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그녀들의 마음은 ? - 18부
감동넘치는 로맨스 명작
그녀들의 마음은 ? - 18부
그 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중학교 때의 일이었으니만큼 아주 오래된 기억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몇 가지 확실한 점은, 그 때는 내가 아직 철이 없었을 때였고, 재혼을 한 아버지를 막연하게 싫어하고 있었을 때였고, 정아 누나가 아직 살아있었을 때였다는 것이다.
아... 그리고 또 하나. 그 날은 갑자기 비가 많이 내렸다. 하늘이 통째로 녹아내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정없는 소나기가 쏟아져내렸던, 지독한 장마철의 어느 하루였다.
승태야, 미안한데... 엄마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그 무렵의 새엄마는 항상 내게 말을 걸 때 그런 식으로 조심스럽게 얘기를 했었던 것 같다. 내가 새엄마를 달갑지 않게 여긴다는걸 스스로 의식한 것이었겠지만,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그 조심스런 말투가 솔직히 썩 맘에 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혜진이가 우산을 안 가져간 것 같아. 학원 끝날 때가 다 되가는데 집에 어떻게 올지 걱정이구나. 네가 우산 들고 마중 좀 나가주면 안되겠니?
늦은 오후께부터 퍼붓기 시작한 갑작스런 소나기였다. 비를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는지 길에는 우산 없이 분주하게 뛰어가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자주 보였다. 당시 겨우 초등학생이었던 혜진이가 어른들도 예상치 못한 소나기를 대비했을리는 없었다. 우산도 없이 빈 손으로 학원에 가버린 딸을 새엄마는 무척이나 걱정하는 눈치였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심 투덜거리고 있었다. 새엄마가 직접 갈 수도 있는 일을 굳이 나에게 맡기는 것은, 인정을 하든 안 하든 간에 내가 이제 새엄마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좀 더 감춰진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새엄마는 자꾸 의도적으로 나와 혜진이를 붙여놓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 승태야. 비도 많이 오는데.... 혜진이가 걱정되잖아. 마중 나가 줘.
내가 못마땅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정아 누나까지 나를 부추기고 들었다. 당시의 나에겐 아버지나 새엄마의 말보다 누나의 말 한 마디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하곤 했었다. 나는 연신 툴툴거리며 비에 젖을걸 대비해서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었다. 부엌일을 하다 말고 따라 나온 새엄마가 못내 미안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엄마가 갈 수도 있는 건데.... 할 일이 많아서 그래. 미안하구나.
내게 말을 할 때 새엄마 자신을 계속해서 '엄마'라고 강조했던 것 또한 이 때 당시의 특징이었다. 수긍도, 반박도 하기 싫었던 나는 대답을 하는둥 마는둥 '다녀올게요'라는 말만 웅얼거리고는 우산을 챙겨 집을 나섰다. 등 뒤에서 정아 누나가 손을 흔드는게 느껴졌다.
비는 정말 지랄같이 많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온 시내가 물에 잠긴 듯한 기분이었다. 이 억센 비를 뚫고 가려니 괜시리 또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새엄마는 구태여 나랑 혜진이를 가깝게 만들어보려고 계속해서 이런 기회만 생기면 나를 떠밀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정말 쓸 데 없는 시도였다.
당시 혜진이와 나의 사이는 지금처럼 그렇게 허물없고 돈독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새엄마가 그렇게 걱정해야 했을 만큼 나빴던 사이는 또 아니었다. 뭐랄까.... 그 애는 어딘지 미워하기 힘든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하긴 내가 그렇게 느낄 정도이니 정아 누나가 쉽게 마음을 열었겠지만 말이다.
'글쎄.... 여동생이라....'
혜진이. 서혜진. 내가 그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아이는 서혜진이 아닌 유혜진이었다. 어느날 아버지가 새엄마라며 데려온 한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우리집 문턱을 밟았던 그 아이.... 내게는 팔자에도 없었던 여동생이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셈이었다.
'가족'이란 것이 나를 제외하고 부모님과 누나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인 줄 알았던 내게, 난데없이 생겨난 여동생의 자리는 조금 혼란스럽기까지 할 정도였다. 새엄마야 엄마의 자리를 대신했다 치더라도.... 동생이라니. 그 새로운 구성원의 등장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여동생과 나 사이에 어떤 막연한 벽이 놓여있었다는 것만큼은 지금 생각해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위 아래로 같은 남매라고는 해도, 그 아이가 한 배에서 나고 자란 우리 누나와 도저히 같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 아이 입장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나를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기사 허구헌날 주먹질이나 하고 다니는 양아치 같은 놈을 어느날 갑자기 오빠라고 불러야 하게 생겼으니 그 애 입장에서도 편하진 않았겠지.
'저긴가?'
어느새 몇 발짝 앞으로 학원 건물이 보이고 있었다.
코와 코가 맞닿을 듯, 숨결도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여동생이 눈을 감았다. 가벼운 입맞춤과 키스의 정확한 차이는 대체 뭘까? 정말 단순히 혀를 쓰는 것과 쓰지 않는 것의 차이일 뿐인 건가? 아니다. 이건 느낌 상의 문제였다. 입술과 혀라는 신체적인 구분을 넘어서, 그 행위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정신적인 감각의 차이가 중요한 거였다.
그런 의미에서 키스라는 행위는 여동생과 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는 스킨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혜진이에게 키스를 하려 하고 있었다. 그게 정말 혜진이를 위한 이유인지, 나를 위한 이유인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빨리 해.
알았어. 나중에 뭐라하지마.
기왕 하기로 한거 질질 끌어봤자 분위기만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 키스를 하기 전에 이렇게 재촉을 받는 것 자체가 괜히 어색한 느낌만 심어주는 꼴이었으니. 되도록 빨리 끝내리라 하는 마음을 먹으며 나는 혜진이의 뒷목을 한 손으로 감싸쥐었다. 키스를 하되, 최대한 가볍게.....
'하지만 그게 정말 가능한 걸까?'
학원 입구에서 혜진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애는 혼자 있었던게 아니었다. 그 애가 누구랑 있던간에 내가 별로 신경을 쓸 일은 아니었지만, 그 '누구'가 내가 아는 놈이었다면 조금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 놈은 나와 거의 견원지간이었고, 게다가 지금은 혜진이에게 해코지를 하고 있었다.
야, 조심해. 니 오빠가 얼마나 쓰레기같은 놈인 줄 알아? 너한테도 무슨 짓 할지 몰라. 낄낄.
당연하지. 친동생도 아닌데 그 양아치새끼가 맘만 먹으면 뭔 짓을 못 해?
이제보니 한 놈이 아니라 두 놈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거의 밥 먹듯이 재미삼아 싸움질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여기저기에 원수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유독 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던 놈들이 바로 저런 놈들이었다. 먼발치에서 잠깐 들었지만 나는 저 놈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건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주먹질로는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으니 저 녀석들은 요즘들어 내 등 뒤에서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 바로 새로 생긴 내 여동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놈들의 성격을 생각하면 대충 어떤 식의 이야기를 지어내서 퍼뜨리고 다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겨우 초등학생밖에 안 된 애를 가지고 그런 헛소문을 지어낸다는 것이 마냥 유치해보이기만 했다.
'에이, 씨팔... 왜 저 새끼들이랑 같이 있는 거야?'
솔직히 나는 그 따위 헛소문이 나돌든 말든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눈 앞에 실제로 저런 놈들이 있다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거였다. 아마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한 것이겠지만, 솔직히 저 놈들이 혜진이의 얼굴을 알고 있다는 것부터가 내게는 불편한 일이었다.
야, 근데 너 니 오빠랑은 달라서 꽤 귀엽게 생겼다.
피가 안 섞여서 그렇지 뭐. 하하하.... 으악!
초등학생 여자애 하나를 두고 중학생 두 놈이서 희롱을 하는 꼴이라니 참 가관이 따로 없었지만, 혜진이의 반응은 그보다 더 가관이었다. 듣다 말고 갑자기 발을 들어 한 놈의 무릎을 걷어차버린 것이었다.
우리 오빠 욕하지 마세요!
어우 씨, 이 계집애가....
- 뻑!
무릎을 맞았던 놈이 이번엔 내 주먹을 맞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보기좋게 처박힌 놈이 얼빠진 얼굴을 들어 나를 보았다. 자리에 있었던 세 명 모두가 갑자기 나타난 나 때문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어린애 데리고 뭐 하냐?
씨... 씨발... 서승태 이 새끼....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된 녀석은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웅덩이 속에서 우물거리며 욕질을 해댔지만, 나는 가차없이 쓰러진 놈의 면상을 발끝으로 한 방 더 갈겨버렸다. 입술이 터지고 피가 튀니 혜진이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이번엔 아예 놈의 머리를 밟아 웅덩이 속에 처박아버렸다.
너... 너 이 개새끼....
남아있던 한 놈은 내게 덤벼들지 말지 갈피를 못 잡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가 손을 들어올리자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는 것을 보니 굳이 번거롭게 주먹질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냅다 그 놈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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