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 암살사건 / 음모론과 마법총알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존 F . 케네디, 미국 35대 대통령
출생과 사망일 1917년 5월 29일~1963년 11월 22일
사망원인 : 총탄에 의한 암살
『 1963년 11월 22일, 자신의 지지율이 낮던 달라스에서의 유세를 위해 전용기를 타고 케네디 대통령은 영부인 재클린과 함께 달라스 공항에 도착했다.
맑게 개인 날씨와 유세를 위해 케네디 대통령은 오픈카에 올랐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 케네디 대통령과 영부인 재클린 >
수많은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케네디 대통령의 자동차 행렬은 천천히 엘름가에 들어섰다.
대통령의 차량이 엘름가로 진입하는 코너를 돌고나서 몇초후 첫번째 총성이 울려퍼졌다.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의 방문을 기념해 누군가 쏜 축포일꺼라 생각했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총성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몇초후 암살범의 총구에서 2발의 총이 케네디 대통령을 향해 발포되었다.
2번째 총탄에 목을 관통당한 케네디 대통령은 목을 부여잡았고 남편에게 이상이 생긴것을 눈치챈 재클린은 남편을 향해 손을 뻗었다.
2번째 총알이 케네디에게 날아든뒤 몇초후 3번째 총알이 케네디 대통령의 머리를 관통했다.
주위의 사람들은 " 대통령이 저격당했다!" 라고 외치기 시작했고 곧 공포와 혼란이 엘름가를 덥쳤다.
대통령의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도로를 질주해 근처 파크랜드 메모리얼 병원에 도착했다.
경호원들이 대통령의 차량에 다가갔을때 차량내부는 피로 흥건한 상태였고 케네디 대통령은 부인 재클린에게 안겨있었다.
뒤이어 다른 차량에 있던 부대통령 린든 존슨은 경호원들에 의해 철저하게 보호 받으며 병원의 작은 방으로 대피했다.
의사들은 케네디 대통령은 되살릴려고 갖은 노력은 다했지만 이미 치명상을 입은 대통령은 숨을 거둔후였다.
오후 1시 공식성명발표에 의해 미국 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가 암살당한 것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경찰들과 FBI는 목격자의 증언에 따라 사건이 있은지 5분만에 엘름가 교과서 건물을 포위하고 건물 6층에서 탄피 3개와 총기를 발견했으며 얼마지나지 않아 총기 소유자이자 암살범인 리 하비 오스월드를 체포했다. 체포 당한 리 하비 오스월드는 자신은 대통령은 쏘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1963년 11월 24일, 오스월드는 다른 교도소로 후송 도중 나이트 클럽 주인인 잭 루비에게 암살당했다. 』
1963년 11월 22일 일어난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사건은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수 많은 목격자, 암살범의 체포, 총과 탄피등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논란을 가져오고 있으며 수 많은 음모론에 주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음모론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과연 진실은 어떤 것일까?
과연 단독범에 의한 암살인것일까? 아니면 다른 배후가 있으며 오스월드는 단순한 희생양 인것일까?
오늘은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사건에 관한 사실들과 의문점들을 알아보고 가장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음모론에 대해 알아보겠다.
그리고 음모론의 가장 중심에 있는 일명 마법 총알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종종 우리는 위와 같은 사건에서 의문점을 품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목격자와 그 목격자들의 필름에 담긴 영상에도 범행 당시의 영상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정부와 경찰의 대처,
그리고 범행현장에서 발견된 증거와 피해자에게서 발견되는 범의학적 증거를 제대로 다루지 않아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거대한 세력에 의해 진실이 은폐당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 경우가 다수 있다.이런한 의심들은 많은 가설들을 생성하며 정부의 공식발표를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의 결론을 가져온다.
바로 케네디 암살 사건도 이런 경우이다.
케네디 암살 사건에 대한 정부의 공식 발표이후 미국의 여론 조사를 보면 미국인의 68%로가 단독범의 소행이 아닐것이라고 응답했다.
이것은 정부의 조사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의 증거이기도 했다. 과연 정부의 공석발표는 무엇이었으며 논쟁이 되는 것들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가장 많이 알려진 재프루더의 필름 영상
( 그는 재봉사로 당시 케네디 대통령 자동차 행렬은 찍고 있었다. )
쟁점 1. 총알과 탄도
소총에서 쏘아진 총알과 그 총알의 탄도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의 주요한 단서들이다.
워렌위원회 보고서( 정부공식조사 보고서 )에 의하면 총 3발이 발사 되었고 첫번째 총알은 미발견으로 케네디 대통령을 빗나갔으며,
두번째 총알은 일명 마법 총알로 커네디 대통령을 관통하여 텍사스 주지사를 맞춘 총알이고 세번째 총알은 케네디 대통령의 머리를 관통한 총알이다.
그리고 이 3발의 총알은 단독범 오스월드의 소유 총에서 발사된 것이다.
음모론의 가설에 의하면 2번째 총알은 오스월드가 아닌 다른 저격수에 의해 쏘아진 것으로 주장된다.
즉 단독범이 아닌 사건이며 배후가 있다는 주장이게 되는 것이다.
의견의 일치를 보이는 내용은 엘름가를 들어서서 케네디 대통령은 2발, 주지사는 1발을 맞다는 점이다.
그 후로는 의견이 대립된다. 그럼 어떤 주장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 알아보자.
우선 첫번째 총알을 A, 두번째 총알을 B, 세번째 총알을 C로 임의로 지정하고 C부터 살펴보자.

< 총알 C와 케네디의 머리 총상 >
C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가설은 리무진 운전수가 권총을 꺼내들고 케네디를 쏘았다는 것이다. 영상을 캡쳐해서 살펴보자.

< 리무진 운전사 >
영상을 살펴보면 등을 돌려 케네디를 바라보고 있는 운전사가 보인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권총같은 총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부 가설에서 주장하고 있는 운전사에 의한 내부 소행은 명백히 아니다.
재프루더의 영상에 입각한 다른 주장도 있다. 그의 영상을 근거로 C가 케네디의 앞쪽에서 발사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유명한 잔디 언덕과 하수관 가설이다.

< 좌 : 잔디 언덕과 하수관에서의 탄도 / 우 : 잔디 언덕 >
우선 하수관에서의 C의 발사는 불가능하다.

자동차위에 탄 케네디가 시야에 들어올 수 없기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매우 아랫쪽에 위치한 하수관에서 높이 위치한데다가 자동차까지 탄 케네디를 맞추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유명한 잔디 언덕 가설을 들여다보자. 잔디 언덕에서 오스월드외에 또 다른 암살범이 케네디의 앞쪽에서 C를 발사했다는 것이 주요 주장이다.
C가 명중하자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잔디 언덕으로 뛰어갔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그 곳이 가장 저격하기 쉬운 장소였기 때문이다.
최초의 수사관들은 잔디 언덕을 샅샅히 뒤졌지만 총알이 발사된 그 어떤 물리적 흔적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의 영상을 본사람들은 케네디가 왼쪽 뒤로 넘어지는 것을 보고 C가 전방에서 발사되었을 꺼라고 추측했다.

< 왼쪽 뒤로 쓰러지는 케네디 >
재프루더의 영상에는 잔디 언덕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촬영되었다.

< 재프루더의 필름 촬영장소와 잔디 언덕 >
이를 명확히 알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 의해 잔디 언덕쪽이 촬영된 장면을 봐야한다.
우체국 직원이던 마크벨은 재프루더의 반대편에 서서 당시 촬영을 했다.
< 벨의 필름 영상 >
벨의 영상에서는 사람들이 잔디 언덕으로 뛰어가는 것이 보인다. 벨의 영상과 함께 닉스의 영상은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 닉스의 필름 영상 >
정말 잔디 언덕에서 총을 쏘았다면 총알이 케네디의 머리 왼쪽을 뚫고 나가서 영부인 재클린을 맞추거나 차에 맞아야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럼 벨과 닉스의 영상에서 잔디 언덕이 찍힌 부분을 캡쳐해서 살펴보자.

< 잔디 언덕 캡쳐 >
어디에도 사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C가 케네디에 명중하는 순간 미세한 연기가 케네디 앞쪽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이 영상에 잡혔다.
이것은 잔디 언덕 즉 앞쪽에서 발사된 것이 아니라 뒷쪽에서 발사된 것을 의미한다.

< 뒤에서 관통하여 앞으로 나오면서 피가 튀는 장면 >

< C의 탄도 >
케네디 암살 사건 몇분후에 목격자들에 의해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발사되었다고 제보했고 곧 바로 경찰들이 건물 6층으로 진입했다.

< 저격지점과 케네디 대통령 차량 집입 경로 >
6층에서 소총과 주변의 상자, 탄피에서 오스월드의 지문이 나왔다.

< 교과서 보관 직원이던 리 하비 오스월드 / 오스월드 소유의 소총 >

< 오스월드의 지문과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발견된 탄피 위치 >
위에 증거를 들어 C가 텍사스 교과서 보관소 6층에서 발사 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볼수 있다.
B는 CE 399라는 증거명이 붙었으며 일명 마법 총알로 불리우는 논란의 총알이다.

< 2번째 총알 일명 마법 총알 >
두 번째 총알은 표지판 뒤에서 케네디의 모습이 나타났을때 맞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왜냐하면 그 순간 케네디가 목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케네디가 목을 움켜진 동시에 총알 한발이 텍사스 주지사를 관통했다.

< B를 맞고 난 직후의 케네디와 주지사 >
처음 수사관들은 두 사람을 관통한 총알을 별개의 총알로 생각했다.
하지만 오스월드가 두발을 발사할수 있는 소총 노리쇠를 당길 수 있을 만한 시간이 아니였다. 그
렇다면 생각 할 수 있는 경우는 두 사수가 둘이 었거나 총알 한발이 두 사람을 맞췄다는 것이다.
워렌 보고서에 의하면 B는 대통령의 목을 관통한 다음 주지사를 맞췄다고 한다.

< 마법 총알의 탄도 >
교과서 보관서 6층에서 발사된 마법 총알은 케네디의 등을 관통해 목으로 빠져나와 주지사의 폐와 흉곽을 통과 한뒤
오른쪽 손목을 거쳐 왼쪽 허벅지에 박혔다.
많은 음모론가들은 하나의 총알이 두 사람을 관통했다는 공식 주장을 비웃었다.

< 음모론의 주장 : 있을 수 없는 탄도 >
과연 하나의 총알이 두 사람을 관통할수 없었던 것일까? 보고서와 탄도 전문가들에 의해 밝혀진 탄도를 살펴보자.

< 보고서의 탄도 >
총알은 코넬리 주지사가 누워있던 파크랜드 병원의 이동침대에서 발견됐다. 이것은 총알의 위력을 알수 있는 점이다.
이 총알은 여러명의 군사들을 관통하도록 제작된 총알이다. 1.2m두께의 나무를 뚫고 지나갈 수 있으며 4명정도는 쉽게 관통 할 수 있는 위력을 지녔다.
위력은 증명되었으니 이제 보고서의 탄도가 확실한지 알아볼 차례이다.
B는 케네디의 목을 통과한뒤 옆으로 눕는 형태를 취했다. 총알이 기울어진 채로 주지사의 몸을 관통한 것이다.

< 마법 총알의 정확한 탄도 >
이것의 증거는 바로 주지사의 옷과 등에 남겨진 관통상 모양이다.

< B의 관통 흔적 >
주지사의 옷과 등에서 확인된 총알 구멍은 총알의 길이와 거의 일치한다. 이것은 총알이 옆으로 누워져 들어갔음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만약 주지사가 다른 총알에 저격되었다면 총알 구멍의 모양은 하나의 둥근 점 모양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마법 총알은 별개의 총알이 아닌 하나의 관통총알인것이 명백해졌다.
A는 사라진 첫번째 총알이다. 이 총알은 그 누구에게도 맞지 않았으며 발견되지 않았다.
워렌보고서에서도 이 총알은 오스월드의 총을 떠나서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이 총알은 아무도 맞추지 않았기에 수사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오스월드가 3발을 발사한 전체 시간을 알 수있는 단서였다.
재프루더의 필름 영상 속에는 A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프루더의 영상이 모든 상황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그의 영상을 보고 3발의 총알이 쏘아진 시간이 8.9초 또는 6초라고 이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A는 재프루더가 촬영하지 않을때 발사되었다. 재프루더가 촬영을 시작하고 오토바이를 탄 경찰들이 지나가자 그는 촬영을 멈추었다.
당시에는 필름이 귀했기 때문이었다. 케네디가 탄 차량이 보이자 촬영을 재개했던 것이다.

< 두 사진의 중간에는 촬영을 멈춘 시간들이 있다. >
재프루더가 촬영하지 않은 시간대의 다른 필름 영상을 보자.

< 세관원 휴즈의 필름 영상과 휴즈의 촬영 위치 >
케네디의 차량이 딜리광장에 들어서자 휴즈는 무심코 교과서 보관소로 카메라를 돌렸다.
휴즈의 영상을 캡쳐해보면 오스월드가 첫 총알을 발사하려고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다.

< 휴즈의 필름 영상속 교과서 보관소 6층과 사람의 형체 >
이것은 목격자들의 증언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케네디의 차량이 바로 교과서보관소 앞을 지날때 쏜 것으로 보이는 이 총알은 왜 빗나간것일까?
교과서보관소 6층과 케네디의 거리는 30m로 80m에서 머리를 맞춘것 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이다. 이 답은 다른 영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다른 영상속 캡쳐 >
바로 교통신호등이었다. 이 교통신호등은 차량행렬을 위에서 가리는 형태로 서있었다. 하지만 위치만으로는 A의 가설을 설명하기엔 충분하지 않다.
케네디 암살이 있고 5일뒤 존 조 하울렛 요원이 찍은 필름속에는 교통신호등도 포함되어있었다.

< 당시 교통신호등 사진 >
교통신호등 뒷쪽에는 어떤 점이 보인다. 혹시 이것이 A를 빗겨나가게한 흔적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빗겨나간 총알은 보도연석을 맞고 돌 파편으로 일반인 한명을 상처입게했다.
당시 돌 파편을 맞은 사람은 자신이 무엇에 맞았는지 처음엔 몰랐다고 한다. 총알 A는 케네디를 빗겨나간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무엇때문에 첫번째 총알이 저격에 성공할 수 없었는지는 아직 확실히 판단 할수 없다.
쟁점이 되던 총알과 탄도들은 위의 증거와 분석을 통해 오스월드 단독범이란 것을 보여주며 저격위치를 알려준다.
쟁점 2. 의학적 증거
케네디의 의학적 증거들은 사후 처리과정에서 많은 실수와 오류가 범해졌기에 아직도 많은 논란거리를 가져오고있다.
음모론가들은 케네디의 범의학적 증거가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 이제부터는 나도 긴가민가하는 부분이다..-_-;; )
범죄현장에서는 범죄 현장뿐만아니라 모든 것이 보존되어야한다. 의복, 머리카락, 뼈, 혈흔등 그 모든것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하지만 현대 과학으로 재조사할 수 있는 케네디의 신체 증거는 그 어디에도 보존되어있지 않다.
케네디의 뇌와 조직샘플이 국립자료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었지만 그 마저도 1960대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케네디의 시신이 중요한 단서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케네디의 뇌와 조직세포, 부검사진, x-ray, 의복을 전부 케네디가에 넘겼다.
범죄의 증거를 유족에게 넘긴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며 그 이유 또한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물리학자이자 방사선학자인 데이비드 맨틱은 케네디가에 요청하여 증거물들을 재조사 할 수 있었다.
9차례에 걸친 검토와 실험한 결과 데이비드는 놀란운 결론은 내렸다. 바로 증거 은폐를 위해 케네디의 부검 사진이 조작되었다는 것이었다.
저격이후 케네디는 파크랜드 병원으로 후송되어 응급처치를 받았다.
병원의 신경외과의들이 긴급 호출되었으며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수혈을 하고 호흡을 위해 기관절개술을 실시했다.
그 당시 뇌의 많은 부분이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으며 뼈도 많이 손상되어 밖으로 돌출 되어 있었다.
의사들은 경황이 없었는지 수술전에 미리 환자의 상태를 스케치했어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총상환자 부검을 절차를 거쳤으면 지금까지 이렇게 음모론이 난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자리에는 전문 법의학자가 없었기에 총상의 들어가고 나간자리에 대한 설명도 당연히 없었다.
케네디 부처가 달라스 공항에 도착한지 2시간 반만에 대통령의 관이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실렸다.
텍사스 경찰관들은 수사를 위해 관의 이송을 막아섰지만 케네디의 지인들과 경호원들은 그들과 대치하며 자동차에 관을 싣고 빠른 속도로 도로를 주행해 비행기에 관을 싣자 마자 이륙했다. 이렇게 도착한 케네디의 관은 베데스더 해군기지 병원에서 부검을 실시했다.
여기서부터 케네디 암살사건의 미스터리는 시작된다. 해군기지에서 부검에 참여한 의사들은 총상을 전문으로 다루는 병리학자들이 아니였다.
살인 사건이나 총상으로 사망한 희생자를 부검한 경험이 전무한 부검의들로 구성되었던 것이다. 소견서는 매우 단순했다.
범인은 단독으로 뒤에서 총을 쐈고 총알은 3발이며 케네디가 앞으로 쓰러졌으니 뒤에서 총알이 날아왔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 케네디 부검서 >
데이비드 박사는 책속 케네디의 머리 x-ray 사진에서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x-ray이 측면 사진에는 두개골 뒤쪽 가까이에 ' 화이트 패치 ' 라는 하얀 부분이 있었다.

< 두개골 측면 화이트 패치 부분 >
이것은 일반 두개골 x-ray 사진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x-ray는 사물의 밀도가 높을 수록 하얗게 나타난다.
따라서 뼈는 하얀색이며 조직은 어둡게 보인다.

< 일반적인 두개골 측면 x-ray >
케네디의 x-ray와 일반적인 x-ray를 비교하면 조금 다른 점을 알수 있다.
케네디의 후두부가 아주 밝기 때문에 보통의 조직과 뼈로 이루어진 후두부에 비해 뼈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탄알에 의해 뇌가 밖으로 밀려나갔다면 화이트 패치가 확연히 도드라져 보일 수도 있다.

< 관통과 당시 케네디의 두개골 파열 >
케네디의 x-ray에서 머리 윗부분으로 탄환이 지나간 자리가 확인되었지만 소견서에서는 아랫부분이라고 기재되어있었다.
이것을 증거로 들며 케네디의 의학적 증거들이 은폐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총상 전문 병리학자들로 구성된 부검의들을 참석 시키지 않은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쟁점 3. 사라진 증거들
케네디 암살 사건은 법의학적으로 아쉬운 점을 남겼다. 교과서 보관소 6층 건물에서 발견된 소총과 탄피들이 보존되지 못한 것이다.
그뿐아니라 케네디와 함께 총상을 입은 코넬리 주지사의 옷을 세탁해버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증거가 없어져버렸다. 바로 케네디가 탄 리무진의 혈흔이었다.
케네디를 태운 리무진이 파크랜드 병원에 도착하자 그의 경호원들이 리무진의 혈흔을 닦아내버렸다.
혈액이 퍼진 형태나 뼈가 파열된 상태는 매우 중요한 증거이다.
혈흔의 방향등으로 총알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아무런 논란 없이 밝혀 낼 수 있었음에도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 것이다.
또한 증거물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았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사본들 뿐이다.
관계자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에 수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원본을 기념삼아 가져갔다고 한다.
이 증거를 되찾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원본이 있어야만 확실한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쟁점 4. 오스월드 단독범행
쟁점1에서 총알과 탄도 분석을 통해 오스월드의 단독소행임은 확실해졌다.
하지만 그가 혼자 범행을 주도했는지 그 뒤에 배후가 있는지는 아직도 논란거리이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가 달라스를 방문한 당시 동원된 경찰은 350명에 이른다. 엘름가에서 총격이 있은후 주위의 경찰들과 수사관들은 5분만에 주위를 봉쇄했다. 그리고 사건 발생 1시간 20분만에 오스월드를 검거했다.

< 검거된 오스월드 >
검거된 오스월드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과연 그 혼자 계획한 범행일까? 아니면 음모론처럼 뒤에 배후가 있는 것일까?
부검을 지시받은 해군기지 병원의 흄스와 보즈웰 중령은 법의학 부검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이었다.
반면 2차 세계 대전과 종전 후에 많은 활약을 했던 최고의 법의학 병리학자 2명은 제외됐다.
음모론자들은 이 두명이 제외된 이유가 민간인 신분이며 군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케네디 암살장면을 촬영한 일부 필름 영상부분이 삭제되었다고 한다.
사건이 있은후 3년동안 18명의 중요한 목격자들이 사망했다.
6명은 총에 맞아 죽었고 3명은 자동차 사고로 사명했으며, 2명은 자살했다. 또 1명은 목이 베인채 숨졌고 다른 1명은 목이 부러져 죽었다.
5명만이 자연사했다.
과연 배후 세력이 은폐를 위해 주요 목격자들을 죽인 것일까? 하지만 강한 의문이 하나 생긴다. 만약 은폐를 시도한 막강한 배후 세력이 있었다면 몇년이란 시간을 들여 사람들을 살해했을까? 오히려 입막음의 의도가 있었다면 케네디 암살 직후 목격자들을 처리했을 것이란 의문이 남는다.
만약 배후가 정말 있다면 어떤 목적으로 케네디를 암살한 것일까? 그리고 케네디가 죽으면 누가 가장 득을 보게 되는 것일까?
당시 CIA의 권력 남용은 케네디에게 위협적이었다. 케네디는 CIA의 완전 해체를 단언했다.
피그스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는 앨렌 델레스 CIA국장을 경질하였고 뒤이어 CIA의 비밀 군사 작전권도 합동 참모 본부로 이양했다.
이런 케네디의 행동은 CIA의 권력과 위세를 한층 약화시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CIA내에서는 케네디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1963년 11월 22일 딜리광장에서 찍은 사진 중에는 에드워드 G. 랜스데일 장군이 있었다.

< 11월 22일에 찍힌 에드워드 G. 랜스데일 >
랜스데일은 여러 암살 계획을 지휘한 유능한 CIA요원이었다.
그는 케네디로부터 피델 카스트로를 제거하려했던 몽구스 작전의 책임자로 임명된 적도 있었다.
일부에서는 그가 그의 팀을 이끌고 케네디를 암살하기위해 달라스에 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케네디를 따라 달라스에 왔을 지도 모르며 케네디로 부터 보안임무를 맡았을 지도 모른다.
음모론자들에 따르면 케네디로부터 위협을 느꼈을 사람은 또 있다고 한다.
존 에드가 후버와 린든 존슨 모두 케네디의 죽음으로 득 볼게 많은 입장이라고 주장한다.

< 존 에드가 후버 : FBI 국장 / 린든 존슨 : 케네디 암살이후 미국 36대 대통령으로 취임 >
존 케네디와 그의 동생이자 법무부장관인 로버트 형제는 후버의 미래를 쥐고 있었다.
당시 퇴임시기가 가까워진 후버의 FBI국장 지위는 오직 대통령에 의해서만 다시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친한 친구인 린든 존슨이 대통령이라면 후버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졌을 것이다.
후버보다 케네디가 죽으면 더 많은 이득을 볼 사람은 부대통령이던 린든 존슨이었다. 부대통령이던 존슨에 관한 일련의 정키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정치적 입장이 난감해졌다. 케네디 암살사건 현장에 린든 존슨도 동행했다. 그리고 총성이 울려퍼지자 철통보안을 받으며 파크랜드 병원으로 대피했다.
케네디의 죽음이 공식발표되자 존슨은 워싱턴으로 향하는 전용기에 올랐으며 전용기안에서 미국 36대 대통령선서를 했다.
존슨은 로버트 케네디와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는 분위기였다.
로버트 케네디가 영향력을 발휘하기 전에 존슨은 빠르게 대통령직에 취임할 필요가 있었다.
존슨은 로버트 케네디가 형의 죽음을 전해들은 30분후 전화를 통해 대통령선서에 대한 법적 자문을 구했다. 이는 꽤나 냉혹한 전화통화였다.
케네디 암살사건 조사단인 워렌 위원회를 발족한것도 존슨이었다.
후버와 존슨이외에도 득을 볼 다른 세력으로 군부를 꼽을 수 있다.
케네디 당선이후 케네디는 국방부가 무기를 축소하여 보고함으로써 예산을 증액 시켰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케네디는 국방부를 통제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1961년 6월 케네디는 군부뿐만 아니라 정부기간등의 모든 기관의 비밀 작전을 합동 참모 본주의 지휘하에 두도록 하는
국가 보안 행동법 55호에 서명했다.
이는 케네디 자신의 통제하에 모든 기관을 두려는 의도였다. 1963년 10월에 서명한 NSAM 263호에서 케네디는 1965년 말까지 베트남에서 모든 미군을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케네디가 암살된 후 불과 4일만에 존슨 대통령은 NSAM 273호에 서명해 케네디의 NSAM 263호를 번복했고 베트남전도 계속 수행하도록 했다.
존슨 대통령은 NSAM 273호는 음모론가의 배후설의 근거가 되었다.
이 법안이 입안된 날이 케네디가 암살되기 전날인 1963년 11월 21일이었기 때문이다.
군부가 케네디를 달가워하지 않을만한 이유는 더있다. 합동 참모 본부가 만장일치로 권고한 쿠바 침공을 케네디가 반대한 것이다.
뿐만아니라 군부의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소련과 핵실험 금지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개인과 기관을 적으로 만들수 있는 행동이었다.
만약 위에 나열한 사람과 조직들이 케네디를 암살하고 그 사실은 은폐하려고 했다면 희생양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리 하비 오스월드란 것이 음모론자들의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오스월드가 생포되자 공모자들이 궁지에 몰렸고 그 때문에 오스월드를 암살한 것이라고 한다.

< 1963년 11월 24일, 오스월드 총상에 의한 사망 >
오스월드 피살 참고 자료(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00238&cid=43082&categoryId=43082
과연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은 오스월드는 공모자들로 사주받은 잭 루비에 의해 암살 당한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살인 사건이었을까?
판단은 역시 각자의 몫이다.
참고 : 네셔널지오그라피, 익스트림 미스터리, 히스토리채널, 구글,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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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