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의 그림자가 한국축구에 남긴 숙제
거스 히딩크 감독은 한국축구에게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신화의 영광을 선물해준 '축구영웅'이다. 이전까지 월드컵 본선에서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변방의 약체에 불과했던 한국축구는 히딩크 감독을 만나면서 처음으로 세계축구와 경쟁할 수 있는 노하우를 터득했다. 히딩크 감독도 한국에서의 경력을 통하여 지도자 커리어의 슬럼프를 딛고 제 2의 전성기를 열었다. 어느덧 1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히딩크와 한국축구의 인연은 여전히 각별하다.
최근 히딩크 감독이 한국축구 대표팀 감독으로서 복귀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여론이 한동안 떠들썩하게 달아올랐다. 일부 매체에서 히딩크 측 관계자들의 입장을 빌어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 본선에서 다시 한국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기 원한다"는 보도가 나왔고, 여기에 국내 축구팬들이 폭발적인 관심을 보이면서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졌다.
마침 신태용 감독이 이끌던 축구대표팀이 월드컵 본선행을 갓 확정지은 상황이라 히딩크 측의 진의를 놓고 다양한 추측이 나왔다. 결국 축구협회가 직접 나서서 히딩크 복귀설은 사실무근이며 월드컵 본선은 신태용 감독이 지휘한다고 분명한 입장정리를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일부 팬들을 중심으로 히딩크 감독의 영입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목소리가 계속 나오는 등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9회 연속 월드컵 본선진출라는 경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내 여론이 분열되며 혼란스러운 양상이다.
히딩크 복귀설을 둘러싼 해프닝은 두 가지 측면으로 분석할 수 있다. 첫째는 한국축구의 구조적인 병폐와 자정 의지에 대한 불신, 둘째는 아직도 히딩크 시절의 향수에서 벗어나지못하는 일부 팬들의 낡은 판타지다.
한국축구에 대한 불신이 히딩크의 향수를 깨웠다
히딩크 복귀설이 화제로 떠오른 것은 축구대표팀의 부진한 경기력에 대한 불만이 절정에 달한 시점이었다. 슈틸리케 전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경질된 이후, 신태용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은 이란-우즈베크전에서 2연속 무승부를 거두고도 간신히 월드컵 본선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자력이 아닌 상대팀들의 물고 물리는 혼전으로 어부지리를 얻은 것에 가까웠다. 신태용호 역시 2경기 연속 한 골도 넣지 못하는 빈공에 시달렸고 경기운영에서도 아쉬운 모습을 연이어 노출하며 졸전이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여기에 축구대표팀은 경기 외적으로도 팬들의 여론이나 기대와는 동떨어진 행보를 거듭했다. 이란전 직후 주장 김영권의 '팬 비하성 발언'을 시작으로, 우즈베크전 이후 졸전에 실망한 국민들의 분위기와는 상반되게 헹가래까지 치며 본선진출을 자축하는가 하면, 신태용 감독이 '졸전'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 발끈하거나 지속적으로 책임을 회피하는(시간 부족, 잔디 탓) 듯한 인터뷰를 거듭한 것도 도마에 올랐다. 가뜩이나 한국축구에 대한 국민적 실망감이 컸던 상황에서 겸손과 자중은 커녕, 지속적으로 팬들의 여론을 무시하는 듯한 축구협회와 대표팀 관계자들의 오만한 행태는 성난 여론에 기름을 붓기에 충분했다.
한국축구는 2010 남아공월드컵 원정 16강 이후 지난 7년여간 계속된 대표팀의 혼란, 국내 지도자들의 능력에 대한 불신까지 더해지며 자연스럽게 새로운 대안을 갈망하는 여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때마침 터져나온 히딩크 감독의 복귀설은 축구팬들에게는 잠시나마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꿔말하면 한국축구가 그동안 '정상적으로' 잘 돌아갔더라면 15년이나 지난 히딩크의 향수에 집착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히딩크 측의 기회주의적인 여론몰이를 지적하고 있지만 이는 문제의 본질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애당초 이런 사태를 불러온 근본 원인은 히딩크가 아니라 바로 그만큼 허술하고 원칙없는 행보로 안팎에서 모두 만만하게 비춰진 한국축구 내부의 문제인 것이다.
포퓰리즘에 휩쓸린 '히딩크 판타지'의 위험성
한편으로는 아직도 히딩크 복귀가 현실성이 있다고 믿거나, 히딩크만 오면 대표팀의 구조적 문제점들이 금세 달라질 것이라고 믿는 일부 비이성적인 팬들의 맹목적인 '냄비 여론'도 한국축구의 미래에 도움이 되지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지금 시점에서 히딩크 감독의 복귀는 가능하지도 않고 굳이 그래야할 명분도 없다. 차라리 슈틸리케 감독이 경질되고 본선진출이 불투명하던 시점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대표팀은 신태용호 체제에서 본선진출에 성공한 상황이다. 지난 최종예선에서 신태용 감독의 리더십이나 팀운영상의 문제점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 어쨌든 본선진출에 성공한 감독을 이제와서 단 2경기만에 다시 교체하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만일 그렇게 된다고 해도 오히려 여론을 빙자한 '포퓰리즘'에 휘둘려 가장 중요한 '신뢰와 원칙'을 망가뜨리는 나쁜 선례만 남기게 된다. 더 유명한 감독이 온다고 해서 멀쩡한 기존 감독과 계약기간을 무시해가며 쫓아낸다면 앞으로 누가 한국 대표팀을 위하여 헌신할 것이며 기존 감독도 계약기간중 더 좋은 조건을 쫓아 다른 팀으로 옮겨가더라도 할말이 없어진다. 한국축구의 대외적 이미지가 얼마나 우습게 될지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시대와 환경의 차이를 무시하고 히딩크 감독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맹신도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히딩크 감독은 분명히 유능한 명장이었지만 그가 한국에서 1년반만에 엄청난 성과를 낼수 있었던 배경에는 본인의 능력 외에도 여러 가지 특수한 상황이 있었다. 당시 대표팀은 월드컵 개최국으로서의 책임감을 안고 유례없는 전폭적인 투자와 지원을 받았다. 히딩크 감독은 이전과 이후 어느 대표팀 감독들도 누리지 못한 무소불위의 전권을 보장받으며 대표팀을 마치 클럽팀처럼 상시 운영하는 게 가능했다. 지금같으면 절대 불가능한 상황이다.
히딩크 감독도 어느덧 은퇴를 앞둔 칠순의 노장이다. 2010년대 이후로는 터키-네덜란드 대표팀, 첼시 임시 감독 등을 거치며 인상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고 지도자로서 전성기를 지나 내리막길에 접어들고 있다는 평가다. 히딩크의 조국이자 한때 한국축구의 롤모델로 꼽혔던 네덜란드 축구 역시 최근 유럽에서 하향세를 그리고 있다. 현대축구의 흐름을 꿰?어보고 긴 안목으로 축구대표팀의 개혁을 이끌어줄 수 있는 인물로 지금의 히딩크 감독이 최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한국 대표팀에서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과거의 명성에까지 흠집만 남길수 있다. 월드컵을 제패했던 마르첼로 리피(이탈리아)나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브라질), 비센테 델 보스케(스페인)같은 세계적인 명장들도 두 번째 도전에서는 과거의 영광마저 무색케할 정도의 엄청난 흑역사를 남긴 전력이 있다.
축구는 불과 몇년 사이에도 빠르게 흐름이 변화하고 있으며, 과거의 성공을 다시 재현한다는 것은 그만큼 더 어렵다. 히딩크 감독을 위해서라도 그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현장의 최일선보다는 앞으로도 한국축구를 위하여 적절한 조언이나 자문을 구할 수 있는 원로로서 남는게 낫다. 아름다운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둘 때 가장 아름답다.
한국축구의 방향성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다시 필요한 시기
다만 신태용 감독이나 축구협회가 한번쯤 돌아봐야 할 것은 왜 아직도 많은 팬들이 히딩크의 향수를 그리워하는가. 히딩크를 통하여 보고 싶었던 한국축구의 가치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축구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어쩌면 '발상의 전환'이었다. "한국 선수들은 기술은 좋은데 체력이 약하다." "평가전은 강팀과" "포메이션은 숫자놀음" "두 가지 이상 포지션을 소화하는 멀티플레이어의 중요성 "베스트 11을 빨리 확정할 필요는 없다." "그라운드 안에서 선후배는 없다"는 수많은 어록을 통하여 한국축구의 오랜 관습과 고정관념에 대하여 과감한 문제제기를 시도했다. 신기한 전술이나 엄청난 슈퍼스타없이 이처럼 기본적인 발상의 전환만으로도 더 나은 축구가 가능하다는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게 바로 히딩크 감독 시절이었다.
한국축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서 대하여 2002년의 히딩크만큼 새로운 패러다임을 뚜렷하게 제시한 인물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대부분의 대표팀 감독들은 당장의 성적에만 급급하는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만화축구'니 '점유율' '원팀'같은 그럴듯한 구호들은 있었지만 십중팔구는 감독이 바뀔 때마다 실체없는 메아리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이제는 한국축구도 독일이나 스페인처럼 고유한 색깔과 비전을 연속성있게 만들거야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내 축구계가 히딩크의 이름이 다시 거론되는 자체를 질투하거나 팬들을 원망하는 것은 오히려 번지수를 잘못 짚은 반응이다. 오히려 축구협회와 국내 지도자들이 그만큼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게 된 원인을 스스로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15년이 넘도록 대표팀이 히딩크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팬들의 책임이 아니다.
http://sports.new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047&aid=0002161982
댓글 1