 세나의 설명이 지금 주문을 받고 있는 저 통통한 알바생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우리는 뭔가 뒤통수를 맞은 찝찝함과 더불어 혹시 여자애들이 갓 제대한 군바리의 외로운 마음을 낚기 위해 고도의 페이크를 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느껴야 했다.



"에이, 가자. 낚였나보다."



"야, 주문은 하고 가야지."



본연의 목적이 주문인지, 알바생 얼굴 관람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게끔 해주는 제광이를 뜯어말리고 있는데 문득 주문대에서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들렸다.



"설미 왔니?"



"예, 언니. 이제 교대해요."



"어디 갔다 왔어?"



"화장실 청소 좀 했어요. 지저분하길래."



누가 친구 아니랄까봐 우리의 고개가 정말이지 똑같은 속도로, 똑같은 각도로 동시에 홱 돌아갔다.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비록 그녀의 기억에는 남아있지 않겠지만, 그 순간이 분명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평생 잊지 못할 그 날짜,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나는 그녀를 처음으로 보았다. 그 짧은 한 순간이 뇌리에 새겨져 너무나도 생생하게 오랫 동안 기억될 것임을 난 그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을까? 



"주문하시겠어요?"



창백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새하얀 피부에 어울리지 않는 붉은 입술이 열렸다. 나는 괜히 바보같이 심장이 떨려서 열심히 외워온 그 복잡한 모카치노 어쩌구의 메뉴 이름을 대지 못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 제광이의 표정을 살펴보니 아예 넋이 나가서 입을 헤벌리고 있는 꼴이 가관이었다



"어... 음... 저기..."



내가 헛기침만 계속 해대자 깊고 투명한 보석같은 한 쌍의 눈이 이상하다는 듯 나를 보았다. 그녀가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이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전율이 흐를 정도였다. 나는 괜시리 복잡한 이름의 커피를 주문한 세나에게 일말의 원망마저 느꼈다. 그 이름을 떠올리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는데 정신을 차린 제광이가 얼굴 만면에 화색을 띄면서 애드립을 치기 시작했다.



"저기... 주문은 됐고, 다른 걸 좀 얻고 싶은데요."



야 이 친구야, 주문이 되긴 뭐가 돼? 



"뭐가 필요하신지?"



천사같은 미모의 알바생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무표정으로 응답했다. 조금은 당황할 법도 한데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녀의 목소리는 굉장히 차갑고 무뚝뚝한 편이었다. 손님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어야 하는 카페 주문대의 알바생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친밀감이라고는 없었다. 



"그 쪽의 연락처가 얻고 싶네요."



"........"



대뜸 드립을 치는 제광이의 멘트에 나는 그만 얼어붙었다. 괜히 옆에 있는 나까지 민망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제광이는 꽤나 자신이 있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멘트만 놓고 보면 참 뜬금이 없지만 이 녀석의 마스크는 어디가서 무시받을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여태껏 이런 황당한 작업에도 수없이 많은 여자들이 걸려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어쩐지 조마조마한 마음마저 느끼면서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냉랭한 분위기의 그녀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변화를 보여주지 않은채 그저 말없이 제광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희 가게에서 그런건 제공하지 않는데요."



"........"



멋지게 퇴짜를 맞은 셈이다. 제광이의 화려한 작업 전적에 드물게도 1패가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역시 세상엔 화려한 얼굴에 무작정 넘어오지 않는 여자들도 있는 법이구나. 



음.... 그런데 왜 내가 괜히 기뻐하고 있지....?



"아, 하하, 뭐 메뉴가 없으면 만들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죠. 저는 아무래도 그쪽과 좀 친해져보고 싶은데 연락할 수 있는 영광을 제게 한 번 줘보시는게 어떨까요?"



한 번 물러나기엔 바람둥이의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지 제광이는 끈덕지게 추파를 던졌다. 하지만 그 알바생의 반응은 그저 무덤덤했다. 차라리 내 상식선에서는 저럴 여자가 신경질을 낸다거나,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듯한 눈빛을 보낸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극단적으로 뻐큐를 날린다거나 하는 반응을 보인다면 그래도 이해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그야말로 완전한 '무반응'.... 표정도 없고 대답도 없다. 그저 물끄러미 그 호수같은 눈으로 제광이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이내 우리 뒤쪽에 서 있는 다른 손님들에게 손짓했다.



"뒤쪽 손님,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느새 우리 뒤쪽에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대부분이 남자였고, 그 중 또 대부분이 우리를 못마땅하게 보면서 '저것들 뭐야?' 비스무리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아, 잠깐만요. 저 주문할게요. 아이스 블렌디드... 초코 앤 모카치노? 여하튼 그거랑, 딸기 스무디 하나랑, 오렌지주스 두 잔 주세요."



나는 급히 끼어들어 아까 두 여자가 부탁했던 메뉴와 내가 대충 생각해낸 음료 두 잔을 주문했다. 어차피 제광이 입에 들어가는건 아무거나라도 상관없다.



".....드시고 가시나요?"



"네...."



아름다운 알바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주문을 받았다. 간단한 주문일 뿐인데 왜 이렇게 떨리는지 도통 모르겠다. 생크림은 뭘 어떻게 할지를 물어보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서 그냥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이제보니 당연히 가격은 선불이라서 그녀는 내가 현금이든 카드든 뭔가를 내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시선을 마주하자 나는 나도 모르게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들고 있었다.



"현금 영수증 필요하신가요?"



"아, 아니요..."



원래대로라면 이런건 다 받아먹지만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떠서 마음을 가라앉혀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아무 생각없이 엉겁결에 네 명 모두의 음료값을 내가 계산해버린 것이다. 



"이거 울리면 오세요."



그녀는 계산대 너머로 진동이 울리는 동그란 벨과 함께 영수증을 내밀었다. 받아들면서 손 끝이 아주 살짝 닿았을 뿐인데 감전이라도 된 것 마냥 짜릿한 전류가 몸에 흘렀다.



"가자..."



제광이는 못내 아쉬운 듯 뒤를 흘끗흘끗 돌아보았지만 나는 왠지 계속 서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리 많은 여자를 접해본 것은 아니지만, 감히 단언컨대 한 가지는 확실했다. 살면서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를 본 적은 없었다. 그것은 제광이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테이블로 돌아온 이후로는 신나게 그 얘기만 떠들어대고 있었다. 



"난 오늘 천사의 재림을 보았어. 오늘 가서 15년만에 일기도 쓸 거야. 믿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고 말이지."



"지랄한다."



이제는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지는 제광이과 서현이의 말다툼은 제쳐놓고, 세나가 내게 물었다.



"봤어?"



"어?"



"그 설미라는 애."



"으응..."



"진짜 그렇게 예쁘던?"



"어? 으, 응. 예쁘긴 예쁘던데. 넌 알 거 아냐?"



"나도 자세히 본 적은 없어. 마주칠 일도 거의 없고."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광이가 무릎을 탁 내리치면서 탄성을 토해냈다.



"아, 그렇지! 그러고보니 같은 학과였잖아! 멘트를 던지기 전에 같은 과 선배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먼저 친밀감을 형성했어야 했어. 낯선 남자가 들이대니까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지. 으으... 나의 실수다. 군대가서 감이 많이 죽은 거야."



"글쎄.... 성격을 보아하니 그런다고 해서 썩 달라질 것 같진 않던데."



나는 그녀의 인상적인 차가운 분위기를 떠올렸다. 내가 그 여자에 대해서 뭘 알겠냐만은 적어도 방금 전의 느낌만으로만 얘기를 하자면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그야말로 완벽한 무감각이었다. 호감과 적대감, 둘 중 어느 것 하나 조금이라도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느낌. 



마치 인형과 대화를 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그녀에게서는 사람이라면 온당 지니고 있을 법한 그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는 듯한 기분이었다.



"크아.. 아깝다, 아까워. 내가 이번에 휴학만 안 했어도 어떻게 한 번 해봤을 텐데."



제광이는 나처럼 제대 후에 바로 복학을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1년간 휴학을 하며 일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비록 세나와 서현이가 있다지만 아무래도 얘네들은 학년이 다르니만큼 자주 어울릴 수는 없을 것이다. 혼자 외롭게 학교를 다닐 생각에 서글퍼진 내가 복학을 권해보았지만 이미 결심이 확고한 것 같았다.



"으아. 그냥 휴학 안 하고 복학 해버려?"



.....하지만 불과 몇 시간 전에 고깃집에서 들었던 그 확고한 결심이 이렇게나 쉽게 흔들리는 꼴을 보아하니 별 중요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닌 듯 싶다.



"겨우 고딴걸로 갈등할거면 그냥 처음부터 곱게 학교 다니시지?"



제광이가 제대 후 1년이나 더 휴학을 한다는 소식을 가뜩이나 달갑지 않게 여겼던 서현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녀석이 1년 휴학을 해버리면 이제 졸업반인 서현이에게는 제광이와 같이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시간이 아예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속으로는 분명 많이 섭섭할 것이다. 



"에이.. 농담이야. 휴학해야지. 나 돈 벌어야 돼."



제광이도 그 점을 알고 있는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서현이가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홱 돌려버리자 세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나도 들은 얘긴데, 남자애들 말로는 그 설미라는 애가 우리 학과에서 제일 예쁜건 맞지만 또 제일 인기가 없대."



"인기가 없다니?"



"너무 차갑고 무뚝뚝해서 다들 다가가질 못하니까. 그 애도 학교 오면 수업만 듣고 가버리고 학과 행사 같은데엔 전혀 참여하지 않는가봐. 친하게 지내는 동기는커녕 인사하고 지내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거 아닐까?"



"음... 그건 인기가 없다기보다는 그저 친해지기 힘들다는거 아냐?"



"맞아. 하지만 결국 주위에는 친구도 없고 남자들도 끈질기게 대시를 하다가도 전부 나가 떨어져 버리고 대부분 포기해서 건드리지 않는 상태니까. 이제는 그냥 건드릴 수 없는 여신...? 그 쯤 된다고 생각하고 있나봐 다들."



"웃겨. 여신은 무슨."



"그래, 내가 보니까 꽤 예쁘긴 해도 우리 서현이가 더 낫더라."



"안 꺼져?"



제광이는 이제야 서현이의 저기압을 눈치챈 것인지 그녀를 살살 달래기 시작하는 눈치였지만 그게 먹힐 리 만무했다.



나는 그녀의 분위기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비록 짧은 인상일 뿐이지만 그녀에게는 확실히 사람을 다가가기 힘들게 만드는 차가운 그 무언가가 있었다. 아마도 제광이의 말에 무뚝뚝하게나마 대꾸를 해준 것 또한 우리가 손님이기 때문에 그랬을 뿐, 점원과 손님의 입장을 떠나서 바깥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면 가차없이 무시를 해버렸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미모를 생각하면 제광이를 비롯하여 수 많은 남자들의 대시를 한 몸에 받는 것도 사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세나의 설명으로 짐작하건대 모조리 퇴짜를 놓는 모양이다. 



"남자친구가 있어서 그런 건가?"



나도 모르게 머릿 속에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중얼거리며 내뱉았다. 그러자 세나가 물었다.



"왜? 너도 관심 생겨?"



"아, 아니.. 관심은."



"그럼 왜?"



사실 정곡을 찔린 나로서는 대답할 말이 꽤 궁색했지만 운 좋게 입에서 임기응변이 흘러나왔다.



"그, 그냥 좀 이상해서... 아무리 성격이 그렇다지만 알바생이 손님들한테 그렇게 무뚝뚝하게 대하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문제가 되긴 뭐가 문제가 돼. 세상에 이런 놈들이 남아있는 이상 이 카페는 망할 일은 없을 거야."



서현이는 자꾸 들러붙는 제광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뼈 있는 말을 했다. 



나도 속으론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하기사 다른 알바생이... 그러니까 이런 말을 하면 굉장히 실례되는 것이겠지만, 예를 들어 아까 우리가 처음에 봤던 그 뚱뚱한 점원이 그렇게 차가운 태도로 손님들을 대했다면 그 가게는 그 날 부로 당장 어마어마한 컴플레인의 쇄도와 함께 아마도 알바생을 갈아치우는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알바생의 미모를 생각했을 때, 그렇게 냉정하고 차가운 분위기는 그다지 결점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시각에 따라서는 매력으로 보일 지도 모르겠다. 외모 지상주의라고 욕해도 별 수 없다. 현실이 그러니까. 나는 아까 내 뒤에 서 있었던 수많은 남자 손님들의 행렬을 떠올리고는 이유 없는 씁쓸함을 느꼈다. 



'이름이 백설미... 라고?'



이성의 외모만 보고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 그리 좋은 인식을 갖고 있었던 나는 아니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어쩔 수 없이 관심이 생기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세나가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잠시 나가버리자 테이블에는 나와 제광이와 서현이만 남았다. 제광이는 서현이가 진짜로 뿔이 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후부터 계속 그녀를 달래려 애쓰고 있었기에 나는 괜히 혼자 덩그러니 남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에이, 쭈서현씨. 아까부터 왜 이렇게 까칠해? 화났어?"



"화 안났어."



"나 휴학하지말까?"



"꺼져. 관심없으니까."



사랑싸움으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못할 짓이었다. 나는 술을 깰겸 바람이라도 쐬야겠다 싶어 바깥으로 나가기로 했다. 



"나 잠시 바람 쐬고 올게."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린 서현이와 그녀를 달래려고 애 쓰느라 바쁜 제광이는 내 말에 관심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유리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어? 왜 나와?"



때마침 통화를 끝내고 안으로 들어오려던 세나와 마주쳤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티격태격하는 커플 꼴 보기 싫어서."



세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럼 나도 좀 있다 들어가야지. 그 꼴 어떻게 봐."



"그러면... 같이 바람이나 좀 쐴까?"



친구끼리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이 말이 세나에게 어떻게 들릴 지를 생각하고 있는 내 모습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응."



하지만 세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 카페 바깥에 놓인 야외 벤치에 먼저 걸터앉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옆에 앉아 이제는 완전히 캄캄해진 대학로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술은 좀 깨?"



"응..."



"예전엔 잘 마시더니 군대갔다오니까 영 못 마신다?"



"아냐. 너네가 잘 마시는 거야."



"설마."



그녀와 나란히 앉아서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그녀와 관련해서라면 떠올릴 수 있는 추억거리들이 나에겐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는 쉽게 잊지 못할 선명한 기억도 있었다.



내가 여자의 마음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모르긴몰라도 그녀 역시 지금 나와 비슷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흠... 누구 전화였어?"



"어? 어... 응.. 남자친구 전화."



세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괜스레 나 혼자 분위기가 어색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어색함을 깨기 위해서 아무렇게나 질문을 던졌는데 그게 분위기를 더욱 어색하게 만들어 버린 듯 했다. 넷이서 같이 있을 땐 몰랐는데 둘이 있으니까 말 몇 마디 섞는 것이 왜 이렇게 뻘쭘한지..... 괜히 같이 있자고 했나?



"제광이랑 서현이도... 저럴 거면 이제 그냥 사귀는게 좋을 텐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나는 더 어색해지기 전에 서둘러서 다른 화제를 꺼냈다. 다행히 세나도 공감하는 화제인지 그녀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내가 예전에 서현이한테 물어봤는데, 자기는 제광이가 바람기 정리하고 딱 자기 하나만 봐줄 수 있는 준비가 된다면 모를까, 그 전에는 사귈 생각이 없대."



"그래...?"



하지만 서현이도 조금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제광이는 만약 서현이와 사귀기 시작한다면 아마 바람 같은거 피지 않고 그녀만 바라볼 것이다. 좀 가벼워보이기는 해도 정말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의외로 그 여자만 바라보는 성격이니까. 하지만 서현이의 자존심이 먼저 여자로서 다가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일 터였다. 결국 어느 한쪽이 양보하기 전까진 해결되지 않을 문제였다.



"뭐, 그건 쟤네가 알아서 할 문제지."



"그렇지."



"그래도 서현이는 제광이가 1년 휴학을 한다고 하니까 많이 서운해하는 눈치였어."



"같이 학교를 못 다니니까?"



"응."



휴학 얘기가 나오니까 세나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러고보니까... 너는 왜 1년이나 휴학을 했던 거야?"



세나는 우리가 군대에 있을 때 1년 휴학을 했었기 때문에 졸업반이 되는 서현이와는 다르게 이제 3학년이 된다. 우리와는 1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셈이다. 뭐 나야 친한 친구와 오래 학교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반길 만한 일이긴 했지만...



"음... 글쎄...."



하지만 세나는 애매하게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 했을 것 같니?"



"어어...? 그, 글쎄...."



되돌아온 질문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세나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만 지었다.



"서현이도 많이 고민했었어."



"뭘 말이야?"



"휴학할지 말지."



"왜?"



"제광이랑 같이 학교 다니고 싶은 마음이 컸나봐."



"......."



그녀의 말에 나는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서현이의 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말은 마치 나와 학교 생활을 함께 하고 싶어서 휴학을 했다는 말의 우회적인 표현으로 들렸다. 내 착각인가?



마음 속에 고이 묻어두었던 옛날 일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때는 아직 세나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을 때였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은 그 생각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지만....



"너.... 아직도 날 좋아하니?"



나도 모르게 불쑥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왔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일단 한 번 뱉고 나서 그 말을 다시 주워담을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



세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괜한 말을 꺼냈다는 후회 때문에 괜히 벤치 아래만 계속 내려다보았다. 아무 말 없는 어색한 침묵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나는 어떻게든 무마시키고 화제를 돌려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뜻밖에도 눈에 비친 세나는 담담히 웃고만 있었다.



"지금은 나한테 남자친구가 있잖아."



그 담담한 대답을 들으니 후회가 족히 백 배는 더 크게 밀려들었다. 나는 애써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 그래.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너하고 어색한 관계로 남고 싶진 않아서...."



"응. 이젠 괜찮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세나는 방긋 웃었지만 내 마음은 전혀 편치 않았다. 바보같이 그런 질문은 왜 꺼냈을까 하는 자책만 계속 들 뿐이었다. 



-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그 순간 전화가 걸려온 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덕분에 어색한 순간을 모면할 수 있는 구실을 마련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어... 음... 먼저 들어가. 난 전화 좀 받고 갈게."



"알았어. 추우니까 너무 오래 있지 말고 들어와."



세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녀가 그 전에 뒤를 한 번 돌아본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차마 그녀를 바라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에 확신할 순 없었다.



"젠장할."



나는 내 스스로를 욕하며 바지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액정에 혜진이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여보세요?"



[오빠, 뭐해?]



혜진이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톤이 높았지만 어쩐지 평소의 그 밝고 씩씩한 느낌은 많이 죽어있었고, 어딘가 가라앉아있는 듯 보였다.



"으응. 그냥 친구들 만나서 놀고 있어."



[응.. 그렇구나아.]



"너 목소리가 많이 안 좋다. 무슨 일 있어?"



[우왕.. 그게 목소리만 듣고 딱 느껴져? 역시 오빠는 달라.]



"무슨 일 있구나. 왜 그래?"



[으음... 별 건 아닌데.]



"말해 봐."



정말로 그게 별 거 아닌 일이고, 나에게 말할 생각이 없다면 애초에 전화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전화를 걸었더라도 이렇게 티를 내지 않았겠지. 혜진이는 그런 아이였다.



[헤헤.. 그게 사실은... 대학 떨어졌어.]



그러고보니 이제 정시 결과가 나올 타이밍이었다. 혜진이의 수능 점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나보다. 



"그래..?"



[원래 대학에 별 관심 없었지만... 그냥 엄마 아빠가 좀 실망하시는 것 같아서.]



"그러게 좀 열심히 공부하지 그랬어."



[그러게 말야. 나 진짜 놀았나부다. 그치....]



평소처럼 밝게 재잘거리지 못하고 침울해져있는 혜진이의 모습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힘 내. 이번에만 기회가 있는 건 아니잖아.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대학은 내년에도 얼마든지 갈 수 있어."



[하긴 오빠는 늦게 정신차리고 했는데도 바로 좋은 대학 갔었지.]



"내가 뭐 특별해서 그런거 아냐. 너도 할 수 있어."



[알았어... 열심히 해 볼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자신이 없다는 듯한 눈치였다. 나는 전화로 얘기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조만간 집에 가서 얘기하자고 혜진이를 달래주고는 일단 전화를 끊었다. 집에 자주 들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혜진이를 위로해주기 위해서라도 조만간 한번은 가아? 것 같았다.



"휴...."



문득 누나의 마지막 소원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는커녕 정신도 못차리고 계속 싸움질이나 하면서 살았겠지. 그러면 지금처럼 좋은 대학 다니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일이었을테고. 갑자기 하늘에 있을 누나가 보고 싶었다. 마지막까지 나만 챙기다가 그렇게 죽어버린 우리 누나.



누나가 나를 바로 잡아주었듯이 나도 혜진이가 마음을 잡을 수 있게 도와주어야 누나를 볼 면목이 생길 것 같았다.

괜스레 어두운 밤 공기에 한숨을 뱉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서려고 몸을 일으켰는데, 어쩐지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발걸음을 잡아세웠다.



"아니, 아가씨. 일단 저~ 쪽으로 가서 얘기 좀 하자니까?"



"아, 아니... 그게요... 저기...."



척 들어도 추근대는 남자의 끈적한 목소리와 당황하는 상대방 여자의 난처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 흔한 광경은 아니지만 늦은 밤의 대학로 주변에서는 가끔씩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남의 일이니 신경을 끄고 들어갈까 하다가 괜히 호기심이 동해서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AMANTE' 카페의 건물 모서리를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서 들어가니 건물 틈새로 좁다란 골목길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골목길의 입구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척 보기에도 술이 꽐라가 되어 만취한 이십대 후반의 남자 몇 명이 하나같이 벌개진 얼굴로 여자 한 명을 두고 추파를 던지고 있는 광경이 있었다.



"저, 저 언니랑 만나기로 했거든요... 빨리 가봐야 되는데...."



"아니, 그러니까... 우리가 뭘 어떻게 한다는게 아니라 그냥 좀 알고 지내보자는 거지."



"아니면 언니도 같이 와서 우리랑 놀아두 되고오~ 아가씨 얼굴 보니 언니도 한 미모 하겠는데?"



"그럼, 그럼. 우리는 세 명이니까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더 와도 커버가 된다구. 하하하."



이제보니 남자 쪽은 세 명이었다. 그 세 명에게 둘러쌓인 한 명의 여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굉장히 난처해보였다. 하지만 독한 성격이 못 되는지, 아니면 그냥 무서워서 그런 것인지 어쨌든 단호하게 거절을 하지 못해서 남자들은 계속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이 광경을 보고 있었지만 남의 일이라고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사실 대학로 주변에서 헌팅을 한다고 해서 그걸 말리고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구를 지키지 못해서 안달 난 사람일 테니.



"죄, 죄송합니다. 가봐야겠네요.... 이, 이것 좀 놔주세요."



"아니, 아가씨, 잠깐만. 가려면 연락처라도 좀 주고 가."



"그래, 그래. 아가씨가 너무 맘에 들어서 그런다구. 호감 가지는 사람에게 너무 매정하게 그러는거 아니지."



웃기는 놈들이었다. 세 명이서 한 명을 놓고 호감가니까 연락처를 달라니. 그럼 잘되면 세 명이서 돌려가면서 연애할건가?



어쨌든.... 그 남자들의 상태를 보니 좀 취하긴 많이 취한 것 같았다. 보통 헌팅을 하더라도 저렇게 노골적으로 추근덕거리면서 번거롭게 하는 일은 좀체 없는데. 저건 여자가 거절을 잘 못해서인 이유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남자들이 만취한 이유가 더 컸다.



이만큼 재밌는 구경거리도 좀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여자가 얼마나 예쁘길래 남자들이 저러는지 한 번 구경이나 해보고 싶어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들과 겨우 몇 발짝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까지 갔을 때, 그 순간 그 여자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어....?"



내 입에서 얼빵한 의문사가 터져나왔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한 여자가 내가 자신을 돕고 싶어한다고 생각하기라도 했는지 나에게로 쪼르르 달려오는게 아닌가. 



"저, 저기.. 저 좀 도와주실래요?"



"네에...?"



마치 나를 방패막이로 삼듯이 내 등 뒤에 빼꼼히 숨은 그 여자가 고개만 살짝 내밀고는 어처구니 없는 부탁을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그 여자의 얼굴을 계속 멍하니 들여다볼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여자의 얼굴은......



"저기요... 카페에서 알바하고 계셨던거 아니었어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왜냐하면 그 여자의 얼굴은 아까 전에 카페에서 봤던 잊을 수 없는 그 미모의 알바생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방금 전까지 안에서 일하고 계셨던 분이... 어떻게 밖에...."



하지만 말을 하며 계속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뭔가 이질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비록 아까 전에 계산대에서는 가슴이 떨려서 그 알바생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녀가 안경을 끼고 있지 않았다는 점 하나는 확실했다. 하지만 지금 눈 앞의 이 여자는 보란 듯이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아... 저, 혹시...."



여자 쪽에서도 뭔가를 알아차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지만, 그 순간 추근대던 한 남자의 우람한 손이 내 어깨를 턱 하고 쥐었다.



"어이, 당신은 뭐야?"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괴상망측한 일에 휘말리기 싫으면 즉시 이 자리를 뜨라고.



"그냥.. 지나가던 사람인데."



술이 떡이 되어서 욹으락붉으락해진 부담스런 남자의 얼굴이 눈 앞에 있었다. 



"그럼 그냥 꺼져. 괜히 끼어들지말고."



"......"



순간 자존심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간신히 참았다. 예전에 막 나가던 시절에 이런 종류의 도발을 받았다면 참을지 말지 생각을 하기도 전에 주먹이 먼저 나갔을 것이다. 그 때에는 시비는커녕 조금만 기분이 거슬려도 참았던 경우가 없었다.



나는 말없이 내 어깨에 놓인 그 벌건 얼굴 남자의 손부터 먼저 치웠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못 봤다는 듯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버려진 여자가 황당하다는 듯이 종종걸음으로 나를 쫓아오려했지만 아니나다를까 그 남자의 손이 몇 걸음도 떼기 전에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저, 저기요...! 좀 도와달라구요..."



"아가씨, 우리가 잡아 먹어? 뭘 도와달라는거야 대체? 누가 보면 우리가 못된 사람들인 줄 알겠잖어. 으응?"



흘끗 뒤를 돌아보니 내게 시비를 걸었던 그 벌개진 얼굴의 남자는 여전히 여자에게 추근덕거리며 수작을 걸고 있었고 나머지 둘은 낄낄거리고 웃으면서 나를 비웃고 있는 듯 했다.



"야, 방금 그 새끼 쫄은거 봤냐? 푸하핫."



"여자 얼굴 보니까 탐나서 괜히 한번 끼어들고 싶었나보다. 결국 알아서 찌그러지네 뭐. 낄낄."



아마도 신이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어떻게 할지 3초 동안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이것 좀 이제 놔주세요... 벌써 늦었단 말이에요."



"아니, 그러니까 연락처나 주고 가라니까?"



"으.... 알았어요. 그.... 010- XXXX- XXXX 이에요."



내가 한쪽 부랄을 걸고 장담하는데 저것은 아무렇게나 지어낸 번호임을 200퍼센트 확신한다.



"정말이야? 지금 전화해봐도 되지?"



"이, 이따가 하세요. 저는 지금 바빠서... 이만..."



"아니, 잠깐 기다려봐. 확인은 해야지. 혹시 연락 안 되서 이대로 영영 못 보면 어떡해?"



아마 이대로 영영 못 보는게 저 여자의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남자 셋과 여자 하나가 옥신각신 뒤섞여 난리굿을 치는 동안 나의 짤막한 고민도 끝났다. 나는 가던 길 가던 발걸음을 다시 돌려 그쪽으로 돌아갔다. 이제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서 여자가 불러준 그 번호가 맞는지 확인 전화를 걸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당연히 여자의 핸드폰 벨소리가 터진다거나 진동이 울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뭐야, 아가씨. 안 오잖아. 우리 낚은 거야?"



"그, 그게 아닌데..."



"아놔, 진짜 이 아가씨가 사람 영 이상한 사람 만드네."



나는 그 뚱뚱하고 벌건 얼굴의 남자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남자는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가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또 뭐야?"



나는 아까 건물 모서리를 처음 돌았을 때 보았던 그 좁다란 골목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따라 와."



그러자 반응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뭐?"



"이거 미친놈 아냐?"



한 명이서 세 놈에게 도발을 했다는 사실이 적잖이 가소로운지 그 놈들은 황당해하면서도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피식피식 터뜨리고 있었다. 문득 상대가 세 명이라는 점이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 없다는 사실은 벌써 아까 전에도 한차례 경험한 바 있다.



"세 놈 다 따라 와. 딴 데 새지 말고."



먼저 걸음을 옮겨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버리자 뒤에서 세 놈들이 모두 하나같이 피식거리면서 따라 걸어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등 뒤로 느껴지는 비웃음 소리를 들어보니 참 웃긴 놈 다 보겠다는 반응들이었다.



인적이 드물게 느껴질 만큼 으슥한 곳까지 들어와서는 나는 다시 등을 돌렸다. 비대한 덩치의 실루엣 세 명이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길을 막고 있는 모습을 보자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지 한순간 회의가 들었다. 



"야, 어린 놈아. 너 영화 존나 많이 봤지?"



여자에게 나서서 작업을 걸던 그 남자가 가장 먼저 가까이 다가왔다. 남자는 내 어깻죽지를 가볍게 툭툭 밀며 건들건들하게 말을 이었다.



"그 놈의 영화가 참 위험해요~ 애들한테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니까. 액션배우 흉내내고 싶냐? 으응?"



"그래."



나는 서너번 정도 가만히 서 있다가 놈이 다음으로 손을 뻗어왔을 때, 그 팔을 움켜쥐고는 바깥으로 몸을 빼면서 주저없이 아래로 꺾었다. 뼈가 꺾이는 소름 돋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아아아악!"



"이... 이 미친새끼...!!"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가만히 비웃고 서 있었던 나머지 두 명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씻겨나가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달려들었다.





















예전에 싸움판 여기저기에서 굴러다닐 때도 그랬다. 물론 그 때는 비교적 어릴 때였지만..... 예나 지금이나 싸움을 할 때 바뀌지 않는 규칙 몇 가지는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이거였다. 상대방 쪽수가 많을 때는 기회를 한 번 잡았을 때 한 명이라도 다시 못 일어나게 만들어놓아야 그나마 이길 가능성이 생긴다고....



"너무.... 쉽게 생각했나보다."



나는 이마가 깨져 눈 위로 줄줄 흐르는 핏방울을 소매로 닦았다. 앞이 잘 안 보이니 기분이 더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확실히 한 명이서 세 놈이랑 싸우는 것은 쉬운 짓거리가 아니었다. 나는 골목 안 쪽에 대자로 뻗은 세 놈을 뒤로하고 휘청거리며 골목길을 나왔다. 



굳이 따지자면 이겼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만큼 나이 먹고 술 취한 사람이랑 싸움박질해서 이겼다는 사실이 그렇게까지 썩 기분 좋지는 않았다. 썩힌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주먹에 녹이 스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이 스물셋에 길거리에서 시비 붙어서 싸움박질이라니.... 누가 들으면 웃을 만한 얘기였다. 



기왕 이렇게 된거 경찰서에 불려가는 일까지는 없었으면 하는게 지금 이 순간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괜... 찮으세요?"



아까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자꾸 눈 속으로 들어가는 피를 닦으며 앞을 보았다.



"....왜 우세요?"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멍청한 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다. 



"그...그... 피, 피가... 많이 나시는데요..."



싸우는 중간에 골목길로 뛰어들어오더니, 피가 터지고 깨지는 싸움판을 보고서 있는 대로 비명을 잔뜩 지르고는,

급기야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버린 그 여자가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카페의 그녀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분위기로 보나 안경으로 보나 동일인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뭘까?



"괘, 괜찮... 으세요?"



여자가 다시 한번 물었다. 사실 빈혈이 올 것 같은게 전혀 괜찮지가 않았지만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랬다간 핏줄기를 보고서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는 여자가 아예 통곡을 시작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일어설 생각도 않고 그 자리에서 울먹거리고 있었다. 



헌팅을 당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남자가 불한당 세 놈을 처리하고 마빡이 깨져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다면 여자는 무슨 말을 해야할까? 나도 잘 모르겠다. 사실 내가 무슨 짓 한 건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하기사 저 세 놈은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헌팅 한 번 하려다가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상상이나 했을까?



"저, 저기... 제가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네요.... 정말 감사하고, 또 죄송하고...."



"됐어요... 일단 진정해요. 울지 좀 말고. 그보다...."



그보다 그 쪽은 카페의 그녀와 무슨 관계인지를 먼저 묻고 싶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이 여자가 알아들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때마침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설희?"



어둑어둑한 골목길 입구에 한 여인의 실루엣이 그림자로 그려졌다. 피가 끼어 그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는 와중에도 이 쪽을 바라보는 한 쌍의 반짝이는 눈이 느껴졌다. 잠시 그 자리에 가만히 굳어있던 그림자의 주인이 점차 안쪽으로 걸어들어왔다. 



어둠 속에서도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비로소 가까워졌을 때,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던 안경을 쓴 여자가 걸어들어온 그림자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언니!"



나는 그림자의 주인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 설마는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순식간에 역시로 바뀌었다.



그림자의 주인은 카페에서 만난 그 아름다운 여인, 바로 백설미였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제가 당신의 동생을 구했습니다? 나는 그만 얼이 빠져서 누구라도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설미라는 이름의 그녀는 품에 안긴 동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동생으로 짐작되는, 그 안경을 쓴 여자는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아니면 피를 봤기 때문인지 그야말로 세상이 떠나가라 펑펑 울고 있었다.



거의 통곡 수준으로 울음을 터뜨리는 동생을 품에 안고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녀가 이윽고 조심스럽게 동생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뿔테 안경 밑으로 번진 눈물을 닦아주더니 잠시 기다리라는 뜻으로 동생을 세워놓고는 나에게로 다가왔다.



"어... 저기..."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서 내 앞에 멈춰 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아까 카페에서 보았던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과 지금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많이 달라보였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엄청 화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붉은 입술이 마침내 떨어졌다.



"내 동생한테 무슨 짓 한 거야?"



".....네?"



나도 모르게 멍청한 반문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손이 갑자기 움직였다.





















그것은 생각하고 한 행동이라기보다는, 거의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이런저런 싸움을 해오면서 몸에 붙혔던 나름대로의 감각이 날 살린 걸까?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몸을 뒤로 빼면서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었다.



"무, 무슨 짓이에요?"



"........"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잡아챈 그녀의 손을 놓지 못했다. 그 여자의 손은 아슬아슬하게 목뼈 앞에서 멈추었다. 스스로 멈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조금만 더 늦게 잡아챘더라도 손가락이 정확하게 목뼈의 움푹 파인 곳을 찌르고 들어왔을 것이다.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녀의 희고 작은 손은 목뼈를 쥐어뜯을 것처럼 갈고리 모양으로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 여자는 방금 전 급소를 정확하게 노리고 공격한 것이다. 그것도 보아하니 위협용이 아니라 진짜로 목의 기도를 깨뜨릴 생각으로 공격한 것 같았다. 겉보기에는 아무렇게나 찔러댄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직접 공격을 당한 입장에서는 그 서슬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도 놀랐지만 그녀는 자신의 시도가 가로막히자 거의 나만큼이나 놀라고 있는 눈치였다. 찌르는 빠르기로 봐서 확실히 아무나 쉽게 막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오버하는게 아니라.... 이런 말하긴 좀 뭐하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정신이 끊어져 바닥에 누웠을 수도 있다. 



"언니 왜 그래!?"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의 동생이 비명을 지르며 우리 사이로 뛰어들었다.



"언니 뭐하는 거야? 왜 그래? 왜 또 폭력을 쓰고 그래?"



"어어..? 아니, 저 사람이 너한테..."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참으로 볼만한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결코 깨질 것 같지 않았던 설미라는 여자의 무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면서 당황하는 모습이 말이다. 



"저 사람은 날 도와줬단 말이야!"



"그... 나는.... 네가 너무 늦길래 계속 찾아보다가.... 여기서 네 비명소리가 들려서...."



"내가 폭력 휘두르지 말라고 했잖아! 약속해놓고 왜 안 지켜? 왜?"



"미안. 안 그럴게."



다시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저 설미라는 여자가 이 상황을 오해할 만한 소지가 분명 있기는 있었던 것 같다. 앞뒤 사정을 모르는 그녀로서는 으슥한 골목길 안쪽에 주저 앉아 펑펑 울고 있는 자신의 동생과, 그 앞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던 웬 수상한 남자 하나만 보였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니 그 여자들에게는 아무래도 이런 일이 빈번했던 것 같다. 하기사 방금 전의 공격을 생각해보면 분명히 말하건대 절대로 보통 여자는 아니었다. 느낌만으로 따지자면 방금 전에 상대한 그 남자 세 명보다 이 여자 쪽이 더 위협적일 것만 같았다.



나는 문득 아직도 이 여자의 손을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엉겁결에 나는 손을 놓았고, 그 여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을 거두더니 내게서 등을 돌렸다.



"언니! 이 분한테 사과하고 가."



그러자 참으로 우습게도 그렇게나 무표정했던 여인이 처음으로 감정의 기복을 보이며 마치 싫다는 듯이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다시 돌아섰다. 그녀는 잠시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지만 동생이 쌍심지를 켜고 재촉하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주 미세하게 까딱 고개를 숙였다.



"미안. 그럼 이만."



"....엉?"



분노가 치민다기보다는 황당함이 더 컸다. 어안이 벙벙해져 멍하니 굳은 나를 내버려두고 그녀는 다시 또 몸을 돌려 골목길을 걸어나갔다. 그러자 그 자리에 남은 그녀의 동생이 당황하여 그녀를 쫓아가려다 말고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 저기 정말 죄송해요. 제가 사과드릴게요. 그리고 아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는 한번 더 고개를 숙이더니 언니를 따라서 쌩하니 달려가버렸다. 골목길 안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나는 문득 뒤돌아서 아직도 쓰러져 있는 세 명의 남자와, 그리고 그 반대편으로 사라져간 두 여인의 뒷모습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목덜미에는 아직도 그 위협적이고 서늘한 감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게 없었다면 아마 나는 신기루를 보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뭐야 이거....?"



제발 누가 이 상황을 내게 정리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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