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딩연애물] 사면초가 四面楚歌 -1화-
제1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
검색 포털 사이트에 '사면초가'를 검색하면 나오는 일반적인 사전적 설명이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어디도 도망갈 곳 없는 궁지에 몰린 상태....
오랜 세월이 지나 당시를 회상하면 그게 궁지에 몰린 상태가 아닌, 행복한 나날이었단 걸 깨닫게 되지만
당시의 나는 정말 하루하루가 긴장과 스릴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다.
내 고등학교 2학년 생활을 스팩타클하게 만들어주던 그 장소. 그 공간
그 네 사람에 의해 둘러쌓여진 교실 안 내 조그만한 책상.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해본다.
그럴싸한 이름이 생각 안 나서 주인공을 '남자주인공' 줄임말인 '남주'로 이름 짓겠습니다...ㅋㅋ
남주 : 야 너 2반이지?
태성 : 어, 너네반 어떻냐?
남주 : 그냥 그렇지 뭐. 확실히 문과니깐 좀 분위기 어수선한 것 같기도 하고.
태성 : 지랄 ㅋㅋ 그거 신경쓰지말고 너 할 일이나 잘해라 새끼야.
남주 : -_-;;네네....아 ㅅㅂ 근데 나랑 친한 애들은 죄다 이과야, 어떻게 된게?
고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문/이과가 반별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예체능반이 따로 없었던 우리학교는 문과반마다 예체능 학생들을 몇 명씩 배정하였다.
문과반이다보니 확실히 여학생 비율도 이전보다 높아졌고, 특히 예체능하는 여자애들은
10중 8,9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의 이쁜이들이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나랑 상관없는 여자들.
18년 인생동안 여자랑 썸씽조차 타본 적 없던 내가 뭘 바라겠느냐.
이제 달관을 넘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나는 바야흐로 석가모니.....
내가 배정된 2학년 8반의 교실문을 열고 들어갔다.
꽤 많은 학생들이 이미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난 벽쪽 자리에 앉아있는 처음보는 남자애에게 물었다.
남주 : 야, 미안한데. 혹시 자기 마음대로 앉는거야?
처음보는 남자애 : 응, 일단 맘대로 앉고, 아침조회시간에 자리배정 다시 한다는데?
남주 : 아, 고마워.
그냥 대충 반의 중간 쯤에 자리잡고 앉았다. 슬쩍 눈으로 스캔해본 결과
좀 놀 것 같은 애들이 많이 보였다. 뭐 나야 상관은 없지만, 그냥 이 무미건조한 고등학교 생활
아무탈 없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나에게......
그 날은 내 일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 사건의 시발점이 된 날이기도 하였다.
담임 : 야, 고마 반갑다. 내가 느그들 새 담임인 박봉환이다. 과목은 근현대사. 이 학교 온 지 한 5년 됐다.
빡센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건장한 체격의 담임이었다. 잔머리 굴리다가는 된통 깨질 것 같다는 불길함이 내 등언저리를 엄습고 있었다.
담임 : 지금부터 자리 배치를 할낀데, 먼저 손 들어봐라. 나는 윽쓰로 눈이 안 좋아서 꼭 앞쪽에 앉아야 한다. 혹은 공부 열심히 하고 싶어가 앞에 앉고 싶다. 손!
질문 퀄리티 보소 -_-;;;그렇게 물으면 누가 손 드나.
라고 생각했는데 한 2~3명이 손을 들었다. 그 놈들을 모두 맨 앞줄에 배치한 후......
담임 : 아 그라고, 내가 즐~대로 차별하는 건 아닌데. 예체능들은 맨 뒤로 좀 빠져도. 왜냐하믄, 너거는 보충수업 안 받고 학원 가잖아. 근데 이제 여 아가들 밤 11시까지 야자해야 하는데, 보충수업때부터 교실 중간중간에 빈자리 뻥뻥 뚫려 있으면 분위기도 뒤숭숭해지고 캐서 예체능들은 맨 뒤로 빼기로 했다.
이건 내 개인적 의견이 아니라, 쌤들 회의때 결정한 거니까....너거를 절대 차별하거나 그칸다고 생각하믄 안 된다 알았나? 예체능 맨 뒤로 가쎄요.
별 말 없이 예체능들이 맨 뒷줄로 빠졌다. 우리반 예체능은 모두 5명. 남학생 1명에 여학생 4명이었다.
담임 : 자자....이자 자리 함 뽑아보입시더. 너거가 선택해라.
1번. 기냥 출석부 순서대로 앉는다.
2번. 키 순서대로 앉는다.
3번. 제비뽑기한다.
우얄래?
아이들 ; 쌤, 제비뽑기해요!!
담임 : 그칼 줄 알았다...짜슥들아...무슨 한 두 살 묵은 얼라들도 아니고.....
기다리봐라. 종이 만들어보자.
담임은 학생들에게 빌린 연습장 종이를 손으로 대충 찢은 뒤 숫자를 휘갈겨 쓰고, 꼬깃꼬깃 접기 시작했다.
담임 : 야 뽑기 순서는 상관없제? 어차피 너거 운 아니가? 안 그렇나?
아이들 : 네, 앞줄부터 빨리빨리해요!!
담임 : 아따, 짜슥들 흥분한 거 보소. 고마 칾 다운 하이소......
그렇게 제비뽑기가 시작되었다. 모두들 들뜨고 기쁜듯이 시끌벅적했지만 난 그저그랬다.
어떤 자리가 걸려도 상관없었고, 특별히 앉고 싶은 자리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리 옮기기 귀찮으니까 지금 이 자리가 좋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제비뽑기가 모두 끝나고....
26
내가 뽑은 숫자였다. 교실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정 중앙에서 약간 왼쪽 아래쪽에 위치한 지점....
뭐 상관없었다. 그냥 친한 애들이나 빨리 사겼으면 하는 생각뿐...
그런데.
흐리멍텅한 나의 생활이 바뀌기 시작한 건 아마 그 순간부터이리라.
나를 기준으로 좌측은 25번. 우측은 27번. 앞쪽은 20번. 뒤쪽은 32번.
당시 우리반은 학생수 36명에 6 X 6 책상배열로 앉았었다.
내 주변에 앉은 애들은 다 조용하고 착한 애들이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찰나.
?? : 오, X발. 나 창가네? 존나 좋아 ㅋㅋㅋ
누군가가 큰 소리로 떠들며 내 옆자리인 25번 책상의 의자를 거칠게 빼낸 뒤 자리에 걸터앉았다.
?? : 와 날씨 좋으면 잠자기 존나 좋겠다 ㅋㅋㅋ
-_-;;아ㅅㅂ 존나 시끄럽네. 속으로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권혜영.
우리학교 2학년 여자 일진 짱.
비주얼 탑클래스...입에 10원짜리 욕을 항상 물고 살고, 담배도 핀다는 양아치 중에 쌩양아치.......
그런데 희안하게 보통 양아치녀들과는 달리 사고는 많이 쳐도 남자에 관한 소문은 일체 없는 그런 여자였다.
우리학교 입학해서 누구랑 사귀었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고.
여튼 아...ㅅㅂ X됐다 -_-;;진짜.....뭐 이딴 년이 내 옆이냐.........
혼자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정면을 응시하고 있을 때, 앞에서 어떤 훤칠한 키의 또다른 비주얼 킹녀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쿵.
쿵.
와, ㅅㅂ 존나 이쁘네. 권혜영만큼 이쁘네.......
그리고 그 여자는 시크하게 내 옆을 스쳐지나간 뒤......
32번 자리에 앉았다.
어디?
내 뒷자리.
권혜영 : 오~ 혜미 안녕? 너도 우리반이냐?
정혜미 : 어, 안녕. 같은 반이네.
정혜미......예체능학생. 미술 전공으로 서양화 전공. 교내에서도 인기가 존나 많은 편인 여자였다.
어떤 성격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일단 여자치고 확실히 큰 키에, 권혜영이 약간
표준 사이즈 체형이라면 정혜미는 늘씬하고 긴 스타일이랄까.
-_-;;근데 내가 누구 스타일을 평가하는 거지 지금....여튼....
?? : 야, 너 필통 떨어졌어.
툭.
누군가 땅에 떨어진 내 필통을 주워 책상에 얹어주었다.
남주 : 아, 고마....으헙앙러!!ㄴ이ㅏㅑ험ㄴ아르ㅏㅣㅂ주하ㅣㅇ너히ㅏㅁㄴ어냐ㅣㅏㅇ!!!
?? : .....??
안다정.
흔히 말하는 '간판'
그래. 우리 학교의 간판.
안다정.
뭐지....ㅅㅂ.....왜 내 옆자리지?
비주얼 탑 오브 탑에 공부도 꽤하고, 놀지도 않고, 무엇보다 아직 고등학교 와서 남친을 사귄
경험이 없기 때문에 더 희소가치가 쩐다고 남자들 사이에서 소문난 여자.....
가까이서 보니깐 진심 후덜덜이네.......
와 양사이드, 뒤로 존나 예쁜 애들만 앉았네...이거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식은땀이 흐르고 불안함과 초조함, 긴장감에 애꿏은 샤프심 뒤꽁지만 딸깍딸깍 거리고 있는 찰나
교탁에서 종이조각을 집어서 펼친 뒤, 내쪽? 아니 내 근처? 쪽을 지그시 바라보던 한 여자애가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 뭐지, 얘는 또 왜이렇게 예쁘지? ㅅㅂ 우리학교에 예쁜애들이 이렇게 많았나? 1학년때 우리반엔 한명도 없었는데.
그리고 그 여자애는 20번.
내 앞자리에 앉았다.
?? : 야, 송선하! 이따 매점가자!!
송선하 : 어, 알았어.
아.....송선하....그게 얘 이름이구나.
그렇게 새학기 자리배정이 끝났다.
내가 당시 새하얀 백지장 같은 머릿속에 떠오른 유일한 단어.
사면초가
난 물러설 곳 없는 난관에 사방이 막힌
오갈데 없는 길잃은 병사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