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그녀들의 마음은 ? - 21부
감동넘치는 로맨스 명작
그녀들의 마음은 ? - 21부
비록 젊은 외래강사라고는 해도 수업시간에 학생 대 교수의 관계로 마주해왔던 분을 이렇게 바깥에서 보게 되니 기분이 꽤 이상했다. 일단 캠퍼스 바깥에서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교내에 있을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고, 그 용무가 지극히 사적인 주제에 얽혀있다는 것도 기묘한 느낌에 한몫을 했다.
문득 떠오른 것이지만, 그러고보면 초중고를 거치면서 딱히 은사님이라 부를 만큼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없었던 것 같다. 사고와 문제를 이름표처럼 달고 다닌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학교 바깥에서 선생님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눈 앞의 이 교수님은, 여태까지의 내 학창시절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선생님' 같지 않아보이는, 교육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기분은 더더욱 기묘하게 들뜨는 것 같았다.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교수님은 또 한번 싱긋 웃었다.
"이런 칵테일바는 싫어하시나요?"
"싫어하진 않지만 자주 오지도 않아요. 학생이 돈이 어디 있겠어요."
"그러면서 아까는 승태 씨가 산다고 했지 않나요?"
처음에는 분명 내가 살 요량이었다. 교수님을 모시고 너무 후줄근한 곳을 찾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장소 선택에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요새 부쩍 얇아진 지갑 사정을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속으로 난처해하고만 있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본 교수님이 살풋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학생한테 얻어먹을 수도 없으니 오늘은 자기가 사겠다며,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데리고 들어온 곳이 바로 여기였다.
"하하... 이렇게 근사한 곳만 아니면 제가 사드릴 수도 있었는데."
"농담이에요. 사실 제가 사는 이유는, 그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니까요."
여교수는 마치 궤뚫어보는 듯한 눈빛을 반짝이며 나를 보았다. 은은한 조명 아래에서 보는 그 눈빛은 심지어 고혹적이기까지 했다. 화려하면서도 고요한 품위를 지니고 있는 바의 분위기가 어쩐지 유가희 교수의 매력과 닮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사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네요."
"고민이 크다보면 종종 그럴 때가 있죠. 우선 눈에 보이는 것부터 얘기를 해볼까요?"
"눈에 보이는 거라니요?"
"제가 질문할 수 있는 것들이요. 예를 들면, 왜 백설미 양에게 만큼은 말 못 할 문제라고 생각하셨죠?"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망설이는 내 모습을 본 교수님은 천천히 홀짝이듯 자신의 잔을 비웠다. 답답함을 느낀 나도 마주 잔을 비웠지만, 쬐그마한 주제에 도수는 높은 화려한 색깔의 칵테일을 이것저것 몇 잔 마신 상태이다보니 난 벌써 알딸딸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글라스가 완전히 비워질 때까지도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결국 교수님이 먼저 질문을 해왔다.
"물론 여자 문제겠지요?"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의외군요."
"뭐가요?"
"승태 씨에게서는 순정파의 냄새가 났는데, 의외로 여자관계가 복잡하구나 싶어서요."
그 순간 문득, 유가희 교수가 나를 부르는 호칭이 어느 순간부터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까부터 그녀는 나를 '승태 씨'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썩 거북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뭐랄까.... 늘 '승태 학생'이라고만 불리어 오다가 그런 식으로 '동등한' 느낌의 호칭을 듣게 되니 어색하다기보다는 매우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내 눈을 마주 본 교수님이 또 어떻게 마음을 읽었는지, 특유의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학교 바깥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겠어요?"
교수님이 독심술에 원래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단순히 겉으로 속내를 잘 드러내는 타입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교수님이 이런 식으로 내 마음을 궤뚫어 보곤 할 때마다 그녀에게서 아주 독특한 매력이 느껴진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다른 학생들도 학교 바깥에서는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시나요?"
"글쎄요. 그건 모르죠."
비밀스럽게 웃으며 대답을 회피한 교수님이 종업원을 불러 두 잔을 더 주문했다. 나는 칵테일의 맛을 잘 모르기 때문에 첫 잔을 호기심에 주문한 이후로는 내내 교수님에게 선택을 맡기고 있었다. 이윽고 나온 두 잔에는 각각 화이트 러시안과 블랙 러시안이 채워져 있었다.
"그래도 저를 교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가뜩이나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가 훨씬 더 어려워지겠죠? 솔직하게 털어놔보란 뜻이기도 하니까 지금만큼은 편하게 생각해봐요."
그 말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호칭을 살짝 바꾼 것 뿐인데 그걸 인지하고 나니 그 말마따나 분위기가 더욱 편하게 느껴지는 듯 했다. 어쩌면 그것은 상대를 부르는 말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가진 특유의 능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몇 잔 들어간 칵테일의 알콜도 거기에 한 몫을 해주었겠지만 말이다.
"저는 둘 다 좋아해요. 승태 씨 마시고 싶은 걸로 마셔봐요."
"뭐가 더 독한가요?"
"독하기로는 이게 더 낫겠죠."
그녀가 검은잔을 내 쪽으로 밀었다. 원래부터 모호한 편안함을 지니고 있었던 이 여자를 더욱 편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이제는 아예 나이 차가 좀 많이 나는 누나 정도로만 보이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유가희 교수와 나의 나이 차라고 해봐야 많아도 열 살을 넘기지 않을 듯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교수님'이라는 이미지를 한꺼풀씩 벗겨낼수록, 왠지 그녀와 마주하고 있는 이 자리의 분위기는 점점 더 미묘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쓴 맛이 느껴지는 블랙 러시안의 향에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교수님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장난스러운 느낌의 쿡쿡거리는 웃음소리 덕분인지 편안함은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편안함이었다. 부디 눈 앞의 여인이 이런 마음까지는 궤뚫지 못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얀색 잔을 입에 가져다 댄 교수님이 화이트 러시안을 흔들어보이며 바꿔마시겠냐고 물었지만 나는 괜찮다며 사양했다. 분명 쓰기는 썼지만, 기분 탓인지 그 쓴맛에 애착이 생기는 듯 했다.
"그럼 다시 여자문제로 돌아가죠. 그렇게 안 보이는데 의외로 여자 관계가 복잡한 승태 씨의 이야기가 무척 궁금한걸요."
"그렇게 복잡할 것까진 없는데...."
사실 충분히 복잡하긴 하다.
"몇 명의 여자와 얽혀있나요?"
"콜록!"
직설적으로 예리하게 핵심을 짚어오는 특유의 능력을 그녀는 다시 한 번 발휘했다. 그만 사레가 들리고 만 나는 한참 동안 기침을 해대고 나서야 교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얼굴은 그저 얼른 말해보라는 듯 빙그레 웃고 있기만 했다. 나는 이제 더이상 대답을 망설일 수 없음을 알았다.
"일단은 세 명인 것 같아요."
"세 명이라."
따지고보면 사실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요새 내 머릿 속을 가장 다이나믹하게 휘젓고 있는 여자들은 딱 그만큼이었으니 거짓말은 아닌 셈이었다.
"한 명은 보나마나 그 설미라는 여학생일테니, 문제가 되고 있는건 나머지 두 여자라 이거겠죠?"
"의도한건 아닌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흠.... 바람기가 있군요."
"그게 그렇게 되나요?"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무서운 법이에요. 남녀를 불문하고 말이죠. 하지만 승태 씨가 백설미 양을 바라보는 그 눈길은, 내가 보기에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어요. 혹시 그 사이에 좋아하는 여자가 바뀌었다거나 하는건 아니겠지요?"
"그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나머지 두 여자는 그저 당신을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있는 건가요?"
"......."
나는 단비 누나와 혜진이를 차례로 떠올렸다. 자만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 두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일방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설미를 좋아하고 있었다. 첫 눈에 반할 수도 있다는 말을 그리 맹신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와의 첫 만남은 그런 생각마저도 무너뜨렸을 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때 이후로 내 마음 속에는 줄곧 설미가 들어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단비 누나나 혜진이에 대한 나의 마음이 정말로 깨끗한 백색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 아닌 것 같았다. 줏대 없고 자기중심적인 말이었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건 모르겠어요."
한순간에 찾아온 취기는 서서히 나간다는 말이 떠올랐다. 굵고 짧은 칵테일이 몇 잔씩 들어가고 나니 취기는 순식간에 올라왔지만, 나는 그 술기운을 밀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몽롱함에 기분을 맡긴채 이야기를 술술 털어내기 시작했다.
"설미를 좋아하고 있지만, 그 두 사람에게 마음이 전혀 없는지를 묻는다면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어요.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은 있으니까요. 그런 애매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한 사람과는 얼떨결에 사귀는 사이가 되어버렸고, 또 한 사람은 제 손으로 밀어내고 나서도 이렇게 후회하고 있지요. 어떻게 하는게 좋을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그건 과욕이에요."
딱 잘라 말하는 냉정한 한 마디와 함께 그녀가 빈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날카로운 일침 앞에 변명할 여지가 있을 리 없었다.
"저도 알고 있어요. 제가 나쁘다는걸...."
"나는 과욕이 나쁘다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다만 당신의 대처가 중요할 뿐이죠."
"무슨 뜻인가요?"
"난 바람둥이를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여자가 많이 따르는 남자를 싫어하지도 않지요. 그건 그 사람이 매력이나 능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런 사람이 굳이 한 사람만을 바라본다는 것은 힘들겠지요. 받는 사랑은 많은데, 주는 사랑은 하나라면 그건 오히려 모순적이에요. 애초에 사랑은 한 사람에게만 제한되는 감정이 아니지 않나요?"
교수님의 말은 의외를 넘어서 거의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여러 여자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내게 따끔한 쓴소리라도 던질 줄 알았는데, 그녀의 말은 지금의 이 복잡한 대치상황을 오히려 두둔하는 것처럼 들렸다. 물론 그 진지한 표정을 보니 절대 농담을 하고 있는건 아닌 듯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여자 저 여자를 건들고 다니며 상처를 남기란 뜻은 아니에요. 여자가 많이 따른다한들, 그 속에서도 우선적인 소중함이라는 것은 분명 있게 마련이에요. 그걸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대개 졸렬한 바람둥이 신세가 되어 결국엔 다 잃고 말지요. 원래는 곁에 둘 수 있었던 사람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거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승태 씨의 처신에 달려있겠죠. 다만 후회하지 않을 처신을 하려면 자신의 마음에 대해 스스로가 잘 알고 있어야 해요. 이 사람이 내게 있어 위험을 무릅쓰고도 꼭 곁에 두어야 할 만큼 소중한 사람인지, 아니면 진정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를 갉아먹는 걸림돌에 지나지는 않은지, 그걸 스스로 구분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만약 꼭 곁에 두고 싶을 만큼 소중하게 느껴진다면요?"
"그럼 별 수 있나요? 곁에 두는 거지."
"네에?"
얼이 빠질 만큼 간단명료한 결론 앞에 멍하니 입이 벌어졌다. 너무도 쉽게 의외의 방향을 제시한 그녀는 이제 비어버린 잔을 두 손으로 쥐고서 마치 장난감처럼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정말로 어린아이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다른 것들은 다 제쳐놓고 가장 본질적인 무엇만을 직시하는 어린아이 특유의 순수함을, 나는 그녀에게서 느낀 것이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게 이상한가요?"
"굉장히요."
"후훗. 방금 난 여자가 많이 따르는 남자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했죠. 마찬가지로 남자가 많이 따르는 여자도 그리 나쁘게 보지 않아요. 비록 남들이 곱게 보지 않고 헐뜯을 수는 있겠지만, 결국 본인 입장에서는 그것도 하나의 능력이니까요. 안 그래요?"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교수님이 그런 방향으로 긍정적인 말씀을 하신다는 것 자체가 저한텐 조금 의외네요."
"그래요? 저는 원래 자유연애를 긍정적으로 보는 주의거든요. 실제로 한 때는 그런 여자가 되고 싶기도 했죠."
"그런 여자라니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자 말이에요."
뭔가 비밀스러운 얘기를 속삭이는 어린아이가 띌 법한, 그런 장난 섞인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걸렸다. 나로서는 교수님의 그런 모습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비록 그 낭랑한 목소리에는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런 진솔한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서로 상당한 취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럼 지금은 그런 여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한 때는' 이라는 표현에 신경이 쓰여 내가 되묻자, 입가에 드리워진 그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이 모호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글쎄요? 한 사람을 좋아하지만 않았어도 아마 그렇게 되었을 것 같은데."
그 말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나는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유가희 교수의 목소리를 직접 들은 사람이라면 바보라도 그게 누구인지 물어서는 안 된다는걸, 분명 느꼈으리라. 게다가 더 궁금해할 틈도 없이 그녀는 곧장 내게 반대로 질문을 던져왔다.
"승태 씨가 보기엔 어떤가요? 제가 그만큼 매력적으로 보이나요?"
어느새 또 주문을 했는지, 이번엔 마티니 두 잔이 나왔다. 새 잔을 손에 쥔 그녀는 의외의 모습에 마냥 놀라고 있는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또 쿡쿡거리며 웃었다.
"대답을 못 하시는군요."
"아니에요. 충분히 매력적이에요. 예쁘고, 지적이고.... 그러니까 학생들한테 그렇게 인기가 많으신 거겠죠. 단지 교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는게 신기해서 그래요."
"하긴 말이 좀 길어지긴 했네요.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지 내가 좀 들떴나 봐요."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마티니가 담긴 글라스를 입가에 가져갔다. 아주 천천히, 하지만 한번 갖다댄 입을 떼지 않고 마티니를 비워버리는 그녀였다. 그 모습을 보니 내심 취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는 그녀가 늘 보여주었던 이미지대로, 술을 마실 때도 충분히 절제를 해가며 마실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모습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술을 마시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요. 승태 씨가."
"제가요?"
칭찬인지 무엇인지 듣기만해도 혼란스러워지는 말이었다.
"암튼, 그 자유연애를 온전한 형태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본인의 마음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단걸 잊지 마세요.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라면 두 사람이든 세 사람이든 곁에 두어야겠지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 꼭 한 사람만을 사랑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놓치고 나서 후회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어요? "
"그거야...."
"사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에요. 무엇보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가 자기 하나만을 바라봐주길 원하니까요. 그런 형태의 사랑은 내 입장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일 뿐,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또 별개의 이야기겠죠."
"맞아요. 사실 그게 가장 큰 문제 아닌가요?"
"어쩌겠어요? 내 자신의 입장을 가장 먼저 생각할 수 밖에 없으니."
"그러다가 소중한 사람을 다 잃을 수도 있을 텐데요. 교수님이 말씀하신대로."
"그래요. 마냥 다 좋을 수는 없죠. 그러니까 스스로 선택을 하세요.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버리든지, 아니면 그런 형태의 사랑을 상대방에게도 납득시키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들키지 않을만큼 철저한 비밀로 해버리든지."
유가희 교수가 제시하는 방향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조언이었기에, 나는 쉽게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거의 바람을 부추기다시피 하는 그녀의 말이 비록 순수하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만큼 오히려 본질적이고 솔직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문득 그녀가 보여주는 이 진솔한 모습 또한 술기운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애초에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내면일 뿐인지가 무척 궁금해졌다.
"물론 승태 씨가 마음에 두고 있는 그 설미라는 학생은 내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걸 달갑게 여기진 않겠죠."
"하하.... 설마요. 그 애는 저한테 관심이 없어요."
"글쎄요, 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그녀는 확답하는 나를 나무라듯이 자신의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갖다대었다.
"내가 윤리적이나 도덕적으로 올바른 말을 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겠죠. 하물며 내가 가르치는 학생을 상대로 말이에요. 그래도 나는 오로지 당신의 입장에서 얘기해 본 거에요. 내 생각대로, 솔직하게."
"고마워요. 사실 교수님의 솔직한 면모를 보게 되서 제가 더 재미있네요."
"그래요?"
자기도 충분히 재미있다는 듯 빙긋 웃는 그녀였다. 진솔한 면모를 알게 되어서 그런지, 그녀의 모습은 아까보다 훨씬 더 교수님 같지 않아 보였다.
섹시하고 치명적인 누나 정도로 보인다고 하면 적당하려나.... 물론 '섹시한 누나'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비 누나가 있었지만, 유가희 교수와 단비 누나는 매력의 색깔이 서로 너무 달랐다.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둘의 차이는 '사랑'을 생각하는 방식이었다. 단비 누나에게 있어 사랑이란 너무나 소중하기에 한 사람에게밖에 줄 수 없는, 오로지 일 대 일의 방식으로만 맺어지는 감정이었다. 옛 애인과도 결국 그런 부분이 문제가 되어 헤어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유가희 교수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그런 방식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바닷물처럼 무한하기 때문에, 오히려 한 곳에만 담아두기는 어려운 감정이라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만을 바라봐 주지 않는다면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많이 사랑한다면 그런게 정말 가능한가요? 오히려 더 자기만을 봐 주길 집착하게 될 것 같은데...."
"글쎄요. 그건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하지만 저는 가능하다고 믿어요. 왜냐하면 내가 그랬으니까요."
과거사가 묻어나는 듯한 말에 나는 차마 대꾸할 수 없었다. 호기심은 일었지만 그 잔잔한 고요함은 오히려 더이상의 질문을 무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비록 취중이었지만, 나는 그 속에서 애한을 읽었다. 그래서 더 캐묻지 않았고, 그녀도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빙그레 웃기만 했다.
단비 누나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요새들어 내가 몸이 안 좋다고 믿고 있는 누나로서는 그 와중에 내가 어딜 쏘다니고 있는지를 무척 궁금해 했다. 나는 교수님과 술자리를 가지면서 간단한 면담을 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얘기했고, 자세한 내막을 전혀 모르기 때문인지 누나는 그냥 그렇구나 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너무 늦지 말고 들어와. 몸도 안 좋으면서.]
"알았어. 이따 들어가서 전화할게."
비록 얄팍한 진실이긴 했지만 누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대화를 원만하게 해결했다는 점이 이제는 다행스럽기까지 했다. 별 이상한 데서 소박한 기쁨을 느낀 나는 통화를 마치고 다시 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화가 오래 이어질 것 같아서 미리 교수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오긴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길어진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려다, 나는 처음으로 간판에 걸린 바의 이름을 볼 수 있었다. 음각으로 디자인 된 듯한 그 간판에는 [B.eye] 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대학로 이곳저곳을 다녀봤지만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교수님 덕분에 새로운 발견을 한 기분이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단비 누나나 한번 데리고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
곧장 자리에 앉으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통화를 하러 나가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앉아있었던 자리에 지금은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처음 보는 사람이었고, 교수님의 입장에서도 그리 달가운 사이는 아니었는지 꽤 난감해 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왔어요?"
내가 다가가니 그녀는 일부러 평소보다 조금 톤이 올라간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교수님의 시선이야 그렇다 치지만 앉아있던 남자까지 나를 돌아보자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은갈치 정장을 차려 입은 낯선 남자가 마치 탐색이라도 하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가희 씨, 일행이 있으셨습니까?"
"그런데요."
"늘 혼자 오시더니 오늘은 별 일이군요. 동생 분이신가 보죠?"
"저는 동생이 없어요."
내 직감이지만, 남자는 정말로 내가 동생일거라 생각해서 저런 질문을 던진건 아닌 것 같았다. 하기야 두뇌란게 있다면 '왔어요?'라는 존댓말을 듣고서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아마도 내가 유가희 교수와 어떤 관계인지 대답을 듣고 싶어서 던진 우회적인 질문일거라 나는 판단했다.
"가르치는 학생인가 보군요."
"......."
남자는 제 좋을 대로 해석을 했지만, 그게 맞았다는 것이 왠지 좀 기분 나빴다. 유가희 교수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확신을 얻은 남자는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더니, 그녀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를 보는 그 눈빛에 아까 같은 경계심이나 탐색의 기미는 확연히 줄어들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그래요."
남자가 자리를 뜨고 나자 나는 비로소 내 자리를 되찾을 수 있었다. 누군지도 모를 남자가 방금 전까지 앉아있었던 곳에 내가 앉자마자 교수님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미안해요."
"아니에요. 그보다 누군가요? 모르는 사이 같지는 않던데."
"거의 모르는 사이에요. 여기에 몇 번 오며가며 마주친 사람인데, 오늘 또 이렇게 봤네요."
"여기에 자주 오시는 편인가봐요?"
"그리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생각날 때 혼자서도 몇 번씩 오니까요."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생각보다 혼자 와서 마시는 손님들이 꽤 많은 것 같았다. 바텐더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가게의 분위기를 안주 삼아 말 없이 술만 마시는 사람들도 많았다. 문득 교수님이 몽환적인 조명 아래에서 혼자 우아하게 글라스를 기울이는 모습을 상상하니 꽤 좋은 그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은 혼자 마시는게 아니라고 들었어요."
단비 누나가 언젠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그런가요? 그래도 나이를 먹다보면 뭐든 혼자 하는 일이 늘어나더라구요."
"말동무가 있어야 더 즐겁지 않나요? 특히 술은."
"혼자 마시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어요. 물론 혼자 있을 땐 이렇게 취할 정도로 많이 마시진 않지요. 오늘은 재미가 있다보니...."
칵테일은 취하기 위해 마시는게 아니라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교수님은 왠지 내가 자리를 비우기 전보다 한층 더 얼굴이 달아오른 모습이었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텅 빈 글라스를 흔들어 보였다.
"그래도 이건 마시지 말걸 그랬어요."
"그게 뭔가요?"
아주 독특한 잔의 모양을 보아하니 나와 함께 있을 때 마신 술은 아닌 것 같았다. 교수님은 좀전의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곁눈질하더니 한숨을 쉬었다.
"아까 그 사람이 산 건데, 이상하네요. 나는 이게 마가리타인줄 알았는데 맛이 영 달랐거든요. 내가 처음 보는 맛이었어요...."
"그 남자가 왜요?"
"내가 맘에 들었다던데요. 오늘도 혼자 온 줄 알고 한 잔 사고 싶었대요."
아까의 그 모양새를 봤을 때부터 대충 짐작은 했지만 직접 듣고보니 마음 한구석이 왠지 구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비록 남자 입장에서는 모르고 그랬다지만, 나와 함께 자리를 가지고 있는 여자에게 대놓고 추파를 던졌단 사실이 조금 기분 나빴다.
"교수님 말대로 교수님이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자인가보네요."
"그런 말 말아요. 저런 사람은 내 타입이 아니니까요."
"돈은 꽤 많을 것처럼 생겼던 걸요."
"돈만 많을 뿐 매력이 없더라구요."
농담조로 웃으며 얘기하는 그녀였지만, 어쩐지 갈수록 눈에 띄게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었다. 아직 유가희 교수의 주량을 확실히 파악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같이 마시며 잠시나마 겪어본 바로는 결코 약한 편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평소에 혼자 칵테일을 즐길 정도라면 일단 어느 정도 주량이 받쳐준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 증거로 내가 자리를 비우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충분히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약간 홍조가 오른 정도를 제외하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얼굴도 확연하게 달아올라 있었고 목소리 또한 갈수록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너무 급격한 변화이다보니 심지어 수상쩍은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찝찝한 기분이 못내 머릿 속에서 떠나질 않아서 나는 텅 비어버린 그 독특한 글라스만 흘끗 바라볼 뿐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사주는 술은 쉽게 마시면 안 된대요."
"네?"
내가 말해놓고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사실 그런 말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했다. 그냥 나오는 대로 읊어 본 것이다. 하지만 읊고 보니, 마치 어린아이에게 유괴 교육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 음.... 몸에 해롭대요."
뒤늦게 궁색한 변명을 해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웃기만 했다.
"이런 곳에 혼자 오다보면 모르는 사람들이 종종 한 잔씩 사곤 하던데, 그럼 그걸 다 거절해야겠네요?"
"그건 교수님한테 '치명적인 매력'이 있기 때문이구요. 그럴 수록 조심해야 해요. 남자는 위험하니까요."
내가 치명적인 매력이란 부분을 강조해서 얘기하자 교수님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늘 어딘가 비밀스럽고 모호한 웃음만을 보여주었던 그녀였기에, 그렇게 순진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하하. 혹시 지금 날 가르치려 드는 거에요?"
"설마요. 걱정 되니까 그런 거죠."
"그러면 혼자 오기 쓸쓸한 날에는 승태 씨가 가끔 술 친구를 해줘요. 그럼 날 보호할 수도 있고 좋겠네요."
"혹시 지금 절 유혹하려 드시는 거에요?"
"아직 제대로 된 유혹을 못 봤군요."
교수님의 말을 흉내내어 멋지게 받아쳤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세게 나와 버리니 할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없는게 문제가 아니라 숨이 막혔다. 속눈썹을 깜박이며 턱을 괴고 지그시 나를 바라보는 교수님의 눈길을 마주하니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녀가 나를 유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암만 술에 취했다한들 이런 상황은 좀 위험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 순간, 어색함에 잠깐 고개를 틀었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 유가희 교수에게 접근했던 그 남자였다. 이목구비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지만 멀리서도 너무 눈에 띄게 반짝이는 저 은색 정장만큼은 확실했다. 그는 이제 바텐더 앞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수시로 이곳을 살펴보고 있다는 것이 똑똑히 느껴졌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마자 시선이 마주쳤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예전에 벤치에서 얘기했던거 기억나요?"
"예? 아, 예...."
이 분위기가 쭉 이어진다면 어색함에 못이겨 내가 또 헛소리를 늘어놓을 것만 같아 불안했는데, 다행히도 그녀가 먼저 정적을 깨뜨려 주었다. 그와 함께 의문의 남자에게 한순간 팔았던 신경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때 내가 여자로서의 직감이 꽤 뛰어난 편이라고 얘기했던 것 같은데."
"기억나요."
"사실 그래서 지금 좀 기분이 나빠요."
"왜죠?"
"승태 씨가 끝까지 뭔가를 감추고 있는게 느껴지거든요."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태껏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입으로 드러내지 않은 사실이 딱 하나 있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그녀도 내가 뭔가를 감춘 채로 이야기를 이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 말마따나, 그만한 눈치가 있는 여자였으니....
내 짐작일 뿐이지만, 아마 지금까지는 굳이 말을 하지 않는 데에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 캐묻지 않다가, 취기에 사로잡히니 그녀 나름대로의 그런 사려 깊은 배려가 일순간 흐려진 것 같았다.
또 한 고비의 망설임이 찾아왔다. 이것만큼은 끝까지 비밀로 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긴 했지만, 술에 취한 교수님의 숨김 없는 면모를 보니 나 또한 여기에서만큼은 솔직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져버린 것 같았다.
"교수님."
결국 솔직해지고 싶은 마음이, 죄의식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에 대한 거리낌마저 억눌러 버렸다.
"근친상간이란걸 어떻게 생각하세요?"
"뭐라구요?"
유가희 교수는 마치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한 듯, 괴고 있던 턱에서 손을 떼고 두 눈까지 깜박거렸다. 무슨 말을 해도 놀라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였기에 그 반응은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괜한 얘기를 꺼냈나 하는 기분도 들었지만 한번 꺼낸 이상 이제 감출 수도 없었다.
"말 그대로에요."
"왜 그런걸.... 물어보시는 거죠?"
"교수님의 생각을 듣고 싶어서요."
매우 조심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태도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싶다는 의사가 확실히 전해질 정도였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놀랐다기보다는 어쩐지 조금 당황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언제나 물이 흐르듯 막힘 없는 언변을 보여주었던 유가희 교수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오히려 나까지 당황스러워졌다.
"미안해요.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왜 그렇죠?"
"글쎄요.... 내가 대답을 해버리면, 너무 편파적으로 이야기를 해버릴 것 같기 때문일까요....?"
그녀는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 것과 동시에, 또 처음으로 아리송한 대답을 남겼다.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한 가지 만큼은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왠지 이만큼이나마 대답을 하는 것도 그녀 입장에서는 굉장히 무리한 것이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듣고 싶긴 하네요. 승태 씨가 왜 그런걸 묻는지."
"대답할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꼭 대답을 듣기 위해서 고민을 털어놓는건 아니지 않나요? 난 듣기만 할 테지만, 그래도 도움이 될 텐데."
"......."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에, 잠시 망설이던 내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런 말 어떻게 들으실진 모르지만, 여동생과 관계를 가질 뻔 했어요."
"관계라면.... 성관계 말인가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가희 교수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오른 것도 잠시, 그 감정은 곧 다른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 표정을 뭐라 한 마디로 형용할 수는 없었지만, 단순히 놀란 차원을 넘어서 그보다 훨씬 더 심층적이고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죠?"
결국 나는 혜진이에 대한 일은 물론이고, 쉽게 털어놓지 않는 가족사에 대한 사연까지 모두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었다. 피가 섞이지 않은 내 동생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단비 누나와 얽혀버린 복잡한 관계에 따라 우리 남매가 어떤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를 모두 털어놓은 것이다. 어린 시절에서부터 시작 된 그 두서없는 고백은 인내심이 없다면 다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길고 장황했다.
기나긴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내 유가희 교수는 갈수록 점점 더 취기에 지쳐가는 모습이었지만 그런 만큼 끝까지 내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마침내 내가 혜진이와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마쳤을 쯤에는, 그녀는 거의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할 말을 또렷이 하려는지 무어라 힘겹게 입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그 여동생.... 안타깝군요."
퍼즐의 남은 한 조각을 맞춘 듯, 비로소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유가희 교수의 입에서 첫 마디가 나왔다. 비록 그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했지만, 그 실낱 같은 목소리 속에서 절절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아요. 예전의 나...."
"네?"
"오빠를 지독하게 좋아한...."
그녀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는 생각은 기어코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꺼져버릴 것처럼 희미해져 가던 목소리가 정말로 꺼져버린 것이다. 깊은 잠에라도 빠진 듯 유가희 교수의 몸이 힘 없이 늘어지더니 옆의 벽면에다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순간 당황하여 얼른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교수님?"
"......"
두 눈을 얌전히 감고 정신을 놓아버린 교수님을 내려다보며, 나는 전에 느껴보지 못한 초유의 낭패감에 빠져들었다. 같이 술을 마시던 여자가 필름이 끊어진 경우는 불과 얼마 전에도 있었지만 이건 그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난감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찝찝하기 그지없게도, 이 상황은 어딘가 작위적인 느낌이 들고 있어서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가희 씨가 많이 마셨나보군요."
때마침 그 찝찝함의 장본인이 갑작스럽게 목소리를 불쑥 들이밀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은색 정장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낯선 호칭 앞에 잠깐 의아했지만, 나는 곧 그게 유가희 교수를 뜻하는 말이란걸 깨달았다.
"무슨 일이시죠?"
내가 괜히 이 남자의 이목구비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게 아니었다. 이제보니 머리 끝에서 발 끝에 이르기까지 온갖 장신구로 도배를 하고 있어서, 도무지 인물 자체의 인상을 기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지와 목걸이, 팔찌와 같은 보편적인 악세사리에는 물론이고 피어싱에도, 심지어는 안경까지도 반짝거리는 보석으로 치장한 남자의 모습은 암만 양보해도 패션의 취향이라고 불러주기엔 무리가 있었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싶진 않았지만 솔직히 사치의 결정체를 이룬 듯한 그 모습을 보니, 유가희 교수가 왜 이 남자를 '돈만 많을 뿐 매력이 없다'고 표현했는지 이젠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가희 씨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학생인 것 같은데, 선생님이 혼자 집에 들어가시기 힘들 듯 하니 저한테 맡기고 이만 가보세요."
"뭐라구요?"
이 어처구니가 없는 발언이 어찌나 당당했던지 내가 뭐라고 대꾸해야하나 순간 감을 못 잡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는 남자의 태도에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그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아하니, 유가희 교수처럼 정신을 잃지 않았다 뿐이지 남자도 이미 인사불성이 된 것 같았다.
"나는 가희 씨 집이 어딘지 압니다. 내가 선생님을 무사히 데려다 줄 테니 학생은 그만 안심하고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그 쪽 상태를 보니 운전대는 못 잡을 듯 싶은데요."
"상관없습니다. 같이 택시를 타면 되니까. 선생님 상태를 보아하니 혼자 택시 태워보내기는 힘들 듯 하니까요."
취기에 휩싸인 눈을 번득이는 남자의 요구에, 나는 고민이 되어서가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적당한 말을 고르기가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내가 망설이는거라 생각했는지 은색 정장의 남자는 히죽 웃으며 이런 말도 덧붙였다.
"그만 가 봐요. 계산도 내가 해줄 테니."
"......."
애초에 의심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었지만, 그 한 마디로 말미암아 더욱 확실해졌다.
"됐습니다."
"뭐요?"
"차라리 저한테 교수님 집 주소를 알려주시죠. 제가 택시로 모셔다 드릴 테니까요."
"하, 하하.... 학생이 날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나본데, 난 그 쪽 선생님이랑 개인적으로 아주 친한 사입니다."
"그럼 교수님 집이 어딘지 한 번 말씀해보세요. 사실 저도 교수님 집을 아니까."
물론 내 말은 뻥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뻥을 뻥으로 받아치는 것이니만큼 아무 문제가 없었다. 저 놈이 유가희 교수의 집을 정말로 알고 있을 확률은 암만 높게 잡아도 제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거, 학생이 괜한 고집 부리는 구만. 아저씨한테 험한 꼴 당하지 말고 그냥 가지 그래."
말문이 막히니 포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되려 본격적인 위협을 가해오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이쪽도 더 말을 아낄 이유가 없었다. 나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남자를 마주 보았다. 마주 서고 보니 내 키가 주먹 하나 정도는 더 컸다. 그 상태에서 잠시 남자를 노려보다가, 그대로 멱살을 잡아 쥐어버렸다.
"진짜 험한 꼴이 뭔지 보고 싶으면, 다음에도 그런 짓 한번 해 봐."
"이, 이 미친 새끼가.... 내가 누구인 줄 알고...."
"여자 한번 자빠뜨려 보려고 멀쩡한 술에 손 대는 놈이란건 알지. 당신이 찍은 여자가 오늘 혼자 온 게 아니었다는 점이 유감이지만."
은색 정장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검은색 셔츠의 카라에서 손을 뗀 나는, 테이블 한 구석에 나뒹굴고 있었던 아까의 글라스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 독특한 모양의 잔을 놈의 면전에다 대고 흔들어보이며 나지막히 말을 이었다.
"여기에 무슨 짓 한 건진 모르지만, 족쳐버릴까 하다가 그냥 참고 가는 거니까 그 버릇은 고치는게 좋을 거야. 교수님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으면 다시 찾아와서 죽여버릴테니 눈에 띄지 말고."
"......."
사실 말을 하면서도 내심 억측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남자의 모습을 보니 내 생각이 맞았다는걸 알 수 있었다. 아마 제정신이 멀쩡한 상태였다면 놈이 저것보다는 좀 더 지능적으로 발뺌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나는 벽에 머리를 기댄채 눈을 감고 있는 유가희 교수를 일으켜 세우려고 남자에게서 몸을 돌렸다. 유가희 교수의 집이 어딘진 모르지만 일단 이 가게를 나가서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저 은색 정장의 시야에서 그녀를 멀찍이 떨어뜨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기왕 확신도 얻었는데 그냥 진짜로 족쳐버릴까?'
그러기엔 물증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조사라도 해보면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면 본의 아니게 일이 너무 커지게 되고 유가희 교수가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그대로 두자니, 또 언제고 교수님에게 위험한 짓을 할 것 같고.... 교수님은 여자로서의 직감이 빠르다면서 왜 이런 상황은 눈치채지 못한 걸까?
- 쨍강!
하지만 내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도 못하고 중간에 끊겨버렸다. 머리가 깨지는 듯한 충격과 동시에 눈 앞이 아찔해졌고, 후두부 근처를 가격한 둔기가 산산조각이 나며 유리 파편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이런.... 씨발....'
뒤통수를 얻어맞은 충격에 그만 그 자리에서 기절까지 할 뻔 했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머리를 감싸며 멀찍이 몸을 피해 거리를 두었다. 내가 죽지 않은걸 보니 다행히 무식하게 병 같은 걸로 내리찍은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유리조각이 쏟아지면서 이마가 찢어졌는지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해 시야가 금방 붉게 물들었다.
"이 새끼가.... 죽을려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은색 정장의 남자가 이번엔 의자를 집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핏물이 눈에 흘러 들어가 다음 장면부터는 거의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몸을 날려 잘 보이지 않는 와중에도 놈의 가슴팍을 들이받았다.
"뭐야?"
"싸움 났어!"
웅성거림으로 주위가 순식간에 시끄러워지자 가뜩이나 눈도 잘 보이지 않는데 귀도 멍멍해졌다. 암만 주먹질에 자신이 있다고는 하지만 눈과 귀 없이 싸움을 해보겠다는건 미친 짓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와중에도 이 놈의 주먹질과 발길질이 얼마나 엉성한지 감으로 피할 수 있는게 대부분이었고, 맞더라도 그리 위협적인 주먹이 아니었다. 다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화끈거리는 충격 때문에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다.
- 뻑!
시야가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하자 나는 곧바로 남자의 옆구리에 발길질을 날렸다. 놈은 맥 없이 바당에 나뒹굴었지만 나도 머리가 깨진 상태에서 격하게 움직였기 때문인지 다시 아찔한 어지럼증이 덮쳐왔다.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로 비틀거리고 서 있자 바닥에 쓰러졌던 남자가 금새 몸을 일으켜 내게 달려들었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키며 방어를 하려고 팔을 들어올리려는데, 그 때 아슬아슬하게 누군가가 우리 사이로 끼어들어 놈을 제지했다.
"손님, 진정하세요."
"뭐야.... 당신 바텐더 아냐....?"
핏물로 흐릿해진 시야 속에 검은 조끼를 입은 또다른 남자가 보였다. 놈의 말마따나 중간에 끼어든 사람은 다름 아닌 이 가게의 바텐더였다. 머리가 핑 도는 듯한 어지러움이 느껴져 당장이라도 눈을 감으면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기 때문에 기절할 수는 없었다.
"소란을 피우시면 안 됩니다."
"이거 못 놔? 내가 이 집에 투자해준 돈이 얼만데 이딴식으로 나와?"
악에 받힌건지, 취기에 이성을 잃은 건지는 몰라도 남자는 상황에 맞지도 않는 말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 조끼의 바텐더가 입을 열자 다음 순간 은색 정장의 남자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지금 저희 사모님께서 와 계십니다."
두 남자가 무슨 대화를 하건 간에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바닥에 주저 앉은 내 주위로 핏물 자국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솔직한 말로 지금도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멀쩡하게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 자체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다음 순간 들려온 어떤 여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 영업장에서 무슨 소란들이죠?"
신기하게도 한 여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여러 사람의 웅성거리는 소음을 뚫고 또렷하게 울렸다. 주위를 둘러싼 구경꾼들의 인파를 제치고, 그 사이에서 중년의 여인 한 명이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와 함께 걸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허물어진 와중에도 그 기품 있는 여인의 모습을 어디선가 분명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설미....?'
하지만 생각은 거기까지였을 뿐,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